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불길한 기운
LA에서 돌아와 하루 정도는 쉬었다.
출근을 하려고 했지만 서인하 선배가 쉬지 않으면 쉬게 만들어 주겠다고 협박을 해서,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드러누워 하루를 보냈다.
상암에서 출퇴근하다가 드디어 신도림 쪽으로 이사를 했다.
이사 갈 집도 당연히 원룸 월세를 알아봤었는데, 그걸 알고 서인하 선배가 전세 대출을 소개해 줘서 그쪽으로 잡을 수 있었다.
지금 드러누워 있는 내 집, 2년 전세 계약에 이중 80%는 은행 것이지만, 그래도 매우 뿌듯한 마이 홈이었다.
“……그래 봤자 여기서 잔 날이 별로 없구나.”
맨날 회사 수면실에서 잤더니, 집에서 자는 게 어색했다.
하지만 원룸을 벗어나 투룸 전세를 얻었으니, 착실히 나의 스케일이 커지고 있다는 실감이 나는 곳이었다.
그렇게 익숙지 않은 집에서 하루를 쉬고, 민희와 간단히 저녁도 먹고, 다음 날부터 다시 출근을 했다.
“강 PD, 이것 좀 검토해 줘.”
우철민 PD가 가지고 온 웹드라마 진행표를 확인해서 의견을 주고, 그새 또 진행된 외주 제작 건을 확인하고.
그러고 나서 서인하 선배가 방송사에서 돌아와 손짓하는 것을 따라 회의실로 들어갔다.
“컨펌 났어. 다음 달부터 진행 들어가면 돼.”
“알겠습니다. 외주 세팅해 두겠습니다.”
“그건 걱정 마. 내가 어느 정도 선 잡아 놨으니까.”
리스트를 추리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벌써요?”
“네가 미국에 간 사이 나는 놀았는 줄 아냐. 협력 외주사랑 출연자 세팅도 어느 정도 윤곽을 잡아 놨어. 너는 <V.I.P>에 신경 써. 촬영 들어가잖아.”
채널T에서도 <V.I.P>의 진행을 서둘러 주길 바라고 있었다.
<미션 트립>만큼 편성이 바쁜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최대한 빨리 달라고 하는 것에 가까웠다.
[허소윤CP: 수요일 밤 10시 편성이 될 것 같아요]
[허소윤CP: 첫 촬영에는 나도 참관할 거니까 잘 부탁해요]
허소윤 CP의 메시지를 서인하 선배에게 보여주니, 그가 피식 웃었다.
“역시 밀어붙이는 건 여전하네. 제대로 걸렸구나, 대한아.”
“좋은 거겠죠?”
“우리한텐 좋은 거지. 성과를 빨리 보여야 하니까.”
서인하 선배의 어투에는 살짝 걱정이 묻어나 있었다.
어차피 둘밖에 없지만 나는 괜히 성량에 주의하며 물었다.
“투자자들한테 한 소리 들으셨습니까?”
우리 회사의 투자자는 금완승 감독을 비롯하여 몇몇의 인물이 있다.
인물이라고 하기엔 전부 회사들이지만, 나는 그 부분을 일부러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경영적인 부분은 어디까지나 서인하 선배의 영역이라 여겼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미국에 가기 전에도 투자사들 미팅을 다녔고, 그때마다 아주 밝은 표정은 아니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한 소리까진 아니고. 다들 우려는 하지. 금 감독님이야 사정을 아시니 허허 하고 넘어가지만, 사실 NBS에 외면당한 건 아주 큰 손실이잖아.”
“그래서 채널T와 다른 방송사를 잡은 거잖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빨리 성과를 보여 달라 이 말들이야.”
성급하긴.
제대로 방송 제작이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어차피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성과를 바라다니.
불평이 생길 만도 하지만, 그래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하늘같은 투자사들인데 알아 모셔야지.
억지스러운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빨리 성과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너뿐이겠냐. 우 PD도 열심히 하고 있고, 또 수정이도 들어올 거니까 괜찮아.”
서인하 선배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아이윌의 앞날은 밝아. 그치?”
“그럼요.”
나도 같이 웃어 주었다.
방수정 PD가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리고 <V.I.P>의 제작이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V.I.P>는 연예인이 평소 위치가 아닌, 제작진의 위치가 되어 그 업무를 경험해 보고, 그 과정을 추적하는 관찰 예능 포맷이었다.
첫 촬영은 우이독경의 촬영장에서 시작되었다.
주말이었지만, 우리도 그렇고 우이독경도 그렇고 그런 것에 신경 쓰는 환경은 아니었다.
“금완승 감독님이십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나는 허소윤 CP에게 금완승 감독을 소개했다.
방송계 짬밥이 긴 허소윤 CP도 금완승 감독을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허소윤입니다. 천만 눈앞에 두신 거 축하드려요.”
<라이벌>은 개봉 이래 이례적인 기록을 세워 나가고 있었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금완승 감독의 세 번째 천만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감사하우. 이게 다 강 PD 덕분인데, 들었수?”
“예? 강 PD님이요?”
악수를 하다 말고 두 사람이 나를 쳐다봐서, 나는 금완승 감독에게 인상을 써 주었다.
또 무슨 필요 없는 소리를 하시려고.
“시사회 때 말이야, 그날 뒤풀이에 와서는 <라이벌>이 천만 찍을 거라고 장담을 하고 갔거든. 만약 천만 안 되면 그때 거기 모인 사람들한테 한턱 쏘겠다고 말이우.”
“정말이에요?”
“하…… 하하, 예, 정말이긴 합니다만…… 진짜 천만이 넘을 줄을 제가 알았겠습니까.”
물론 알긴 했지. AGD 앱이 단호박처럼 단호하게 알려줬으니까.
그 단호한 100% 확률대로, <라이벌>은 무난하게 천만을 찍고 그 이상을 보게 되었다.
천만 되기 전에 출연 계약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어쩌면 준혁이 형님이나 박지운이나 출연료가 더 뛰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잘 보고 가겠습니다. 영화 촬영은 저도 처음 보는 거라서 흥미가 돋네요.”
“뭐, 별다를 건 없긴 한데. 아, 대배우가 연출 막내로 뛰어다닐 거니까 별다를 게 있으려나?”
금완승 감독이 장난기를 가득 띄우고서 촬영장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아직 촬영이 시작도 안 되었는데 연출팀에 섞여 있는 준혁이 형님이 있었다.
멀리서 시선이 마주치자 금완승 감독이 괜히 큰 소리로 소리쳤다.
“이봐! 류 막내! 뛰어다녀야지! 어딜 막내가 걸어다니나!”
“아! 예예! 알겠습니다!”
준혁이 형님도 맞받아치면서 과장되게 굽신거려서 촬영장에 웃음이 퍼져 나갔다.
“분위기 좋네요.”
허소윤 CP가 툭 하고 내뱉어서, 나도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좋으신 분들이라. 좋은 그림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거야 메인 PD가 어떻게 하냐에 달린 거겠죠.”
허소윤 CP가 빙긋이 웃어 보이더니, 모니터들 앞의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자아, 평이 자자한 강 PD의 연출 솜씨 좀 볼까요?”
“……갑자기 엄청 부담되는데요. 촬영 끝나고 알려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요. 그럴 생각 없어요. 시작해요, 빨리.”
장난스레 손을 내젓는 그녀의 태도에 나도 피식 웃고서 확성기를 들었다.
“<V.I.P> 류준혁 편,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 * *
『채널T―강대한 PD 컬래버레이션, <V.I.P> 첫 촬영 시작!』
『류준혁 <V.I.P>에서 영화 현장 일꾼 되다?』
『<라이벌> 금완승 감독의 ‘우이독경’ 신작 촬영 현장, <V.I.P>에서 첫 공개!』
주요 포탈을 수놓는 기사들은 그동안 강대한이 쌓아 놓은 숱한 이름값을 증명하듯 즉시 인터넷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다.
금세 커뮤니티들로 옮겨지고, SNS 해시태그로도 상위권에 노출되었다.
포탈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올라가는 것도 금방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정식 프로모션에 맞먹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중견 배우 류준혁이 영화 제작 현장의 제작진을 경험한다는 신선한 발상의 뒤를 이어, 다음 타자는 바로 신인 배우 박지운.
얼마 전 천만 영화 대열에 오른 금완승 감독의 <라이벌>에서, 류준혁의 상대역으로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박지운은 올해 연말 영화상에서도 강력한 신인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하는 신예이다.
그가 <V.I.P>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은 드라마 촬영 현장. 사흘간의 촬영 기간 동안 연출팀의 막내로서 충실하게 업무에 전념할 계획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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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급 모델의 런웨이 무대 뒷모습, 아이돌 가수의 음악 방송 제작진 경험 등. <V.I.P>는 벌써부터 그 볼거리로 주목을 받고 있다.
아이윌의 신 예능 <V.I.P>는 다음 달부터 채널T에서 방영될 예정이다.
―민준기 기자』
『―류준혁만으로도 헉스러운데 박지운이라니ㅠㅠㅠㅠ
―지운아ㅠㅠㅠㅠ 우리 지운이가 연출팀 막내라고?ㅠㅠㅠ
―종현이 안 나오나? 강피디 백종현과도 친하지 아늠?
└드라마 스케줄 땜에 무산됐다는 카더라 있음
└카더라 아님ㄴㄴ 백종현이 자기 인별에 올렸었음 자기도 아쉽다고
―강피디면 믿보지 강피디를 안 믿으면 누굴 믿냐
―류준혁도 그렇고 박지운도 그렇고 이러다가 강피디 사단 만들어질 듯ㅋㅋ
└그러기에는 엑시트가... 최효명이 캐스팅에 없는데
└그분은 일단 내한부터 하셔야...
―강피디니뮤ㅠㅠ 외삼촌 우리 명리더 출연 좀....』
이제 제작이 시작되었다는 기사일 뿐인데, 그 반향은 대단했다.
“이 상황도 분명 계산을 하고 진행한 것이라고 믿겠네.”
그 기사들을 모두 확인한 왕이범 이사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곽성찬 본부장을 미끄러지듯 쳐다보았다.
기사가 뜬 즉시 이사실로 불러내서 일단 까려고 했다.
하지만 예전 서인하를 대하듯 편한 상대가 아님은 알기에, 왕이범치고는 매우 유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래서 이전부터 말했었지. 아이윌에서 가지고 오는 기획은 무난하게 통과시켜도 손해는 보지 않을 거라고. 기억하나?”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는 저도 좀 억울하군요.”
“뭐가 말이지?”
“그 기획은 저희에게 보여준 바가 없는 기획입니다. 저희한테 가지고 왔다면 거부할 리 없었겠죠.”
이전 아이윌이 가지고 온 기획들은 모두 내부에서 돌아가거나, 혹은 NBS에서 만들었던 예능의 연장선상뿐이었다.
곽성찬이 하는 말은 그 의미였다.
왕이범은 그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으나, 전권을 위임한 상태라 그 기획들을 모두 보지 못해 할 말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조용히 속을 삭이면서 왕이범이 날카롭게 곽성찬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놓친 것은 놓친 것이지. 만회할 수 있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뭐, 이미 준비하고 있으니 곧 보여 드릴 수 있도록 하죠.”
곽성찬은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하는 눈짓을 하더니, 대꾸하기도 전에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간 직후, 왕이범은 의자에 등을 묻으며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저걸 데리고 온 게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군…….”
곽성찬을 외부에서 데리고 온 결정의 대부분은 왕이범의 추진 때문이었다.
지상파 PD 출신에, OTT 사업체를 굴린 이력도 있어 향후 NBS에 꼭 필요한 인재라 여겼었다.
그렇지만, 일찍 성공한 케이스답게 손안에 두고 굴리기에는 쉽지 않은 타입이었다.
최근에는 왕이범이 아니라 신호현과 더 자주 커뮤니케이션을 나누고 있으니, 왕이범은 속이 탔다.
“후우…… 인하야, 인하야. 너라도 있었다면…….”
뒤늦은 바람이긴 하지만, 말이 통하는 후배가 참으로 보고 싶었다.
곽성찬이 본부장실로 돌아오자 표인배가 뒤따라 들어왔다.
“뭐라고 하십니까?”
“채널T에서 가져갔는데, 만회할 게 있냐고 하시는군. 뻔한 일이지.”
왕이범이 이사진에서도 권한이 대단함은 곽성찬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람을 다루는 법을 곽성찬도 모르지 않았다.
사람을 다루는 경험치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표인배가 충실하게 물어오자, 곽성찬은 자리에 앉아 빙긋이 웃어 보였다.
“만회할 방법을 원하시니, 보여 드리면 되지 않겠어? 기자들한테 보도자료 돌리고, 기사 띄우라고 해.”
“알겠습니다.”
* * *
귀국 이후 제대로 인터넷도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민준기 기자의 인터뷰에 잠깐 응한 것이 전부였고, 그 이외의 시간은 정말 전부 <V.I.P> 촬영에 쏟아부었다.
그래서.
그 기사를 확인한 것은, 박지운 편 촬영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였다.
『NBS, 영화사 ‘바람처럼’과 힘을 합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