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종방 회식
허소윤 CP를 처음 만난 것이기도 해서 아직 제대로 된 캐릭터 파악은 하지 못했다.
정작 만나 보니 확실히 CP로서의 연륜과 경험치가 엿보였다.
내가 지나칠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음에도, 그녀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가진 않았다.
물잔을 잡은 채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요리는 테이블 위에 차려져 있지만, 둘 다 손은 대지 않고 있다.
이 타이밍에 뭔가를 먹는 것도 이상하겠지?
할 말은 다 던지고 나자 긴장도 어느 정도 사라져서 배가 고파지고 있었다.
그냥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라면이나 하나 끓여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뭐…… 그래요. 사실 들은 모습과는 그 대답이 더 잘 어울리긴 하네요.”
허소윤 CP가 한 잔 더 생수를 마신 다음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예?”
“국 사장님이 그러더라고요. 아주 당돌한 친구라고. 데리고 일하면 힘들 거라고요.”
그 사람이 그런 소리를 했단 말이지?
“신동욱 실장도 좋은 소리는 하진 않았고요. <무비 메이커> 쪽 터뜨린 것도 강 PD죠? 신 실장은 아주 확신하던데.”
그 인간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나는 신동욱 실장과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런 일을 벌이겠습니까. 어디까지나 자업자득이겠죠.”
“그래요? 그럼 신 실장이 잘못 알았나 보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 CP는.
내 직접적인 거절에 불쾌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연륜이 느껴지는 만큼 그 감정이 손쉽게 보이지는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고 싶었다.
그때.
“국 사장과 신 실장, 두 사람이 어떤 캐릭터인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그 사람들이 입을 모아서 안 좋은 이야기를 한다면, 되레 좋은 사람이라는 말도 되고.”
“……그렇습니까?”
“너무 단호해서 좀 기분이 나쁘긴 한데, 거절 자체로 불쾌한 건 아니에요. 어차피 오늘 한 번으로 뭐가 될 거라곤 여기지 않았으니까.”
허소윤 PD가 나를 보더니 싱긋이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난 당돌한 사람들을 좋아하거든요. 오늘 자리는 좋은 사람 하나 얼굴 익혀 뒀다고 치죠.”
“…….”
어라, 잘 풀린 건가.
“사람 연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죠. 그리고 난, 제법 끈질긴 사람이거든요.”
“……하하. 그러시군요.”
거절을 받아들이긴 했는데, 그건 그거고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뭐지, 이건? 음주운전은 했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 그런 건가?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는 눈을 굴리다가 문득 허소윤 CP의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입장상, 채널T에서 한 자리를 하고 계시는 이 CP님에게 잘 보여야 할 날도 올지 모른다.
내가 앞으로 갈 길은…… 이런 인연도 필요로 하는 길일지도 모르니까.
“그런 면에서는 뜻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일단 한번 정한 것은 끝까지 밀어붙여야 맘이 풀리는 쪽이라서요.”
허소윤 CP의 말을 덧붙여서, 내 뜻을 전했다. 빙빙 돌리지 않는, 정면돌파의 말이었다.
“호오.”
허소윤 CP가 묘한 소리를 내고,
[91%]
그녀의 머리 위 확률이 천천히 변화했다.
나를 맘에 들어 할 확률. 80%대에서 곧장 90%로 올라가는 것을 보니, 당돌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내뱉은 거, 나는 한 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거절해서 죄송하지만, 식사 좀 해도 되겠습니까?”
“뻔뻔하기도 하네요. 제안은 거절해도 밥은 먹겠다 이건가요?”
“이렇게 차려진 요리를 버리고 갈 수는 없잖습니까. 같이 식사하시죠. 출출하지 않으십니까.”
[92%]
“그럴까요.”
허소윤 CP도 피식 웃음을 짓고는 포크를 들었다.
다소 식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고급스런 음식답게 충분히 맛있었다.
약 1시간 정도 식사를 하면서 더 대화를 나눈 뒤에 가게에서 나왔다.
헤어지기 전 허소윤 CP가 악수를 청해 왔다.
“오늘 이야기, 즐거웠어요. 또 연락하죠.”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악수를 하고, 그녀가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린 다음 폰을 꺼내서 서인하 국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야기 끝났습니다. 거절했지만, 얼굴도장은 잘 찍은 것 같습니다]
내 차에 오를 때쯤 답장이 돌아왔다.
[서인하국장: 영악한 놈 같으니]
* * *
다시 시간이 흐르고.
나는 5팀 업무에 충실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원 업무가 주요였는데, 이전 서인하 국장의 지시대로 여러 팀의 기획회의에 참여했던 생활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강 PD가 지원이야? 새 기획 안 해?”
“할 거 많지 않아? <언더커버 싱어> 시즌 2 기다리고 있는데, 나.”
가는 팀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나는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너무 달렸다 보니 좀 쉬고 싶어서요. 기획은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아이템이 없다, 구성이 안 보인다 등등. 사실 핑계는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야 우리 팀에 강 PD가 와 주면 좋지. 자, 이게 우리 방송 아이템인데…….”
“여기서 촬영지를 바꾸는 게 좋을까?”
“혹시 괜찮은 아이템 가진 거 없어요?”
나의 이전 성과들이 있다 보니, 어느 팀이든 나를 두 손 벌려 환영해 주었다.
기획회의 참여가 주 업무였던 예전보다, 이번에는 잠깐이라도 주요한 일들을 하면서 경험을 이것저것 쌓았다.
지원 업무는 예능국뿐만이 아니었다.
“예? 교양국에요?”
“그래. 여유 있는 애 좀 보내 달라고 하더라고.”
정민우 팀장이 서류를 하나 넘겨주면서 지시했다.
“지금 우리 팀에서는 강 PD가 제일 여유 있잖아. 국장님도 너한테 지원이나 넘기라고 했으니까, 경험도 쌓을 겸 갔다 와.”
“어……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다큐멘터리는 저도 처음인데…….”
다큐멘터리도 물론 공부 삼아 챙겨 보긴 하지만 괜찮을까, 하는 마음으로 다큐멘터리 팀에 합류했다.
그렇게 교양국, 보도국 등의 팀까지 지원을 나가 촬영, 제작을 돕게 되자 경험치는 쑥쑥 올라갔다.
서인하 국장의 지시라고 하는데 왜 이런 지시를 했는지는 뻔했다.
제작사를 하게 되면, 물론 예능 방송이 주요가 되긴 하겠지만, 거기에만 멈춰 있을 순 없다.
다큐든, 시사 프로든, 어쩌면 드라마까지.
발을 넓힐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런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 팀장님, 요새 강 PD 너무 굴리시는 거 아닙니까?”
5팀의 선배 PD가 나를 대신해 그렇게 나서 줬을 때.
“야, 아니면 널 보내 줄까?”
“촬영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단번에 내뺄 때도 그다지 서운해하지 않았다.
좋은 기회다. 나에게도, AGD 앱에게도.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100%]
[100%]
[100%]
.
.
실물과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확률 보기.
이제 그 활용치가 정점을 찍어 가고 있어서, 아이템도 딱히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예능 방송만이 아니라 다큐든 뉴스든, 어떤 방송이든 꽤 자유자재로 확률 보기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적립 포인트/사용 가능 포인트]
[14,943/3,247P]
그렇게 5월 초로 들어가는 시기.
적립 포인트가 15,000P를 눈앞에 두었을 때.
<당잠사> 시즌6 종방 회식에 초대되었다.
* * *
『‘당신이 잠든 사이에’ 시즌6 제주도편, 9%를 넘는 시청률로 종영』
『‘당잠사’ 최종화 시청률 9.4% 기록!』
『힐링 여행 예능의 대명사 ‘당잠사’ 제주도편, 시청자 호평과 아쉬움의 사이』
<당잠사> 시즌6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면서 막을 내렸다.
회사 내부에서는 10%가 넘는 시청률도 기대를 했지만, 마지막 화까지 결국 그 턱은 넘지 못했다.
그렇다 해도 결코 나쁜 성적이 아니었기에, 회식 장소도 적당한 가격의 소고기집이었다.
“자, 오늘은 마음껏 먹어라!”
서인하 국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애초에 나까지 호출한 게 서인하 국장이니 당연한 건데, 나는 주변 눈치를 보게 되었다.
“음…… 부외자가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한 테이블에 몰아뒀다 해도, 서인하 국장, 나, 박주영 선배까지 와 있었다.
“이거 이러다가 방 PD님까지 또 전처럼 나타나는 거 아냐?”
박주영 선배가 소주잔을 신나게 돌리면서 내뱉는 말에 나는 문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열려도 들어오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서인하 국장을 보았다.
“정 팀장님도 부르시지 그랬습니까.”
“불렀지. 근데 일 많다고 깠어. 요즘 나랑 잘 안 놀아 주거든.”
“국장님께서 일 많이 시키신다면서요. 다 들었습니다.”
옆에서 선배가 이죽거리는 것을, 서인하 국장이 날카롭게 노려보는 것으로 진압했다.
“뭐…… <당잠사>니까 옛 팀원들도 다 같이 모여서 회식하면 좋잖냐.”
“그건 그렇습니다.”
우리는 셋이서 잔을 부딪쳤다.
회식이 좀 무르익고, 저쪽에서 민희가 총총히 걸어와 서인하 국장 옆 빈자리에 앉았다.
“국장님, 그렇게 술 사 주신다더니 결국 회사 카드로 사 주시네요. 그것도 회식으로.”
“내가 돈이 어딨어, 다 박봉인 거 알면서 그래.”
“그 분노를 담아 한 잔 받으세요.”
“이크, 죄송합니다.”
민희가 농담조로 말하며 잔을 따라주고, 비어 있는 선배와 나의 잔도 따랐다.
“작작 마셔.”
내 잔을 따를 때는 그런 충고도 잊지 않아서, 옆에서 박주영 선배가 웩 하는 얼굴을 해 보였다.
“선배도 빨리 여친 만드시고요.”
“냅둬. 나는 도시인 찍다가 혼자 쓸쓸히 죽을 거니까.”
“어휴, 그런 소리 좀 하지 말고요. 소개해 드려요?”
그렇게 두 사람이 소고기를 주고받으며 덕담을 나누는 것을 옆에서 흐린 눈으로 보고 있는데, 서인하 국장이 묘한 눈으로 이 모든 정경을 둘러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는 권민헌 선배도 한차례 보고, 그 너머에 있는 촬영 감독, 음향 감독, 작가진 등등도 보고.
한번 그렇게 훑고 돌아온 시선을 거두며 조용히 잔을 들어 올려서, 나도 잔을 들고 가까이 가져갔다.
서인하 국장이 내 잔을 한차례 보고는 잔을 부딪치려 했다.
그러자 민희와 박주영 선배가 어느새 분위기를 알아채고 같이 잔을 들었다.
“말씀하실 겁니까?”
잔이 입에 닿기 전에 나는 물었다.
이 자리에 왜 굳이 우리를 불러 모았는지, 나는 이유를 알고 있다.
민희도, 박주영 선배도 이미 짐작하고 있다.
서인하 국장에게 <당잠사> 팀은 꽤 의미가 큰 팀이다.
이 자리에 방수정 PD나 유수현 작가가 없긴 해도, 그들을 직접 키운 장본인에다가 많은 부분에서 관여한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권민헌 선배도, 다른 감독들도. 모두 오랜 시간 서인하 국장과 일을 해 온 사람들.
나도 얼핏 짐작만 할 수 있는 관계성이 보이기만 했다.
“정 팀장님하고는 이미 이야기 끝나신 거죠?”
정민우 팀장이 굳이 이 자리에 오지 않은 이유도 뻔하지. 아는 이야기를 또 듣고 싶지 않을 테니까.
서인하 국장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잔을 비웠다.
“다녀오마.”
“예.”
그가 잔만 들고 테이블을 옮겨 갔다.
감독들이 그를 환영하고, 권민헌 선배의 어깨를 끌어안으면서 그가 빈자리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테이블에 정적이 내려앉더니, 목소리를 죽이지만 모두가 놀란 얼굴로 서인하 국장을 쳐다보았다.
떨리는 눈으로 권민헌 선배가 테이블을 넘어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나는 어둡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대한이한테 먼저 안 들었으면 나도 지금 저런 얼굴이겠죠.”
“난 여기 오기 전에 직접 말씀해 주셨지만…… 참…… 서 국장님이 그만두시다니.”
민희와 박주영 선배가 서로의 빈 잔을 채웠다. 나도 빈 잔을 가져갔는데,
“넌 네가 따라서 마셔.”
“예? 왜요?”
“왜요? 몰라서 묻냐, 이 촉새 놈아. 내가 그렇게 반대했는데…… 어휴, 새끼. 진짜.”
“선배, 왜 욕을 하고 그래요. 다 잘되려고 하는 사람을.”
“이봐, 이 작가. 남친을 말리지는 못할망정……. 아이고…….”
두 사람이 다시 입씨름을 하기 시작해서,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서인하 국장 쪽만 살폈다.
저쪽도, 그리고 이쪽도. 떠나는 사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쓸쓸하긴 해도, 분명 가슴 따뜻한 정경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서인하 국장의 사직서가 정식으로 제출되었다는 소식이 회사를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