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41장. 추락하는 흉물에 날개는 없다
1.
“무엇을 해야 한다는 거요?”
“일본 은행 주주들이 주가의 1,000배에 달하는 국채를 받고 주식 권리를 위임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합니다. 만약, 계약을 어기면, 10배에 달하는 위약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가의 1만 배에 달하는 위약금을 정부가 해결해 줘야 한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2조 400억 엔이 필요합니다.”
창수는 빅벤과 레드실드에서 탈취한 일본 국채 5조 엔 중에서 3조 엔을 시장 교란용으로 사용하고, 나머지 2조 엔을 일본 은행 주식 매입에 투입하려 했다.
그러나 곧바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됐다. 일본 은행 주식을 보유한 주주 대부분이 우익이며, 친정부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일본 은행은 1882년 이토 히로부미 정권 때 만들어졌다. 주주 대부분이 메이지 유신에서 중책을 맡았던 인물들이고, 현재 주식 소유자는 그들의 후손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조상의 유산을 팔지 않겠다는 주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대안으로 사용권과 위임장을 받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주식 가격의 1,000배라는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치렀다.
하지만 창수는 호구가 아니다. 문서로 계약을 남기고, 특약 사항에 위약금 10배 조항을 집어넣었다.
위임장으로 일본 은행을 마비시킬 때, 주주들이 변심할 거라 예상하고, 풀기 어려운 돈의 족쇄를 채운 것이다.
“미쳤어!?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마!”
“분명히 미친 짓입니다. 더 황당한 건 2조 400억 엔이 비천한 카베세의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일본이 무너집니다.”
창수가 마련한 또 다른 독약은 시민 연대 대표 카베세 야스노리가 위약금을 받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카베세 야스노리는 부라쿠민 출신이다. 부라쿠민은 일본 계급 사회의 최하층에 놓인 천민으로, 인도의 불가촉천민과 유사한 취급을 받았다.
게다가 21세기 선진국이라 자처하는 현재 일본에서도 부라쿠민 후손들은 공공연히 차별받고 있다.
결혼과 취업에 제한받고 있는 건 기본이고, 개인 간 일상적인 접촉마저 제한받는 상황.
카베세 야스노리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100% 일본인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일본을 증오하고 있다.
한화 20조 원이 넘는 금액이 카베세 야스노리의 손에 들어간다면, 300만 명으로 추산되는 부라쿠민 후손들의 구심점이 돼, 두고두고 일본 정부에 화근이 될 수 있다.
내각 정보관 사키야 쿠니무네는 정보기관의 수장답게 이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불가피하게 부라쿠민에게 천문학적인 자금을 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큭! 이…….”
“총리, 사키야 정보관의 말이 옳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일본 은행을 가능한 한 빨리 정상화하는 겁니다. 그깟 2조 엔 줘 버리죠. 그리고 천박한 부라쿠민은 조용히 처리하면 되는 겁니다.”
“제거하자는 겁니까?”
“조용히 만드는 건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거하는 것도 방법의 하나일 겁니다.”
“후……. 어쩔 수 없군요. 좋습니다. 부총리 조언대로 하죠. 금융시장을 살리는 게 우선이니까요.”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발작하려는 후지다를 진정시킨 건 부총리 토노오 오키무네였다. 정적이지만, 국가적 위기 앞에서 힘을 보탠 것.
일본 은행이 셧다운한 뒤, 주식 대부분이 하한가로 떨어졌고, 국채 시장이 붕괴했다. 게다가 밤새 역외시장에서 엔화가 폭락을 거듭해, 달러당 180엔에 이른 상태.
오전 9시에 주식시장이 문을 열기 전까지 일본 은행을 정상화하지 않으면, 오늘 안에 금융시장이 무너질 수 있다. 그리고 그다음 수순은 일본 경제 붕괴.
후지다를 밀어내고 총리가 되는 것이 목표지만, 완전히 망가진 일본의 수장이 되는 건 바라지 않는다. 이쯤에서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수습이 진행된 후에 공격을 재개해도 늦지 않다.
계산을 마친 토노오 오키무네는 카베세 야스노리를 제압할 방안을 제시하며, 후지다를 설득했다.
후지다는 부총리의 저의가 의심스러웠으나, 다른 방안이 없기에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일시적이나마, 일본 정부 내부에서 벌어졌던 치열한 전투가 휴전 상태에 들어가게 됐다.
“사키야 정보관! 일본 은행 주주들에게 완전한 보상을 약속하시오! 그리고 반드시 주식시장이 열리기 전에 일본 은행 업무를 정상화하시오! 필요하면 무력을 사용해도 좋소!”
“맡겨 주십시오! 총리 각하!”
부총리의 협조로 힘이 모이니, 목소리가 자연히 커졌다. 일본 총리 후지다는 정보기관 수장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전 9시 전까지 일본 은행 셧다운을 풀라고 지시했다.
2.
5월 31일 오전 8시 40분, 주식시장 개장을 20분 앞두고, 창수가 보안 메신저를 통해 김근홍에게 연락했다.
[일본 은행이 업무를 곧 재개할 것 같습니다.]
[엉? 벌써? 생각보다 너무 빠른 데.]
[일본 정부에서 주주들에게 위약금을 처리해 주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습니다. 주주 중에서 우익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계약을 파기한 거죠.]
[하지만 이미 감사가 시작됐잖아. 위임장을 빼낸다고 해서, 그걸 되돌릴 수 있는 거야?]
[원칙적으로 안 되는 거죠. 일본 은행 관계자도 당장 업무 재개가 무리라고 했지만, 내각 정보 조사실에서 강압적으로 밀어붙였습니다.]
[정보기관이 대놓고 개입했구만,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그렇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으니, 앞날을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그건 그렇고, 일본 은행이 족쇄를 벗어나면, 일본 금융시장이 어떻게 될까요?]
후지다의 엄명을 받은 내각 정보관 사키야 쿠니무네는 무장 요원들을 동원해, 제시간 안에 일본 은행 정상화를 만들어 냈다.
창수와 김근홍이 예상한 것보다 시기가 대폭 앞당겨진 것. 창수는 일본 정부의 발 빠른 움직임이, 위기에 빠진 금융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했다.
금융시장이 추락을 멈추고 반등하면, 수익을 늘리기는커녕 확보한 것마저 잃어버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주식시장은 낙폭을 줄이거나, 잠시 반등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국채와 엔화는 회생하기 어려울 거다.]
[일본 은행을 통해 해외 자산을 들여오면, 환율은 방어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쉽지 않을 거야. 고인물들이 피 냄새를 맡았거든.]
[그림자 자금이 엔화를 공격한다는 건가요? 일본 정부는 외환 보유고 1조 4,000억 달러 이외에, 민간 자산까지 끌어들여 외환 시장을 안정시킨다고 합니다. 고인물들이 집중 공격 해도 쉽게 이길 것 같지 않습니다.]
일본은 10조 달러에 달하는 대외 자산이 있다. 그중에서 대외 부채 7조 달러를 제외한 3조 달러가 대외 순자산이다.
대외 순자산은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과 개인의 몫도 포함돼 있다. 일본 정부가 직접 사용할 수 있는 부분은 1조 4,000억 달러고, 나머지 1조 6,000억 달러는 민간이 보유한 것이다.
총리 후지다는 일본 은행이 업무를 개시하면, 정부가 보유한 자산을 들여오는 동시에, 기업과 개인을 설득해, 민간 자산도 함께 유입한다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창수는 빅벤과 레드실드로 대표되는 고인물들의 자금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3조 달러 육탄 방어를 뚫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글쎄다. 민간 자금이 정부의 뜻대로 따라 줄까? 쉽지 않을 거야. 그리고 1조 4,000억 달러라고 해도, 당장 사용할 수 있는 현금성 자산은 많지 않아. 일본이 해외 자산을 들여오는 족족 고인물 놈들이 빨아먹을 가능성이 높아.]
[일본 정부가 옥쇄한다는 각오로 나선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일본이 허풍 치는 거 한두 번이 아니지. 게다가 고인물들도 지금 절박한 상황이라, 집요하게 공격할 거야.]
[절박한 상황이요?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응? 그걸 몰라? 너하고 공격 팀이 한 일이잖아. 핵심 거점 불타고 알토란 같은 재산이 털렸으니, 아무리 고인물이라도 절박할 수밖에 없지.]
창수는 빅벤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인드파고 센터를 공격해, 지부장을 처단하고, 비밀금고를 털었다.
이어서 레드실드 런던 본부를 완전히 불태우며, 막대한 재물을 탈취했다. 게다가 빅벤과 레드실드가 상잔하도록 유도해, 서로 죽고 죽이는 전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빅벤과 레드실드가 오랜 역사를 가진 강자라고 하지만, 단기간에 입은 인적 물적 피해에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상황.
이 와중에 세계 3위 경제력을 가진 일본이 금융 위기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것도 일회성이 아니라, GDP 280%에 달하는 누적된 부채가 문제의 근원.
빅벤과 레드실드가 잃어버린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을 공격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빅벤과 레드실드를 따라 고인물들이 속속 일본 공격에 동참하고 있다.
김근홍은 일본 정부가 아무리 비장한 각오를 하고 엔화를 방어해도, 작정하고 나선 고인물들의 파상 공세를 막아 내기 어려울 거라 판단했다.
[빅벤과 레드실드가 전쟁을 중단한 건가요?]
[그건 아니고, 일본이라는 먹이를 사냥하기 위해 휴전한 거지. 당분간 일본 공격에 조직의 모든 힘을 쏟아부을 거야.]
[그러면 우리와 고인물들이 한배를 타게 된 건가요?]
[일단은 그렇다고 봐야지. 하지만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어. 이미 가장 좋은 자리로 알 박기 해 놨으니까.]
[상황을 지켜보다가, 최적 타이밍에 청산하면 되는 거군요.]
[바로 그거야. 일본 정부와 고인물들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무대에서 춤추고 있는 거지. 싸움을 크게 벌일수록, 그리고 화려하게 벌일수록 우리 수익이 늘어나는 거야.]
애초 일본을 공략하면서 세웠던 목표 수익 3,000억 달러는 일찌감치 달성됐다.
1,000억 달러를 투입한 2차 공략이 한때 90% 손실률을 나타내면서 좌초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창수가 날린 회심의 일 타로 역전에 성공했다.
이제 고인물들이 등장한 이상, 창수와 김근홍이 직접 전투에 나설 이유가 없다. 미리 구축한 하방 포지션을 지키면서, 일본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를 기다리면 된다.
창수와 김근홍은 느긋한 관전자의 입장에서 일본 정부와 고인물들의 피 튀기는 싸움을 지켜보기로 했다.
* * *
“미카미 장관! 주가가 올라가지 못하고 있소! 어떻게 된 거요!?”
일본 은행이 정상적으로 업무를 수행한다는 발표가 나오자, 일본 증시는 오전 장에서 3% 상승하는 견고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추가 상승해 어제 손실을 상당 부분 만회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오후 장에서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다.
후지다는 불법까지 저지르며, 반등 기회를 만들어 줬음에도, 주가를 끌어올리지 못하는 재무 장관에게 이유를 따져 물었다.
“해외 투자자들이 주식을 투매하고 일본을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엔화를 달러로 바꾸면서, 엔화 가치가 달러당 200엔까지 떨어졌습니다.”
“칙쇼! 빌어먹을 외국인 놈들! 끝까지 말썽이구만! 해외 자산을 더 끌어와서, 환율을 방어하시오!”
“이미 사용할 수 있는 건 다 투입했습니다, 남은 건 미국 국채뿐입니다.”
“민간 자금이 있지 않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협조를 안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통보하고 통화 스와프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일본 정부는 미국 국채 1조 2,500억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 이것은 외환 보유고의 89%를 차지하는 물량으로, 실질적으로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에 즉시 투입할 수 있든 현금성 자산은 1,500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리고 1,500억 달러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외국계 자산 유출을 막는 건 역부족.
재무 장관 미카미 타게루는 엔화 방어를 위해 미국과 맺은 통화 스와프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