68화
아론 선장의 남대륙 원정은 마나석과 새로운 상품만 가지고 온 것이 아니었다.
전염병.
남대륙에서 가지고 온 것 중 무언가가 남대륙의 풍토병을 전파 시킨 것이다.
고열과 함께 탈수 증상을 일으키는 병은, 처음에는 증상이 심하지 않아 그것이 전염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단순히 가벼운 감기 정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다른 영지와 다르게 뉴렌달에서는 감기 정도는 쉽게 이겨낼 수 있는 병이였기에 영지민들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자 이게 전염병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염병의 존재를 확인한 지금은 항구와 전염병이 전파된 마을들은 완전히 봉쇄된 상태였다.
"자하. 겐드리는 지금 어디 있어?"
"바로 병원으로 보냈습니다. 겐드리 외에도 치료 마법을 조금이라도 쓸 줄 아는 마법사들은 모두 병원을 지원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잘했어. 나머지 마법사들은 전부 도시 정화 작업을 도와준다."
마법사들과 함께 도시로 돌아오는 내 앞에 칠리아 가문의 귀족들이 다가왔다.
칠리아는 가장 먼저 전염병을 확인한 마을이었기 때문에 이들 역시 마을을 벗어나서는 안 되었는데 내 지시를 어기고 도시로 들어온 것이다.
"분명 칠리아는 마을을 봉쇄하라고 했는데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렌달 공작님. 저희 가문의 사람들은 전염병의 증상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을에 남아있기에는 병에 걸릴 것 같아서 이렇게 피신을 했습니다."
"아직 어떤 형태로 병이 전파되는지 확인이 되지 않은 상태다.
너희가 병을 전파 시킬 수 있는 전파원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냐!"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병에 걸릴까 너무 무서워서···"
"마을의 주인이라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을을 버리다니.
칫- 지금은 상황이 그러니, 내 지시를 어긴 처벌은 나중에 내리도록 하겠다.
칠리아 가문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격리하도록 한다."
내가 내린 격리 조치에도 칠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대단한 결심이라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공작님. 그럼 저희 마을은 어떻게···
전염병이 더 확산되기 전에 마을을 불태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전염병을 막을 수 있다면, 저는 마을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당장 마을을 불태워 전염병의 확산을 막으셔도 괜찮습니다.
공작님께서 지시만 하신다면 저 역시 그 일을 돕겠습니다."
칠리아의 말에 나는 순간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병을 막기 위해 마을을 전부 불태운다니.
정말 쉽고 간단한 해결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게 위생과 의료 시스템이 떨어지는 이세계의 방식이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마을을 전부 태워버리는 것보다 전염병을 막기에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지구에서도 위생에 대한 개념이 떨어지고, 의료 시설이 부족한 시대에는 이 같은 방법을 이용해 전염병을 막았을 것이다.
당연히 이세계에서도 이 이상의 해결법은 없었다.
그리고 아무리 노동력이 중요하다고 해도 귀족과 백성의 가치가 다른 이세계에서는 백성들의 목숨 따위는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권력자들에게 백성은 시간만 있으면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는 재산이었으니까.
'하지만 나까지 저들과 같은 방법을 쓸 필요는 없는 거지.'
다행스럽게도 뉴렌달의 위생 상태는 다른 영지와 확연히 차이를 보일 정도로 좋은 상태였다.
도시에서 나오는 오, 폐수를 처리하는 하수처리장도 있고, 도시에 깨끗한 물을 제공하고 있는 상수원도 있다.
그 시설들은 마법사들이 꾸준하게 정화 마법을 써주고 있으니 도시의 위생은 다른 어떤 곳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환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문적인 의료기관인 병원과 급할 때는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들도 있는 영지였다.
영지민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는 극단적인 해결법은 최후의 최후에서나 사용할 방법이었다.
'되도록 그 상황까지는 가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전염병을 막기 위해 영지를 봉쇄하고, 정화 작업을 시작하자 영지의 혼란은 점차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항구에 생활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 중 50명이 넘는 영지민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칠리아 마을이나 열병이 전파된 마을들을 더하면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도 사망자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리오의 보고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극단적인 해결법까지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전염병의 기세는 빠르게 가라앉은 것이다.
"마을이나 지역에 대한 격리도 잘 이뤄지고 있는 거지?"
"네. 더 이상 열병이 나타나는 마을도 없고, 도시에서도 특별히 병이 전파되었다는 보고는 없습니다.
마법사들이 계속해서 마을과 도시를 정화하고 있기 때문에 이 상태로 며칠만 더 유지된다면 전염병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정말 우습게도 영주에게 권력이 집중된 세계였기에 더 쉽게 전염병을 막을 수 있었다.
영주의 절대적인 명령으로 영지민들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제어할 수 있었기에 전염병이 더 이상 확산 되지 않은 것이다.
영주의 명령을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이세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병원이나 격리된 마을에서는 열병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상태만 호전된다면 영지의 봉쇄도 빠르게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주님. 죄송합니다.
제가 데리고 온 돼지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아론 선장의 잘못이라기보다는 고기를 똑바로 관리하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이지.
나도 그 돼지고기를 먹었는데 아무렇지도 안 잖아?"
"그래도··· 정말 죄송합니다."
열병의 원인을 추적해 본 결과, 열병의 진원지는 아론이 남대륙에서 가지고 온 돼지였다.
영지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다 실어오라고 한 말에 아론은 남대륙에서만 자라는 작은 흑돼지를 가지고 온 것이다.
남대륙에서 맛을 보고 새로운 특산품으로 만들기 좋을 것 같다는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행한 일이었다.
나 역시 그 맛을 보고 감탄하며 아론을 칭찬했을 정도로 훌륭한 돼지였다.
다만 고기를 관리하는 데 있어 문제가 생겼고, 그 과정에서 열병을 일으키게 된 것이었을 뿐이다.
"다 영지를 위한 충성심으로 한 일이니까 그걸로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아론에게는 따로 책임을 물을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감사합니다. 영주님."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아론의 모습에 리오가 말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영지민들의 비난을 피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지.
전염병의 원인은 분명하니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배를 띄울 수 있을 거야. 그때가 되면 영지민들도 이번 전염병 사태를 잊어버리겠지."
"아론 선장을 위해서도 빨리 전염병이 잡혀야겠군요."
"병원의 보고로는 금방 잡힐 거라고 예상된다던데.
아론에게는 언제든 다시 배를 띄울 준비를 하라고 전해.
한 번의 실수로 아론 같은 항해사를 은퇴시킬 수는 없지."
아직 아론 이상으로 선박을 몰 만한 사람이 없기에 아론이 저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항구를 가진 도시가 해상 무역을 포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영지의 봉쇄로 인한 뉴렌달 브랜드의 유통이 막히자 왕도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도시의 봉쇄를 풀어달라는 요청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전염병이 다 잡히면 자연스럽게 봉쇄를 풀 거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
"국왕 폐하께서도 메세지를 남기셨는데 어떻게 합니까?"
"국왕이?"
"네. 하루빨리 뉴렌달의 상품을 왕도에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뉴렌달 브랜드의 유통이 막혀있어서 그런지 왕궁의 물품들도 비상이 걸린 것 같습니다."
선왕과 마찬가지로 보리스 국왕도 뉴렌달 브랜드를 많이 소비해주는 고객이었다.
특히 왕위에 오른 이후 커피를 달고 산다는 말에 보리스가 열심히 정무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중앙의 정치꾼들로 인한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 것 같았다.
'나는 절대로 중앙 정치에 참여하지 않아야지.'
"그럼 왕궁의 요청만 들어줘. 다른 곳은 몰라도 국왕과의 관계는 틀어지면 곤란하잖아."
가뜩이나 중앙의 귀족들은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렌달을 중심으로 한 지방 영지들의 성장이 중앙의 힘을 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만큼 어떻게 해서든 아렌달 영지의 영향력을 깎아 내기 위해 노력하는 귀족들도 있을 정도였다.
아렌달이 가지고 있는 힘과 국왕의 신뢰 덕분에 겨우 불만을 표시하는 정도였지만 말이다.
"근데 전염병이 돌면 왕국이 위험해지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전염병이 더 퍼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는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야?"
"정치꾼들에게 그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냥 영주님을 공격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겠지요."
"그냥 확 영지의 봉쇄를 풀어버릴까?
어차피 우리 영지는 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영주님!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영주님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말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설마 진짜로 그러겠어?"
전염병이 문명을 얼마나 퇴보시키는지 나는 알고 있다.
대역병이 지나가고 난 이후 사라진 문명이 얼마나 많은지는 굳이 하나하나 열거하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였으니까.
지금까지 내가 이세계의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데, 자칫하면 내가 10년 동안 이뤄온 모든 것들이 무너질 수도 있는 위험한 짓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날이 점점 더 따뜻해지면서 열병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세 자릿수 이상의 영지민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지금까지 이세계에서 전염병이 돌았을 때와 비교하면 이번 열병의 대처는 박수를 받아도 될 만큼 훌륭한 결과였다.
당연히 영지민들이 나에게 보내는 찬양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지의 분위기가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전염병이 돌았던 마을이나 지역은 눈에 보일 정도로 차별을 받고 있었다.
병을 이겨내고 돌아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사람들은 병이 완치되었음에도 일자리를 잃었다며 영주관을 찾아와 하소연하기까지 했다.
얼마 전 각종 이벤트로 활기를 되찾았던 도시의 분위기가 다시 침체되어버린 것이다.
"이건 뭐, 다시 이벤트라도 열어야 하는 건가?"
"시간이 지나면 영지민들도 이번 사태를 잊고 다시 활기를 되찾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과연 그럴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은 꿈에도 꾼 적이 없습니다. 영주님.
이미 영주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번 일은 영주님이 아닌 영지민들이 이겨내야 하는 일입니다."
리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시 나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 영지민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이 사태를 이겨내야겠지.
뭐든지 내가 다 해결해 줄 수는 없는 일이야.'
물론 내가 나서면 금방 해결이 될 수 있는 문제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영주는 영주로서 해야 할 일이 있는 법.
영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까지 모두 맡아서 할 수는 없었다.
그럴 바에는 굳이 학교를 만들고, 인재를 교육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생활이 무너진 영지민들에 대한 지원은 아끼지 말도록 해.
어차피 귀족들에게 투자를 받아서 영지에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까 봐 이미 행정관들이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지민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일 잘하네."
"저희가 누구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인데요?
이 정도는 이제 알아서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리오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또 한 번 사람들의 의식이 변한 건가?
나쁘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