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스튜디오
투자 회의에서 사실상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진행 임무를 맡은 사람은 서인하 국장이고, 회사 간의 투자 일이 내 짬밥에서 쉽게 끼어들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따금 방송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에나 나한테 발언권이 주어졌다.
투자라는 주제 때문인지 자리는 좀처럼 끝날 기미가 없이 이어졌다.
그렇다 보니 저녁 식사 자리였던 게 어느덧 10시까지 치달았다.
시계 분침이 정각을 넘어설 즈음,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투자 지분 배분은 이 선에서 결정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직접적으로 대화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임에도 나는 머리가 핑핑 도는 기분을 억지로 눌러 참으며 얼음물을 꿀꺽 삼켰다.
“강 PD, 정리는 다 되었지?”
“아, 예. 끝났습니다.”
중간부터 나오는 이야기를 나는 노트북에 정리하고 있었다. 회의록 정리하는 기분이라기엔 영 생소했다.
플래티넘에서는 중간에 비서가 들어왔고, 금완승 감독은 직접 자신의 스마트폰에 정리하고 있었다.
“그럼 오늘 나온 결론을 바탕으로, 디테일한 계약서가 나오는 즉시 진행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이견 없습니다.”
“저도요.”
플래티넘 사장, 금완승 감독의 동의로 정말 마지막 대화가 끝났다.
서인하 국장이 눈치를 줘서, 나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에 신호를 주었다.
미리 이야기해 둔 술병 하나가 테이블 위에 올랐다.
“얼마 전 제가 외부 사람에게 선물 받은 술인데, 오늘 같은 날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가져와 봤습니다.”
서인하 국장이 술을 소개하며 뚜껑을 땄다.
향긋하면서도 톡 쏘는 약주의 향이 금세 테이블 위를 감돌았다.
“이건…… 정말 좋은 술 같군요.”
“예. 주조 명인께서 1년에 몇 병 안 만드는 술이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귀한 술을…….”
금완승 감독의 눈빛이 좀 전의 회의보다 몇 배는 더 반짝였다.
하긴, 약주 싫어하는 아저씨들이 있을까. 서인하 국장은 손수 한 잔씩 따라서 잔을 채웠다.
마지막 내 잔까지 따라 준 그에게서 내가 병을 받아 잔을 채워 주었다. 그 잔을 든 서인하 국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오늘 이렇게 좋은 기회로 뵙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향후로도 서로에게 건설적인 관계가 될 수 있도록, 있는 힘껏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래, 강 PD가 잘해야 하는 거지. 알고 있지, 강 PD?”
그의 말에 뒤이어, 맞은편에서 왕이범 이사의 강렬한 눈빛이 날아들었다.
찔끔하지만 그렇다고 전처럼 압박이 느껴지진 않았다.
“물론입니다.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잘 돕겠습니다.”
옆에서 준혁이 형님도 거들어 줘서 한층 더 마음이 든든했다.
그렇게 마지막 잔을 나눈 뒤, 긴 미팅은 끝이 났다.
한식집 앞으로 나오자 야밤의 싸늘한 바람이 잠시 훑고 지나갔다.
“좋은 술을 마셔서 그런가, 별로 춥게 안 느껴집니다그래. 허허.”
플래티넘 사장이 그렇게 너털웃음을 터뜨리고서, 비서와 함께 먼저 자리를 떠났다.
“강 PD, 열심히 하게.”
왕이범 이사가 무뚝뚝한 얼굴로 내게 악수 한 번을 하고 떠나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옆에서 준혁이 형님이 툭 팔을 쳤다.
“그래도 너 걱정해 주는 것 같은데, 저분.”
“……그런 거겠죠?”
근데 왜 난 자꾸 압박처럼 느껴지지.
“저분의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겠지. 무작정 밑의 사람 격려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
준혁이 형님이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나는 애매모호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데 이분들이 안 나오시네요.”
금완승 감독은 차 타기 전에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잠깐 늦어지는 걸 거고, 서인하 국장은 계산을 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좀 나오는 시간이 늦다 했는데, 잠시 뒤 가게 문이 열리면서 두 사람이 같이 나왔다.
“그럼 서 국장님.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금완승 감독이 서인하 국장과 악수를 하더니, 내게 와서도 악수를 청했다.
“강 PD. 잘 부탁해. 담에 또 사무실 놀러오고.”
“놀러 간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조만간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그래, 그래. 류 배우도 다음에 봐.”
“예. 살펴 가십시오.”
그가 손을 휘적휘적 젓고는, 소주 한잔 더 하고 가야겠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모퉁이를 지나 주차장으로 사라졌다.
어려운 사람들이 그렇게 다 사라지자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강 PD, 오늘 수고했어. 이런 자리 익숙하지 않을 텐데.”
아, 한 명 남아 있구나, 아직. 나는 웃으면서 돌아보았다.
“아닙니다, 국장님. 오히려 저 때문에 국장님이 고생하신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나야 뭐, 늘 하던 일이니까.”
사실 고생이라면 나보다 서인하 국장이 더 했다. 지금도 피로함이 얼굴에서 엿보였다.
“오늘 기록한 것은, 내일 오전 중에 정리해서 보고 올리겠습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래…….”
그렇게 대답하는 그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눈빛으로 네? 하고 되물었더니, 그가 입꼬리를 끌어 올려 또 묘하게 웃었다.
“금완승 감독이랑 몇 번 만났지?”
“어…… 두 번입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술자리는 가졌습니다.”
“두 번이라. 그 두 번 동안 뭘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금 감독이 너를 이렇게 좋아하냐.”
“예?”
무슨 말이지. 좀 전에 나오기 전에 둘이서 무슨 이야기라도 한 건가?
서인하 국장은 진득이 나를 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내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시선을 떼 준혁이 형님을 보았다.
“오늘 류 배우님도 고생하셨습니다. 혹시 둘이서 한잔 더 하거나 할 생각이십니까?”
“예? 그게…….”
준혁이 형님이 내게 눈빛으로 어쩔 거냐고 묻는 사이, 서인하 국장이 지갑을 열어 카드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한잔 더 할 거면 이걸로 계산해. 영수증 챙기고. 오늘 고생했어.”
서인하 국장은 쿨하게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같이 하자고 말씀드렸어야 했나?”
“그러게요……. 너무 바람처럼 떠나셔서 그럴 타이밍도 없었네요.”
준혁이 형님과 눈을 마주치고 뻘쭘하게 웃었다.
“뭐, 카드 주고 가신 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잔 더 하고 갈까.”
“시간 괜찮으시다면야.”
“가자, 그럼. 근처에 안주 괜찮은 데 있어.”
준혁이 형님이 먼저 앞서 나가고 나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서인하 국장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 * *
효명이나 준혁이 형님을 만났을 때 좋은 것은, 다음 날을 생각하면서 술을 마신다는 것이었다.
준혁이 형님은 이제 바쁜 스케줄은 다 끝난 상태라, 영화 홍보 일정만 어느 정도 소화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일 출근하는 나를 배려하여 12시 전에 자리를 마무리해 주었다.
아침에 깔끔하게 일어나, 숙취 음료 하나를 먹고 출근하는 길에 정민우 팀장을 만났다.
“어, 강 PD.”
“좋은 아침…… 이 전혀 아니신 얼굴이네요. 밤샘 회의라도 하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뮤직스케치> 특별 방송이 또 잡혔다고 했던가?
팀장의 자리에서 자신의 프로그램을 움직이고 있다는 게 참 쉽지 않음을, 정민우 팀장을 보면서 느낀다.
나도 나중에 팀장이 되거나 하면 저런 생활을 하게 되려나.
그는 피로가 중첩된 얼굴로 미간을 주무르면서 나를 보았다.
“밤샘 회의는 무슨. 간밤에 국장님한테 불려 가서 술 마셨어.”
새벽 5시까지. 그렇게 덧붙이는 정민우 팀장을 보며 나는 입을 벌렸다.
“사우나 가서 자고 나오셨습니까? 국장님하고?”
“그 양반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나갔지. 참 강철 체력이라니까.”
술 냄새는 안 나는데, 얼굴이 저렇게 피곤해 보이는 게 그 이유라니.
서인하 국장하고 헤어진 게 10시쯤이니까 아무리 못해도 11시부터는 마셨다는 말일 것이다.
40대를 넘어가는 분들이 참…… 체력도 좋네.
“어제 그런데 무슨 일 있었냐?”
“예? 아뇨, 이야기는 잘 풀렸습니다. 제작만 들어가면 됩니다.”
“그래? 그런데 뭘 그리 고민하고 계셨던 거지.”
서인하 국장이 간밤 술을 마시면서 뭔가를 고민하는 투였다는 이야기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면서 생각해 봐도 딱히 그가 술을 마셔야 할 일이 어제는 없었다.
“개인적인 고민 아니실까요?”
“음……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고. 오전 중에 너랑 나랑 같이 부를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준비하고 있어.”
그가 먼저 내리고, 나도 5팀 사무실로 올라왔다.
여전히 비어 있는 여러 자리들을 확인하고, 국장실 쪽을 슬쩍 살폈다.
몇몇 사람이 노크를 하고 들어가는 것을 보니 정말 일찍 출근은 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오전 동안 어제의 회의록을 정리하여, 카드와 영수증을 끼운 보고서철을 들고 국장실로 갔다.
똑똑.
“강대한입니다.”
“어, 들어와.”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서인하 국장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 가 보고서를 내밀었다.
“어제 회의 정리한 회의록입니다.”
“그래. 빨리 가져왔네.”
보고서를 살피는 그의 얼굴이 참 수척해 보였다.
“정 팀장에게 새벽까지 술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숙취해소제라도 사 올까요?”
“됐어. 그런 건 미리 준비해 와야지.”
“죄송…….”
“농담이야, 아침에 사다 먹었어.”
그는 회의록을 미간을 짓누르며 살핀 다음 내려놓았다.
“정리 잘했네. 이건 이대로 정리하면 될 것 같고, 거기 좀 앉아봐.”
그가 소파를 가리켰다.
내가 엉거주춤 소파에 앉자, 맞은편에 서인하 국장이 자리하더니 입을 열었다.
“강 PD. 아직 제작진 안 꾸렸지?”
“예.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그래…… 알았어. 있어 봐.”
그가 폰을 꺼내 패널을 몇 번 만지고 타자를 몇 자 쳤다. 보지 않아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잠시 후, 국장실을 노크하고 정민우 팀장이 나타났다.
출근길보다 더 피로해 보이는 얼굴의 정민우 팀장이 옆에 앉자, 나는 피로한 두 상사의 중간에 끼인 형국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이 또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는 거지. 겁이 조금 나서 침을 꿀꺽 삼켰다.
“5팀에 지금 예능 프로 하나 더 돌릴 여력 되나?”
단도직입적인 서인하 국장의 물음.
“음…… 못 돌릴 건 아니지만, 빡빡하죠. <도시인>도 5팀에서 진행하고 있고요.”
“제작지원 쪽에서도 이리저리 말이 많던데. 인력 달린다고.”
“예. 지금도 그래서 각종 외주사에 오퍼 넣는 일이 많습니다.”
국장님도 아시다시피요, 라고 덧붙이는 정민우 팀장을 보고, 서인하 국장이 나를 다시 보았다.
“강 PD. 외주사랑 한번 진행해 보는 건 어때.”
“네?”
머릿속에서, 서인하 국장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 정민우 팀장이랑 어젯밤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건지,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들었다시피 지금 예능국 안에 인력이 좀 부족해.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이 많다 보니 팀별 지원도 많고, 양다리 걸치는 PD들도 많고. 솔직히 좀 힘든 여건이잖아.”
“예…….”
“안 그래도 아예 외주 제작 프로그램을 편성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거든.”
외주 제작 프로그램.
방송사가 자사 제작의 프로그램만이 아닌, 외부 제작사의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방송하는 방식.
다른 방송사에서는 이미 흔한 방법이고, 당장 우리도 드라마국은 이런 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일주일에 절반은 외주 스튜디오의 드라마들이 편성을 받는 마당에, 예능국은 NBS의 자존심이라며 아직까지 자체 제작을 고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잇몸까지 써 가며 버텼으나 이제는 한계에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외부 스튜디오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들라는 겁니까?”
“그래…… 맞아. 예능 프로그램으로도 확대해 보자고 그동안 이야기가 많았는데, 이젠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겠더라고.”
NBS―M 채널까지 자리를 잡았으니, 역시나 자체 제작으로 소화하기에는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동안 회사 자체에서 꾸준히 외주 제작사와의 연계를 늘리고 있긴 했는데, 이건 또 전혀 문제가 달랐다.
“메인 PD는 어디까지나 강 PD고, 대신 그 휘하의 팀은 스튜디오가 되는 거지. 강 PD면 믿고 맡겨도 컨트롤 잘할 것 같고, 그러니 이렇게 한번 이야기해 보는 건데. 어때?”
나도 선뜻 대답하진 못했다.
사실 제작진을 꾸리는 것은 계속해서 고민이긴 했다.
가능하다면 <언더커버 싱어>를 만든 이들과 모두 모여 다시 하고 싶었지만, 여건상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당장 민희와 주영 선배만 해도 <당잠사> 팀의 메인 작가고, <달리는 도시인>의 메인 PD였다.
그들을 끌어당기는 건 내 욕심일 뿐이었다.
“그럼 그 외부 스튜디오도…… 이 방송의 협력사가 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정말로 외주 제작으로서의 역할이 커진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중심은 어디까지나 우리 NBS, 플래티넘, 우이독경이 되겠지.”
지난 팀들처럼 내가 메인으로서 스튜디오를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는 건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그러도록 해.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일일 테니.”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응?”
나의 짤막한 대답에 서인하 국장과 정민우 팀장이 도리어 놀라워했다.
“이미 꽤 많이 지체된 기획입니다. 더 고민한다고 좋은 인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외부 스튜디오와 손발을 맞추는 것도 앞으로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미리 겪어 두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이 그랬다. 협력사 구하는 문제에, 경연 프로그램에 대한 반발 여론에, 광고 문제에. 이미 몇 달 가까이 지체된 기획이다.
더 이상 미루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대신에…….”
“그래, 말해 봐.”
“그 스튜디오는 제가 고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잘 골라서, <더 라이벌>을 잘 만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내건 조건은 그것이었고, 서인하 국장은 거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