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15장. 마법사 고사누
4.
명석한 두뇌를 가진 고사누지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할 수 없었다.
단지 사랑하는 여인이 내미는 손을 잡았을 뿐이다. 그런데 손바닥에 찔린 느낌이 든 뒤, 평생 경험하지 못한 끔찍한 고통이 온몸으로 퍼졌다.
무엇이 마법사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만든 것일까?
“껄껄껄. 고사누 법사, 짜릿한 손맛이 어떻소?”
“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그건 나에게 따지지 말고, 당신이 사랑하는 구아이에게 물어보시오.”
고사누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자, 득의만만한 자세를 보이는 와르카. 이자가 악랄한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마적단 두목은 지금 벌어진 일의 책임을 구아이에게 돌리고 있다.
- 찌리릿!
심장이 아파 온다. 마법사가 가지는 직업병,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가 구아이를 흉수라 말한다.
“구아이, 어떻게 된 일이요?”
“우리 당분간 성채에 머물러요. 저는 아직 세상에 나갈 준비가 안 됐거든요.”
“살인과 범죄가 가득한 이곳에서 정녕 뼈를 묻고 싶다는 것이오?”
“여기를 나쁘게만 보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살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어요. 그건 법사님도 예외가 아니잖아요.”
막연한 불안감이 실체화됐다. 구아이는 와르카에게 협박당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자유의지로 고사누를 암습했다.
이유는 마적단을 떠나기 싫어서.
“궤변이오! 와르카 마적단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재미로 사람을 죽이고, 과시를 위해 재물을 약탈하고 있소!”
“약간의 일탈은 있을 수 있죠. 법사님도 두목을 도우면서 일탈을 저지르지 않았나요?”
“그건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이오!”
“어머! 눈물겹게 고맙네요. 고고한 마법사님이 천박한 마적을 위해 불의한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군요. 그런데 어쩌죠. 그 마적은 법사님이 원하는 평범한 여자가 될 수 없거든요.”
“말……. 말도 안 되는…….”
기가 막혀 대거리를 할 수 없다. 구아이는 뼛속까지 범죄자였다. 아니 범죄자 중에서도 악질에 속한다.
고사누가 와르카에게 협조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중심에 구아이 자신을 위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구아이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고사누의 마음을 찌르는 데 역이용했다.
“하하하! 사랑싸움이 치열하구만! 역시 청춘이 좋다니까!”
“…….”
“아름다운 꽃에는 가시가 있기 마련이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성채에 머물면서 구이아를 잘 다독여 보시오. 어차피 구아이는 고사누 법사 손안에 쥐인 거니까.”
구아이의 뒤통수치기 배신으로 정신없는 판에 와르카가 끼어들었다. 때리는 사람보다 말리는 사람이 더 밉다.
분노한 고사누는 와르카의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와르카는 그 무시를 다시 무시하면서 자기가 할 말을 꿋꿋이 이어 갔다.
고사누는 와르카의 뻔뻔한 말을 들으면서, 무언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구아이의 장래를 저에게 맡긴다는 약속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오. 나는 법사에게 구아이를 넘겼소.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거요.”
고사누는 구아이의 안락한 미래를 위해 많은 것을 구상했다. 하지만 그 계획은 구아이의 거부로 무산돼 버렸다.
그런데도 와르카는 구아이의 미래가 여전히 고사누에게 달려 있다고 말했다.
와르카가 고사누를 떠보는 것일까? 아니면 진실일까?
설령 와르카가 약속을 지킨다 하여도, 구아이가 동의할까?
- 슥!
의구심을 가지게 된 고사누가 고개를 돌려 구아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조금 전 고사누에게 독설을 내뱉던 모습을 버리고, 살짝 미소를 보여줬다. 와르카의 말에 동의한다는 의미일 터.
역겹다.
한때 고사누의 가슴을 설레게 한 구아이의 미소가 너무도 추하게 보였다.
“약속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구아이는 스스로 갈 길을 정했습니다. 제가 억지로 바꿀 수 없는 거죠.”
“이런 이런. 단단히 화가 나셨구만. 구아이에게 정이 떨어졌다면, 다른 미녀는 어떻소? 원하는 유형을 말하시오. 선양 인근……. 아니 조선과 명에서 이름난 미녀를 대령하리다.”
“아닙니다.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그동안 번거로움을 드려 미안합니다.”
고사누의 눈에 씌었던 사랑의 콩깍지가 산산이 부서졌다.
마적단을 위해 거짓 사랑도 마다하지 않는 여자. 이것이 구아이의 본질이다.
저런 여자를 마적단에서 구해 내기 위해 마법사로 해서는 안 되는 일에 가담했다고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진다.
이런 악의 소굴에서 한시바삐 떠나야 한다.
“흠…….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받으려는 고집은 여전하구만.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개 목걸이를 채울 수밖에.”
- 척!
“마나 구속구!?”
“눈썰미가 좋군. 하긴 마법사가 이걸 모를 리 없지. 하지만 말이오. 이건 보통 마나 구속구가 아니오. 한번 차면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걸작이오. 이걸 구하느라 재물 좀 썼지. 껄껄껄.”
와르카는 고사누를 제압할 방안을 미리 마련해 놓고 있었다. 마적단 본거지를 들락거리는 걸 방치한 것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기 위한 준비였다.
금나라 수도 선양 일대를 호령하는 와르카. 악명에 걸맞게 심계가 악랄하다.
“저를 우습게 보는군요. 분명히 말하죠. 제 앞길을 막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우습게 보지 않으니, 거금을 들이고 번거로운 일을 벌인 것 아니겠소. 당신은 한동안 마법을 쓸 수 없소. 슈베린 맛을 봤으니까.”
“슈……. 슈베린…….”
슈베린은 일반인에게 무해하다. 하지만 마나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꼬이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 마법사에게 치명적이다.
슈베린 가격이 같은 무게 황금보다 100배 비싼 것에는 이유가 있다.
“반항해야 헛일이오. 얌전히 목걸이 차고 나를 도와주시오. 법사 품에 구아이가 안기는 건 물론이고, 절세 미녀 10명을 따로 구해 주리다. 마법 실험에 필요한 재료도 팍팍 밀어줄 거고.”
- 저벅! 저벅!
어르고 뺨 친다. 와르카는 마나 구속구를 들고 고사누에게 다가가며, 먹음직한 떡밥을 계속해서 던졌다.
이건 승자로서 즐기는 세리머니.
고사누는 다가오는 와르카를 노려보며, 마나를 사용하려 했으나, 극심한 통증을 느껴야 했다.
- 슥!
마나 사용은커녕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고사누의 목에 와르카가 마나 구속구를 가져다 붙였다.
이제 고사누는 악명 높은 와르카의 노예 생활을 해야 하는 운명. 절망한 고사누는 자신에게 채워지는 개 목걸이를 차마 보지 못하고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
- 쒜에엑!
- 팍!
- 지지직!
“크아악!”
갑자기 날아온 화살을 왼쪽 팔뚝에 맞은 와르카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누가 악당 아니랄까 봐! 하는 짓거리 하나하나가 악질이군!”
“네놈은 누구냐!? 감히! 성채에 침입하다니!?”
“멍청한 놈!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두 번씩이나 덤빈 거냐?”
“서……. 설마……. 악귀 놈.”
와르카를 공격한 건 창수였다. 창수는 함정을 우려해 추격전을 벌이지 않았으나, 정찰 드론을 투입해 마적단이 도주하는 경로를 관찰했다.
정찰 드론의 존재를 알지 못한 와르카는 열차 경비병의 추적을 따돌렸다고 생각하며 안심했지만, 저승사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창수는 죽은 마적들이 남긴 말을 타고 먼 거리에서 마적단의 뒤를 밟은 뒤, 본거지로 손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악귀? 이 새끼 주둥이 놀리는 거 보소?”
와르카가 창수의 분노 버튼을 눌렀다. 창수는 범죄 집단 마적단을 처단한 의인이다. 마적 따위에게 혹평당할 대상이 아니다.
- 팍!
“우아악!”
창수는 와르카를 조준하고 있던 두 번째 볼트22의 방아쇠를 가볍게 당겼다.
발사된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 와르카의 왼쪽 허벅지에 깊숙이 박혔다. 다시 한번 전격 마법에 경련을 일으키며 비명을 지르는 마적단 두목.
“긴말 안 하마! 금고 열고 가지고 있는 거 다 꺼내!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 주지!”
창수가 마적단 본거지에 진입한 이유는 자신을 귀찮게 만드는 마적들을 소탕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본거지 내부를 둘러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대형 비밀금고가 있습니다.]
탐색 능력이 뛰어난 츠네가 마법금고를 발견한 것. 마적단이 그동안 벌인 일을 생각하면, 금고 안에 막대한 양의 재물이 들어 있을 게 분명하다.
창수는 송본귀금속에 이어 마적단을 상대로 대박 금고 털이를 기대하며, 와르카를 압박했다.
“헛소리하지 마! 죽어도 네놈에게 보물을 내줄 수 없어!”
“아! 그러세요? 죽고 싶다면, 죽여 드리지!”
- 쉐에엑!
- 팍!
“크악!”
압박이 통하지 않았다. 마적단 두목이 목숨보다 재물을 더 귀중하게 여기며, 결연하게 반항한 것.
와르카는 창수와 협상을 하려고 강하게 나갔다. 하지만 그건 창수의 성정을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제안을 단번에 거절당한 창수는 미련 없이 마법화살을 날려, 와르카의 심장을 뚫어 버렸다.
한 지역을 호령했던 악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라하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 * *
“쏘지 마세요! 제가 금고를 열 수 있습니다!”
보물금고 털기가 물 건너갔다고 판단한 창수는 본래 목적대로 마적단 잔당을 모두 처단하려 했다.
그때, 창수의 의도를 눈치챈 공격대장 판누가 금고문을 열겠다고 자청했다.
현재 창수는 투명망토를 가동한 상태. 감으로 공격 조짐을 알아차린 것은 판누가 쌓아 온 전투 경험이 헛되지 않다는 걸 나타낸다.
“정말, 비밀금고를 열 수 있나?”
“예! 그렇습니다! 금고를 열고 물건도 빼낼 수 있습니다!
“네 두목이 재물 욕심이 지독한 놈인데, 너에게 비밀금고 이용을 허가했다고? 그게 말이 돼?”
창수는 외르카가 재물을 잃기 싫어 죽음을 선택한 독종이라 생각했다. 돈독이 절정에 오른 자가 부하에게 금고 출입을 맡긴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일.
“두목이 직접 움직이는 일이 드뭅니다! 제가 두목을 대신해 금고 관리를 해 왔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너에게 전 재산을 맡겨?”
“평소 열쇠를 두목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금고를 열 때 항상 두목이 지켜봤습니다!”
“흠……. 그럴듯한 이야기군. 좋아. 한번 믿어 보지. 그 대신 허풍이면 각오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창수는 판누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으나, 나름 타당한 설명이라 생각했다.
금고에 재물을 넣고 빼는 일은 의외로 힘든 중노동에 속한다. 부하에게 힘든 작업을 맡기고, 와르카가 감독하는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게다가 어차피 포기한 보물. 약간의 시간을 더 투입한다고 손해 볼 건 없다. 판누가 수작 부리는 걸 대비만 하면 될 일.
- 철컥!
- 스르륵!
“많이도 쌓아 놨군! 어서 다 꺼내!”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전에 부탁드릴 것이…….”
“왜? 네 목숨을 살려 달라고?”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른 단원들 목숨도 살려 주십시오!”
‘어쭈. 이것 봐라. 흥정을 할 줄 아는 놈이네.’
마법금고에서 재물을 빼내는 데 도움을 준다면 판누를 죽이지 않을 거다.
그러나 50명이 넘어 보이는 잔당들을 모두 살려 달라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 두목 와르카가 죽고 재물도 잃겠지만, 50여 명이면 마적단이 충분히 부활할 수 있다.
그렇다고 판누를 처단하면, 비밀금고에서 재물을 빼내기 어렵다.
창수는 금고 속에 보이는 재물을 보며, 판누의 제안을 받아야 할지? 아닐지?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