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41장. 추락하는 흉물에 날개는 없다
3.
통화 스와프는 국가 간에 협정을 맺고 상대 국가의 통화를 자국 통화로 교환하는 것을 말한다.
일본은 미국과 무제한 무기한 상설 통화 스와프를 체결했다. 엔화를 가지고 얼마든지 달러를 조달할 수 있는 거다.
현재 달러가 부족한 일본 정부가 활용할 수 있는 최적의 대안.
“통화 스와프로 달러를 빼내서 쓰면, 미국 눈치를 봐야 하지 않소.”
“지금 그게 문제인가요!? 일본이 몰락하느냐, 회생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통화 스와프는 마이너스 통장과 유사하다. 위기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으나, 사용하는 자체로 국가 신인도가 떨어진다. 게다가 협정 맺은 상대국에 종속이 깊어지는 부작용이 있다.
총리 후지다는 이 점을 우려했다. 그러나 재무 장관은 철없고 배부른 소리라고 힐난했다.
“어허! 지금 나에게 소리치는 거요!?”
“이치가 그렇다는 겁니다. 지금 중요한 건 달러를 확보해 금융 위기를 벗어나는 겁니다. 눈치요? 고개도 숙일 수 있고, 더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알량한 자존심은 위기를 벗어난 뒤 챙겨도 되는 겁니다.”
“커험……. 알겠소. 미국에 통보하고 통화 스와프를 사용하시오.”
일본이 미국에 의존하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미국에 고개 숙이는 각도를 조금 더 내리는 것이 무슨 대수인가?
일본에 닥친 금융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면 고개를 숙이는 정도가 아니라 도게자도 할 수 있다.
논리에서 밀린 후지다는 통화 스와프 사용을 승인해야 했다.
- 달러 유입이 늘었어. 어떻게 된 일이지?
- 정부에서 통화 스와프를 사용했다는 소문이 있어.
- 정말이야!? 그러면 엔환 폭락이 멈추는 거잖아!
- 얼마만큼 투입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단은 멈춘다고 봐야지.
일본 정부가 미일 통화 스와프를 통해 조달한 달러를 시장에 풀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추락하던 엔화가 안정을 찾은 것.
달러당 200엔까지 떨어진 상황을 반전할 것인지 아직은 모르나, 외환시장 참여자들은 저지선이 만들어졌다는 것에 주목했다.
* * *
<일본 정부가 알파 계좌를 사용해 4,000억 달러를 인출했소.>
<흠……. 생각보다 덩어리가 크구려.>
일본 정부가 미일 통화 스와프를 통해 달러를 확보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고인물들에게도 전해졌다.
하지만 정보에도 급이 있다. 금융 분야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레드실드에서 일본 정부가 확보한 금액을 정확히 파악했다.
베르너 레드실드로부터 일본 정부가 4,000억 달러를 확보했다는 정보를 들은 빅벤 집행위원회 의장 이언 매코이는, 예상보다 많은 금액에 살짝 놀라움을 나타냈다.
<일본 정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의미 아니겠소?>
<하긴 그렇구려. 자금에 여유가 있으면, 더 적게 뽑았을 거요. 그런데 미국에서 4,000억 달러 인출을 순순히 허가한 거요? 셀든이 일본에 앙심을 품고 있을 건데 말이오.>
<셀든은 뒤끝이 더러운 인간이오. 순순히 허가할 리가 없지. 일본과 맺은 통화 스와프를 중단하고,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했소. 하지만 참모들이 협약을 지켜야 한다고 강변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인출을 허가한 거요.>
셀든은 데이븐 포드 뇌물 수수 사건을 일본이 파 놓은 함정이라 여기며, 일본 금융시장에 관여하는 것을 중단했다.
통화 스와프도 지원의 하나로 여기고 사용을 불허하려 했으나, 국가 간에 맺은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해서는 안 된다는 참모들의 직언을 들어야 했다.
감정에 충실했다면, 참모들의 간언을 무시했을 거다. 그러나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함부로 협정을 파기할 수 없기에, 직언을 받아들였다.
<일본이 그동안 쏟아부은 뇌물이 돈값을 하는구려.>
<돈의 힘은 위대하오. 미국인이라고 다를 게 없지.>
<껄껄껄. 맞는 말이오. 그래도 미국이 일본에 무한정 달러를 내주지는 않을 것 아니오?>
<아마도 일본이 보유한 미국 국채 1조 2,500억 달러가 한도일 거요. 그 이상 주면 의회에서 셀든을 탄핵하자고 나설 거니까.>
미일 통화 스와프가 무제한 무기한이지만, 일본이 과도하게 달러를 인출하도록 미국 의회가 방관할 리 없다. 일본이 납기일에 인출한 금액을 되갚지 못하면, 미국도 금융 위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레드실드 가주는 일본이 보유한 미국 국채가 통화 스와프로 인출할 수 있는 금액의 상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 이상이 되면, 미국 의회가 미국 행정부를 압박할 거고, 셀든은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으로 통화 스와프 협정을 중단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일본이 4,000억 달러를 인출했으니, 앞으로 8,500억 달러가 남은 거구려. 그 정도면 충분히 컨트롤할 수 있을 거요. 하지만 베타 계좌에서 유로를 뽑아내면, 곤란해질 수 있소.>
<나도 당신 생각에 동감이오. 그래서 EU를 설득하려고 준비 중이오, 당신네 빅벤도 힘을 보태 주기 바라오.>
<알겠소, 그리하리다. 그리고 영국과 캐나다는 우리가 컨트롤할 거니까, 당신은 스위스를 막으시오.>
<좋은 생각이오. 이참에 일본을 확실히 끝장내야, 우리에게 떨어지는 것이 있을 거요. 미리 좋은 자리 선점한 세력이 많아서, 어중간한 타격으로는 발품값도 못 얻을 상황이오.>
베타 계좌는 EU와 일본이 맺은 통화 스와프를 말한다. 무제한 무기한 협정을 맺었기에, 달러 공급이 막히면, 일본이 유로화 확보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빅벤과 레드실드 수장은 일본이 EU에서 한 푼도 뽑아 가지 못하게 할 요량이다. 이에 더해 일본이 영국, 캐나다, 스위스와 맺은 통화 스와프도 유명무실하게 만들 계획이다.
일본의 돈줄을 틀어막아, 끝장을 보겠다는 것.
고인물들이 독하게 나오는 것은 창수와 김근홍이 최적의 포지션을 이미 차지했기 때문이다.
일본 금융시장이 완전히 붕괴해야, 목표한 수익을 얻을 수 있다.
4.
2023년 6월 4일 오후 5시, 일본 총리 관저에서 비상 회의가 열렸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장관 전원이 참석했고, 분위기가 매우 무거웠다.
“총리, 미국이 추가 인출을 막고 있습니다.”
“한 푼도 손해 볼 수 없다는 건가!? 그게 동맹국에 대한 대우요!?”
“공화당에서 워낙 강하게 나와 행정부로서는 불가항력이라고 합니다. 의회에 로비를 강화해야 합니다.”
베르너 레드실드의 예상대로 미국이 통화 스와프 인출 금액을 1조2,500억 달러로 제한했다.
일본은 지난 5일간 미일 통화 스와프로 확보한 금액과 대만의 지원금 그리고 민간 자금을 긁어모아 총액 1조 9,000억 달러를 엔화 방어에 투입했다.
처절한 노력으로 달러당 200엔까지 떨어졌던 가치를 170엔까지 끌어올렸으나, 이제 방어할 실탄이 바닥난 상황.
일본 재무 장관 미카미 타게루가 친분이 깊은 미국 재무 장관 트레비스 호튼에게 추가 인출을 애걸하며 호소했지만, 돌아온 답은 공화당을 설득하라는 것이었다.
“하……. 공화당을 설득한다고, 추가 인출을 허가할 것 같소?”
“예? 그게 무슨…….”
“공화당을 설득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고, 설령 기적적으로 설득했다고 해도 다른 핑계를 대고 추가 인출을 막을 거요. 재무 장관이라는 위인이 그런 것도 파악 못 하는 거요?”
“후…….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습니다.”
뼈를 때리는 총리 후지다의 지적에 재무 장관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반박이 불가한 사실이니까.
내일 오전 9시까지 최소 3,000억 달러가 있어야 엔화를 방어할 수 있다. 그때까지 미국 공화당을 움직일 방법이 없다.
트레비스 호튼의 말은 미국이 일본에 더 이상 달러를 공급할 수 없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EU와 영국은 어떻게 됐소? 인출을 허락한다는 거요? 아니면 거부한다는 거요?”
“검토 중이라는 말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실상 외화를 조달할 길이 막힌 것 아니오!?”
캐나다와 스위스는 일찌감치 통화 스와프 중단을 선언했다. 국가 경제 규모가 작아서 일본의 요구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
일본 정부는 경제 규모가 큰 EU와 영국에서 자금을 조달하려 했으나, 내부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확답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이건 무제한 무기한 통화 스와프가 사실상 무효화됐다는 걸 의미한다. 후지다는 일본이 외통수에 몰렸다는 걸 절감했다.
“지금 외화를 조달할 수 있는 곳은 중국뿐입니다.”
“중국과 맺은 통화 스와프는 2,000억 위안뿐이오. 320억 달러도 안 되는 금액으로 엔화를 방어할 수 있다고 보는 거요?”
“첫발이 중요합니다. 2,000억 위안을 먼저 인출하고, 중국과 협상을 벌여, 2조 위안을 더 확보하면, 급한 불을 끌 수 있습니다.”
“중국은 우리를 군사적으로 압박하고 있소. 2,000억 위안도 내줄까 말까인데, 2조 위안이 가당키나 한 말이오?”
중국은 2008년 국제 금융 위기 이후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갈수록 위안화의 국제적 영향력이 강해지는 상황.
미카미 타게루의 구상대로 중국에서 2조 2,000억 위안을 조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3,500억 달러를 만들고, 벼랑 끝에 내몰린 엔화에 숨통을 틔울 수 있을 거다.
문제는 현재 중국과 일본이 동지나해에서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다는 것.
후지다는 중국의 도움을 이끌어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닙니다. 중국이 원하는 걸 들어주면, 협상에 응할지도 모릅니다. 지금이 외교력을 발휘할 때입니다.”
“외교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시오!”
“총리, 틀에 박힌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재무성 업무도 해외와 관련된 것은 외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하구만. 그래 재무 장관인 당신이 생각하는 당근이 뭐요? 중국에 무엇을 줘야 우리에게 위안화를 뭉텅이로 넘겨준다는 거요?”
“대만을 넘겨주면 됩니다.”
“뭐라고!?”
“중국이 대만을 복속하는 것에 동의하면, 중국의 협조를 얻기 쉬울 겁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그랬다가는 미국…….”
“미국은 금융 위기에 빠진 일본을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미국을 위해 얼마나 더 중국과 대립해야 합니까?”
“크흠…….”
재무 장관 미카미 타게루의 주장이 제법 날카롭다. 국제 관계는 주고받는 것. 미국이 지원을 중단한다면, 생존을 위해서 중국과 손잡을 수 있는 거다.
게다가 그것이 일본의 영토를 내주는 것이 아니라, 타국에 관한 것이라면, 충분히 협상할 여지가 있다.
“총리, 미카미 장관의 주장이 타당합니다. 당장 외화를 구하지 못하면, 일본 금융시장이 붕괴합니다. 게다가 그 여파는 경제를 넘어 일본 전체를 암흑으로 몰고 갈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미국이 의리를 지키지 않는데, 우리만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중국과 협상을 시도하면, 미국이 추가 인출을 허가할 수도 있습니다.”
“미카미 장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미카미 타게루의 말은 회의 참석자 대부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재무 장관과 뜻을 같이하는 부총리가 찬동한 건 물론이고, 중립적인 경산성 장관 니오 시게오미도 찬성했다.
이어서 장관들이 입을 모아, 중국과 협상하자는 의견에 동의했다.
“좋소! 장관들의 뜻이 그렇다면, 따를 수밖에 없지! 미카미 장관! 슌오크 장관과 같이 중국과 협상을 진행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