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현대인-66화 (66/169)

66화

"영주님. 국왕 폐하께서 영토 확장에 대한 치하의 메세지를 보내 왔습니다.

그래도 베르겐 왕국의 영토가 늘어나고 있으니 국왕 폐하께서도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역시 선왕과 다르게 나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주는 보리스 국왕이었다.

"그럼 2차 분양을 시작해 볼까?"

바깥의 영토를 분배하겠다는 소식에 기다리고 있던 귀족들이 주머니를 털기 시작했다.

'역시 부동산 불패.

어쩌면 이제는 왕국의 재산보다 내 재산이 더 많을지도.'

영지를 개발할 돈이 없어 국왕에게 돈을 빌렸던 게 10년 전의 일이었다.

10년 만에 이름뿐인 변경백에서 왕국 제일의 영지가 되었으니 말 그대로 강산이 변한 일을 해내고 말았다.

그리고 기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른 어떤 영지보다 우위에 있는 영지에 나 역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오기로 한 학생들의 선별은 잘 되었나?"

"예. 선별을 마치고 신 학교의 입학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학생들이 새 시대를 이끌어갈 인재들이 될 수도 있으니까 잘 가르쳐 보라고."

"맡겨주십시오."

행정관들을 키우는 전문 교육 시설에 리오도 큰 기대를 하는 것 같았다.

벌써부터 자신의 밑으로 들어올 일꾼들을 어떻게 굴릴지 고민하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 꼰대 같은 모습을 보여서 그렇지 리오가 일은 참 잘해.'

신 학교에 입학할 학생들이 뉴렌달에 찾아왔다.

뉴렌달 출신들은 기초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기에 평범한 영지민들도 신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외부에서 들어온 유학생들은 각자 배경이 만만치 않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백성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기초 교육도 받지 못하는 세상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외부에서 들어온 유학생은 귀족 가문 출신이거나 부유한 상인들의 자제가 대부분이었다.

"배경이 든든한 녀석들이라 그런지 의연한 척을 하는 것 같지만, 눈이 돌아가는 건 숨기지 못하네."

한때는 아렌달 영지가 베르겐에서 제일가는 시골이었던 적도 있었다.

샤를로트가 시골로 시집가기 싫다며 거짓말까지 했던 영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는 외부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눈을 가만히 두지 못할 정도의 도시가 되어있었다.

"저 모습들을 보니 영지에서 지내면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겠네."

"이미 선별과정에서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서약서에 서명도 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영지의 교육 시설도 잘 돌아가고 있고, 영토 확장도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으며, 영지 밖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토목 공사도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아리아도 벌써 뛰어다니기 시작했지.'

나는 방안을 뛰어다니는 아리아를 붙잡아 내 무릎 위에 앉히고는 샤를로트에게 말했다.

"이제 괜찮아?"

"괜찮아요."

내 물음에 샤를로트는 부푼 배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블린과 연극을 보기로 했는데 약속을 못 지켰네요. 오늘 극장에서 신작 '뉴렌달의 휴일'을 공연한다고 했는데."

"연극이야 다음에 봐도 괜찮잖아. 앞으로도 공연은 계속 있을 텐데."

"당신은 연극을 좋아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첫 공연은 첫 공연으로서의 가치가 있는 법이에요."

'공연이 다 똑같은 공연 아닌가? 첫 공연은 뭐가 다른 건가?'

연극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말이었지만, 샤를로트는 정말 아쉬운 것 같았다.

"신작은 잘 써지고 있어?"

"아니요. 아무래도 요즘에는 영주관 밖으로 나가지를 못해서 이야기가 잘 써지질 않아요.

아무래도 직접 사람들의 모습을 봐야 글이 잘 나오는데."

"이래저래 아이가 빨리 태어나야겠네."

내 말에 샤를로트가 다시 한번 배를 쓰다듬었다.

그런 샤를로트의 모습에 아리아가 발버둥 치자 나는 아리아를 샤를로트 옆에 앉혀주었다.

"그거 아세요?"

"······"

"오드리가 그러는데 뉴렌달에 작가들이 많이 모였다고 해요."

극단이 많이 들어와 있는 만큼 그들에게 작품을 제공할 작가들이 모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가 샤를로트를 챙겨주기 위해 저작권료를 받기 시작해서 그런지 극을 쓴다는 작가들이 모두 뉴렌달에 들어와서 연극을 만들고 있었다.

"덕분에 뉴렌달에서는 매일 같이 새로운 연극이 만들어지고 있나 봐요."

"샤를로트 덕분에 뉴렌달에 문학이 꽃을 피우나 보네."

"제가 아니라 당신 덕분이죠.

당신이 극단을 불러주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연극과 이야기들이 모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저 새로운 문화를 도입했을 뿐인 나로서는 그 행동이 문학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말에 감회가 새로웠다.

인문 사회 계열의 신 학교도 열리고, 작가들의 유입으로 문학이 꽃을 피우려 한다는 이야기에 다시 한번 뉴렌달의 문화력이 올라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극단과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하면서 도시에는 연극을 즐기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남자들이 스포츠를 즐기는 것 이상으로 여자들의 문화 활동이 늘어나면서 배우들의 인기도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천민과 같은 대우를 받던 배우들은 더 이상 무시 받지 않을 뿐 아니라 지구의 연예인들처럼 그들을 따라다니는 팬들까지 생길 정도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오드리를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을지도 몰랐겠네."

"하하- 영주님. 오드리가 공작 부인께 부탁까지 해서 연극을 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저를 위한 연극까지 준비했을 정도니 좋아하는 마음은 저보다 오드리가 더 컸을 겁니다."

"볼튼이 오드리의 마음을 몰라 쩔쩔매던 걸 기억하고 있는데, 이건 무슨 자신감이야?"

"하하- 공작 부인 만큼은 아니지만, 오드리도 이 도시에서는 스타 아니겠습니까?

그런 스타의 사랑을 받으려면 저 역시 그 스타에 어울릴 만한 모습을 보여야지요.

슈퍼스타 오드리의 남편이 접니다. 하하하-"

볼튼의 뻔뻔한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뻔뻔하게 웃던 볼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드리인가?"

"뭐?"

그리고 볼튼의 말대로 시종을 따라가는 오드리가 모습이 보였다.

"오드리!"

볼튼의 목소리에 오드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큰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어? 갑자기 왜? 영주님, 잠시···"

"그래. 갔다 와."

오드리의 눈물에 볼튼이 오드리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오드리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굳은 얼굴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야?"

"친분이 있던 이웃 극단에 문제가 생겨서 공작부인을 찾아 왔다고 합니다.

이런 하소연을 할 곳이 공작 부인뿐이라고···"

"샤를로트에게 하소연을?"

"죄송합니다."

"아니- 샤를로트가 오드리와 극단들을 후원해주고 있으니 그럴 수 있지."

임신 중인 샤를로트에게 하소연을 한다는 게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극단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후원자인 샤를로트를 찾아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볼튼이 아니라 샤를로트를 먼저 찾은 건 무슨 일이지?'

"그런데 무슨 문제가 생겼길래 저렇게 울면서 샤를로트를 찾아?"

"그게···"

"?"

"연극을 하던 배우들이 뉴렌달로 유학 온 귀족들에게···"

"하아-"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이 무색하게 사건이 발생했다.

뉴렌달로 유학을 온 귀족들의 눈에 극단의 배우들이 들어온 것이다.

배우들이 인기를 끄는 스타라고 해도 그건 뉴렌달에서의 이야기일 뿐, 뉴렌달만 벗어나도 천민이나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귀족 가문의 자제들에게는 자기들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는 사람들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 돈으로 대가를 치르려고 했던 것 같은데, 이미 뉴렌달에 적응한 극단 사람들이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 모습에 귀족들은 천한 광대들이 자신들을 호의를 무시했다고 생각하며 힘을 쓴 것이다. 결국, 배우들이 크게 다쳤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었다.

귀족에 의한 폭행과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오드리가 볼튼이 아닌 샤를로트를 찾아온 이유도 귀족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저 천한 것들에게 호의를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저희에게 죄를 묻는 것은 옳은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귀족을 무시한 저들에게 벌을 내리셔야 하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그게 너희들의 생각인가?"

내 물음에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웃음을 터트린 내 모습에 귀족들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함께 불려온 극단의 피해자들에게 소리쳤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설치더니 꼴좋구나!

지금이라도 귀족을 무시했던 죄를 빌어야 할 것이다!"

귀족의 말에 극단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빌기 시작했다.

이들은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 앞에 굴복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순응하고 받아들이려는 모습에 조금 화가 났다.

이들도 내 권역 안에 있는 내 영지민들이었으니까.

"그런데 너희들은 유학을 오면서 서약을 하지 않았던가?"

"네?"

"서약이라면···"

"분명 뉴렌달에서 유학 중에는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서약서에 서명했을 텐데?"

"아!"

그 말에 귀족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제 서야 자신들이 했던 서약이 기억이 났는지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당황하는 것도 잠시. 금세 당당한 표정으로 돌아와서 말했다.

"분명 그런 서약을 하기는 했지만, 이건 저희가 사고를 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희는 귀족으로서 백성을 계도했을 뿐입니다."

"그럼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저희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정말 귀족적이고 답답한 대답이었다.

속이 콱콱 막히는 대답에 나는 옆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리오에게 말했다.

"그 서약서에는 분명 뉴렌달에 있는 동안은 이곳의 법을 따르겠다는 내용도 있었지?"

"네. 영주님."

리오의 대답에 귀족들의 표정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뉴렌달에서 살인을 한 죄인의 처벌은?"

"합당한 이유도 없이 살인한 죄인은··· 사형입니다."

"사, 사형이라니요!"

"아렌달 공작님! 저, 저희는 귀족입니다!"

"그래서?"

"귀족법에 귀족은 반역이 아니라면 사형할 수 없···"

"하아- 귀족법?"

귀족법을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내 앞에서 귀족법을 꺼낸 거야?

덴프린스와 이자르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는 건가?"

"!"

"공작님. 저는 왕국의 법률을 관리하고 계신 덴버 백작의 손자입니다.

귀족법과 왕국법에서는 귀족이 백성을 죽인다고 해도 살인죄를 묻는 일이 없습니다.

어떻게 귀족에게 일반 백성과 같은 법을 적용하신단 말씀입니까."

그의 말에 다른 귀족들도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대답은 "어쩌라고?"다.

"아, 아렌달 공작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왕국의 법률을 관리하는 덴버 백작의···"

"덴버 백작이 뭐라고. 그의 작위가 백작이라고 해도 영주도 아닌 일개 대신 아닌가?

그런데 공작인 내 앞에서 영지도 없는 백작을 배경이라고 들먹이는 건가?"

"!"

"분명 너희는 서약했다.

뉴렌달에서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만약 사고를 치게 되면 이곳의 법을 따르겠다고 말이야.

다시 한번 말해주지.

뉴렌달에서는 너희들처럼 합당한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은 사형이야."

내 단호한 판결에 귀족들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공포로 일그러지는 그들의 얼굴에 내 기분도 별로 좋지 않았다.

"아렌달 공작님!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저, 저는 살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공작님! 왕도에··· 왕도에 연락할 기회를 주십시오. 저희 가문에서 공작님께서 원하시는 조치를 해주실 겁니다."

믿을 거라고는 귀족이라는 혈통과 배경밖에 없는 이들.

그 모습에 과거 뉴스에서 있는 집 자식들이 법의 심판에서 벗어나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이런 건 이세계라고 다를 게 없네.'

나에게 권력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꼴도 보기 싫다. 끌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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