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16장. 보라색 크리스털의 정체
1.
“좋아. 목숨을 살려 주지. 하지만 너희들은 금나라를 떠나야 한다. 만약 이후에 내 눈에 띄면 처참하게 죽을 거다.”
“감사합니다! 단원들을 이끌고 모두 명나라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저 여자는 여기에 남는다.”
“그리하겠습니다.”
창수는 판누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조건을 걸었다. 마적단 전체가 타국으로 이전하는 것이 핵심이고, 구아이만 남는 것이 연결된 조건이다.
판누는 묻거나 따지지 않고 창수의 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형편이니까.
- 척! 척! 척!
‘커커커. 엄청나게 챙겨 놨구만! 송본귀금속보다 물량이 10배는 많을 것 같은데.’
목숨을 담보한 합의가 이뤄진 뒤, 판누는 금고 속 재물을 신속하게 꺼내기 시작했다. 가능한 한 빨리 작업을 마치고 창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를 높인 거다.
그리고 금고 주위에 금원보, 장신구, 골동품, 마법물품, 마법재료 등……. 고가의 물품들이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금나라 수도 선양 일대를 주름잡은 마적단의 비밀금고답게 막대한 양의 재물을 담고 있었다.
창수는 쌓이는 재물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중급 마나석이 없어 초대박이라 불리기는 어렵지만, 눈이 즐거웠다.
“모두 꺼냈습니다.”
“속이 텅텅 비었군. 좋아. 이제 네 갈 길 가라.”
창수는 약속을 철저하게 지킨다. 차라리 약속을 안 할지언정, 한번 맺은 약속은 비록 흉악한 범죄자와 한 것이라도 어기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 판누가 장시간에 걸쳐 비밀금고 속을 깨끗이 비워 내자, 질척거리지 않고 쿨하게 풀어 줬다.
“잠시만요. 저 사람을 그냥 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고견이 있으신가요?”
홀가분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판누의 발목을 잡은 것은 마법사 고사누였다.
순간 판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창수는 고사누에게 이유를 물었다.
“마법금고 자체가 구하기 어려운 귀물입니다. 금고가 텅 빈 상태에서 저 사람이 승인하면, 은공께서 금고를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마나 구속구를 찰 위기를 창수의 도움으로 벗어난 고사누는, 마음을 다스리며 슈베린 독성을 제어하는 데 매진했다.
슈베린이 마법사 체내에 침투하면, 6시간은 지나야 해독할 수 있으나, 천부적인 능력과 강한 집중력을 가진 고사누는 2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마나를 회복했다.
그리고 창수에게 귀중한 정보를 알려 줬다.
“이봐! 마법사님 말이 사실이야?”
“그……. 그럴 겁니다. 하지만 저는 몰랐습니다!”
“몰라? 뭘 몰랐다는 거지?”
“마법금고를 원하실 줄 몰랐습니다!”
“인간적으로 대해 주니, 나는 우습게 보는 거야!? 황금 1,000관(3,750kg)이 넘어가는 귀물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이거 안 되겠구만!”
마적단 비밀금고는 척 봐도 대광금은방 장두호가 소유한 마법금고보다 성능이 우수해 보였다.
장두호의 금고가 1억 환(한화 1,000억 원)이라고 했다. 눈앞에 보이는 금고의 가격이 2~3억 환은 나갈 거다.
소유 방법을 안다면, 절대로 버리고 가지 않을 귀물이 마법금고. 더구나 창수는 200만 환으로 구매한 소형 마법금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다.
판누가 고의로 귀중한 정보를 감췄다고 생각한 창수의 눈에서 살심이 일었다.
“죄송합니다! 빨리 작업을 마치고 떠나려는 생각이 앞서서 그만…….”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애절한 목소리로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판누.
만약 그가 장시간 성실하게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분노한 창수에게 변명도 못 해 보고 처단당했을 거다.
얼굴에 땀이 흘러내리는데도 쉬지 않고 금고에서 재물을 꺼내던 모습이 목숨을 살렸다.
“돈 될 만한 것 있으면 다 말해. 또 속이면 용서 없다는 걸 명심하고.”
“다른 마법금고는 없습니다. 다만 조장급 이상은 개인금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하들 푼돈은 필요 없고, 두목 놈 개인금고 어디 있어?”
판누의 적극적인 협조로 마법금고 이용권을 승계받은 창수는 다른 비밀금고가 있는지 물었다.
이미 충분한 재물과 마법물품을 챙겼기에 절실히 바라는 건 아니지만, 얻을 수 있는 재물을 놓고 가기 싫었다.
그리고 큰 기대를 안 한 질문에서 솔깃한 정보를 얻게 됐다. 마적단 간부들에게 개인금고가 있다는 것.
창수는 와르카의 금고에 집중했다. 재물 욕심이 많은 와르카가 부하들에게 쓸 만한 걸 나눠 줄 리 없다고 생각하며.
“두목의 개인금고는 저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없다는 거야?”
“아닙니다. 두목에게 개인금고가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골동품 몇 점이 마법금고에 없었습니다.”
“그놈이 침실에 꿍쳐 놓은 건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 눈을 피할 곳이 침실뿐입니다.”
이미 경고를 받은 판누는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창수의 보물찾기에 협조했다.
와르카의 성정상 개인금고가 없을 리 없다. 그런데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건, 부하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사적인 공간에 개인금고를 설치했기 때문이리라.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장소가 와르카의 침실이다.
“좋아. 침실로 가라. 내 부하가 따라갈 거다. 허튼짓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걸 명심하도록.”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숨겨진 물건을 찾는 능력은 츠네가 창수보다 몇 단계 뛰어나다.
창수는 판누를 길잡이로 삼고, 츠네에게 개인금고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약 30분이 지난 뒤, 판누가 돌아왔다.
“침실 벽에서 두목의 개인금고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비밀번호를 알 수 없습니다.”
“좋아. 너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마적들을 데리고 금나라를 떠나라.”
“정……. 정말 가도 되는 겁니까?”
“가기 싫어? 노예로 부려 줄까?”
“아닙니다! 당장 떠나겠습니다!”
츠네는 통신 장비를 통해 창수에게 와르카의 개인금고 상황을 이미 보고했다.
창수는 판누가 개인금고를 찾기 위해 열성을 다했다는 점. 그리고 자신이 역정 낼 수 있는 상황에서도 사실을 말했다는 점을 높이 샀다.
이 정도 부려 먹었으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지며, 판누에게 자유를 준 것이다.
판누는 수월하게 떠날 수 있는 것에 의심을 품으면서도, 재빨리 움직여 마적단 잔당들과 함께 본거지를 빠져나갔다.
이제 와르카 마적단 본거지에 남아 있는 마적은 구아이 한 명뿐.
* * *
“저를 어쩔 셈이죠? 밤 시중을 원하나요?”
동료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남게 된 구아이. 그녀는 창수에게 자신을 남게 한 이유를 물었다.
“너는 내 취향이 아니야. 그리고 네 처우는 나에게 묻지 말고, 마법사님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
구아이는 창수가 자신의 미모에 반했다고 생각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속물이다]라는 말을 떠올리며 느긋했으나, 창수의 직설적인 말을 듣고 착각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비참한 심정. 그리고 이어지는 고사누의 차가운 말이 그녀를 더 참담하게 만들었다.
“구아이, 당신과 나는 함께할 수 없는 사이요. 그러니 와르카에게 받은 재물을 가지고 가고 싶은 데로 떠나시오.”
“흥! 언제는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쓰레기 취급하는 건가요? 법사님의 뜨거운 사랑 정말 대단하네요!”
“당신이 받는 대우는 당신 스스로 만든 거요. 나에게 항의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소?”
“뭐라고요!? 나를 지금 쓰레기라고 말하는 거예요!?”
“당신이 와르카와 침실에서 구른 걸 생각하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오.”
“그……. 그걸 어떻게…….”
“어디 와르카만이겠소. 10명이 넘는 마적과 관계한 거 다 알고 있소.”
구아이는 마적답게 방탕한 여자였다. 이전 마적단에서 미모를 사용해 높은 지위를 유지했고, 와르카 마적단에 합류한 이후에도 두목을 포함해서 간부급 마적들과 잠자리를 가졌다.
탐색 마법을 사용하는 고사누가 이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구아이를 마적단에서 빼내려 한 것은 순수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호호호! 정말 성인군자시군요! 그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대놓고 즐길 걸 그랬나요? 아닌가?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게 더 짜릿하고 좋았을까?”
“그건 알아서 생각하시오. 그리고 떠나기 전에 금고 비밀번호를 알려 줘야겠소.”
“무슨 소리예요!? 그게!?”
“슈베린은 금과 백금으로 만들어진 합금 용기에 담아야 하오. 하지만 마법금고에는 합금 용기가 보이지 않았소. 그 용기는 와르카의 개인금고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오.”
“억지예요. 다른 곳에 둘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러면 묻겠소, 당신이 나를 암습하는 데 사용한 슈베린은 어디서 난 거요?”
“개인적으로 구한 거예요. 그리고 바늘에 슈베른을 묻히고 용기는 바로 버렸어요.”
“허허.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군.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소.”
“자……. 잠깐…….”
- 지잉!
“꺄아아악!”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아내는 수단으로 자백제와 자백 마법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은 자백제로 효과가 조금 떨어지기는 하지만, 비용이 적게 들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자백 마법은 4서클 이상 마법사가 사용할 수 있어 흔히 볼 수 없지만, 효과가 탁월하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단점은 자백 마법에 적중당한 당사자가 극심한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버티면 고통만 증가할 뿐이오. 어서 비밀번호를 말하시오.”
“저주받을 놈! 절대로 말할 수 없어!”
“고집을 부린다면 어쩔 수 없지.”
- 지잉!
“끄아악!”
‘햐……. 샌님인 줄 알았더니, 무지막지한 고문 기술자였네! 아니면 복수하는 건가?’
악이 받친 구아이가 비밀번호를 말하지 않자, 고사누는 연속해서 자백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적단 본거지에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옆에서 지켜보던 창수는 고사누가 구아이를 핑계 삼아 고문하고 있을 가능성마저 생각하게 됐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구아이가 금고 비밀번호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지 않으니까.
“6573831이에요. 제발 마법은 이제 그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 인간의 오감과 다르게 통각은 무뎌지지 않는다. 통증은 가해질수록 충격이 쌓여 간다.
독기 어린 눈을 보였던 구아이도 증가한 고통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비밀번호를 불고 말았다.
* * *
- 틱! 틱! 탁!
- 철컥!
“와르카의 개인금고가 맞습니다.”
비밀번호를 알아낸 고사누는 창수와 함께 와르카의 침실로 이동해 금고 문을 열었다.
그의 생각대로 금고 안에는 슈베린이 금-백금 합금 용기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고가의 골동품과 마법물품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금고 크기가 가로-세로-높이 각각 1m 정도에 불과하기에, 많은 물품을 집어넣을 수 없다. 그러나 품질로 따지면, 마법금고에 담겨져 있던 물품보다 한 수 위.
게다가 중급 마나석도 10개나 들어 있었다. 금고 털이 한 보람이 있다.
“마법사님, 저건 뭐죠?”
하지만 창수는 값나가는 물품과 중급 마나석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