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회동
AGD 업데이트 전까지 모아 둔 포인트가 얼마였더라.
100% 확률을 달성했던 게 오래되어서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이 페이지에 들어가 그동안 적립한 포인트를 확인했다.
[현재 적립 포인트/사용 가능 포인트]
[12,803P/1,462P]
그사이 몇 차례 100% 확률을 달성하긴 했던 것 같은데, 큰 포인트를 받진 못했나 보다.
그 결과, 업데이트 이후 처음으로 100% 확률을 달성해서 2배 포인트를 받았음에도 1,500P 정도밖에 쌓이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아이템을 몇 개나 쓸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어차피 해당사항이 크게 없는 이야기였다.
조금씩 포인트를 모으는 내 입장에선 하나의 아이템이라도 어떻게 적재적소에 쓰는지가 더 중요했다.
AGD 앱도 업데이트 때 말했다. 내 미래 패턴에 아이템 사용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그 분석을 믿는다면, 아이템이 부족해도 나는 앞으로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자신감이 현재로서는 더 컸다.
* * *
기획이 통과된 시점에 이미 가을이 끝나가고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었다.
그사이 준혁이 형님과 만나 기획을 다듬고, 각 협력사를 돌면서 세부 사항들을 조율했다.
필연적으로 외부 활동이 많아지면서, 내가 진행하고 있는 기획에 대한 기사도 종종 나오기 시작했다.
『NBS 예능의 라이징스타 강대한 PD, 새 프로그램 준비 중?』
『강대한 PD, 새로운 경연 프로그램을 만든다!』
기사야 전형적인 카더라 내용이었지만,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댓글이 요란했다.
특별히 보도자료를 뿌린 것도 아닌데 설마 이렇게 부정적인 판 위에서 일을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모니터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뒤로 지나가던 정민우 팀장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기사 떴네? 뭐래?”
나는 마우스를 움직여 대답을 대신했다.
“기사 내용이야 뭐 그렇고…… 댓글 반응 좀 보자.”
그는 내 마우스를 받아 죽죽 아래쪽으로 내리더니 댓글란을 먼저 확인했다.
『―또 오디션임? 안 지겹냐ㅎㅎ
―주작 시동 검? ㅋㅋㅋ
―이 시국에 오디션이라니ㅋㅋㅋ
―윗님 오디션이라고 기사에는 한 글자도 안 나오는데요 뇌피셜 오지네
└강대한 씨 어서 오세요.
└경연이나 오디션이나 결국 주작일 텐데 똑같은 거 아니냐』
댓글은 매운 수준을 넘어 거의 캡사이신 그 자체였다.
고구마를 100개쯤 들이킨 듯한 답답함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론이 빈말로도 좋다고는 못할 것 같습니다. 조작 건이 결착이 나고 있는 와중인데도, 여전하네요.”
“이런 종류는 항상 여운이 길지, 뭐. 그래도 이거 봐. 이런 좋은 댓글도 있네.”
『―NBS에서 주작한 것도 아니고 강대한 PD면 언커싱 존나 잘 만들었으니 믿을 만하지 않냐
└강대한 씨 자꾸 댓글 쓰지 마세요
└뭘 만들지가 더 중요하긴 하지만 응 조작 ㅅㄱ
―그래서 기자님 뭔 경연인지는 왜 말 안 합니까?』
전체적으로 보자면 사실상 까고 보자는 댓글이 더 많은 것 같지만, 그래도 응원 댓글도 종종 있긴 했다.
“이렇게 기다려 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잘만 만들면 되지 않겠냐.”
“옙.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서 미팅 예정은 잡혔냐?”
곧장 일 이야기로 치고 들어오니까 당황스럽네.
“네, 지금 다음 주로 조율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강남으로 잡으면 될까요?”
“국장님이 잘 아는 데 있다고, 여기다 연락해 보래.”
그러면서 명함을 내밀었다. 확인해 보니 고급 한정식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위치는 여의도. 상암이든 강남이든 이동하기엔 나쁘지 않아 보였다.
“네. 이쪽으로 그럼 예약하겠습니다.”
“인원은 체크했을 테고…… 아, 왕 이사님 참석하실 거야.”
“이사님이 직접이요?”
그 이름이 나오자 괜히 또 긴장이 되었다.
기획이 통과되었다고는 해도, 왕이범 이사는 이 기획을 그다지 맘에 들어 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니까.
결정권자들이 모이는 미팅에 왕이범 이사가 참석하는 거야 매우 정당하긴 하지만…….
“너무 긴장 안 해도 돼. 국장님이 참석해도 결국 이사 라인으로 보고를 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좀 더 빨라지는 것뿐이야.”
“예…… 그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오케이. 힘내고.”
그가 어깨를 툭툭 쳐 주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봤다가 다시 모니터에 집중했지만, 괜스레 걱정에 일에 집중은 잘 되지 않았다.
주말쯤에 가서야 모든 일정이 조율되었다.
그리고 수요일.
나는 여의도로 먼저 가서 장소를 확인했다.
예약 인원, 룸까지 확인한 다음에 시간이 좀 남아서 가게 밖으로 나가서 스마트폰을 만지작대며 인터넷을 했다.
인터넷은 끄고 살아야 했는데, 그놈의 호기심이 뭔지 포털 뉴스를 보게 됐다.
『<특집> 왜 계속해서 경연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가』
경연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카더라 기사들이 터진 이후, 이런 기사들도 포털 메인을 장식하곤 했다.
정말 내 프로그램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타이밍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 기사들의 논지가 하나같이 비판조이다 보니, 절로 어깨의 힘이 빠질 것 같았다.
“후우…….”
“뭘 그리 한숨이 깊어.”
나도 모르게 새어나온 한숨 소리에 이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준혁이 형님이었다.
“아, 형님. 오셨습니까.”
“날씨 쌀쌀한데 왜 밖에 나와 있어?”
뒤쪽에는 윤대명 매니저도 같이 있었다. 스케줄을 하고 오는 길이라서 오늘은 동행한 모양이었다.
“안에 혼자 있으려니 답답해서요.”
“아직 아무도 안 왔나 보네.”
“다들 시간 맞춰서 오신다고는 했습니다.”
약속 시간에 맞추자면 준혁이 형님도 다소 이르게 도착한 거였다.
준혁이 형님은 윤대명 매니저를 돌려보내고 나와 같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오늘처럼 중요한 자리에.”
“요새 경연 프로그램 관련 기사들이 떠도 좋은 소리가 없어서요. 열심히 하자 해도 힘도 좀 빠지고 그렇습니다.”
준혁이 형님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뭐, 밀고 나가야지. 별수 있겠어.”
“그건 그렇지만요.”
방송 하나 만드는 데 참 신경 쓸 일이 많다. 새삼 남의 돈 받아먹고 사는 게 쉽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준혁이 형님을 자리에 앉히고 나도 그 옆에 앉았다.
이왕 둘만 있으니 방송에 관해 이야기를 좀 나누고 있는데,
“아직 다들 안 오셨나 보네.”
문을 열고 서인하 국장이 들어왔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의 뒤를 따라 왕이범 이사도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이사님.”
“그래, 강 PD. 내 자리는 어디지?”
그는 내게 시선을 주는 듯 아닌 듯 쳐다보고서 물었다.
나는 안쪽 자리로 그를 안내하고, 서인하 국장도 그 옆에 자리하게 했다.
“류 배우님.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니 참 새삼스럽네요. 이쪽은 저희 NBS 왕이범 이사님이십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국장님도 오랜만에 뵙습니다.”
물을 따르는 사이 준혁이 형님과 두 분이 인사를 나누었다. 왕이범 이사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다들 아는 얼굴이다 보니 긴장은 좀 덜 되었다.
하지만 속속 사람들이 등장하자, 나는 위치상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플래티넘 대표가 비서와 함께 도착하고, 이어 금완승 감독도 나타났다.
내가 나서서 각자를 소개하고 나서, 미리 주문해 둔 코스 요리가 상에 오르면서 가벼운 분위기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좀 오래 기다렸습니다만 이렇게 성사되어서 다행입니다.”
“대표님께는 일이 지체된 것에 죄송했습니다. 한 잔 받으시죠.”
“금완승 감독님의 영화를 평소에도 즐겨 봤는데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니 참 뜻밖입니다.”
“허허허, 저야말로 제가 이런 자리에 있어서 어색합니다, 참. 살다 보니 예능 프로도 해 보게 되네요.”
이렇게 앉으니 사실상 내가 할 일은 소소하게 사람들을 챙기는 것밖에 없었다.
주요 진행은 서인하 국장의 몫이었고, 나는 서포트 역을 배정받았다.
이 자리의 긴장감이 썩 좋지는 않았는데 외려 서포트라서 만족했다.
그릇이 비며 받으러 다녀오고, 잔이 비면 술을 따르고. 흐름이 끊어지지 않게 다음 요리를 주문하고.
익숙지 않은 자리이다 보니 참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서인하 국장을 도와서 자리를 만들었다.
“이 기획을 맨 처음 생각한 것이 류 배우님이시라고요.”
그러다 왕이범 이사의 한마디로 방송 주제가 수면 위로 확 떠올랐다.
“그 말은 조금 어폐가 있습니다. 여기, 강 PD랑 같이 만든 기획이니까요.”
준혁이 형님이 나를 가리켜서, 빈 그릇을 치우다가 우뚝 굳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준…… 류 배우님이 좋은 대본이 있다고 하지 않았으면 떠올리지 못했을 겁니다.”
나는 슬그머니 금완승 감독에게로 관심을 미뤘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 류 배우가 그렇게 대본이 좋다고 극찬을 하던데, 어떤 내용인지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플래티넘 대표가 그렇게 이야기를 던져서, 금완승 감독이 허허허 웃음을 터뜨리고 나를 힐끔 보았다.
대략적인 대본의 내용은 이미 어느 정도 공유했지만, 감독의 입장에서 듣는 것은 또 다르리라.
나를 힐끔 보는 시선의 의미는 알겠지만 나는 뻔뻔하게 그릇을 치우는 행동에만 열중했다.
“어떤 이야기냐면…… 첩보요원 출신의 남자 주인공이 은퇴 후에 경기도의 한적한 시골에 정착하면서…….”
나는 몇 차례 들어서 이젠 귀에 익어버린 내용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금완승 감독의 말을 아주 진지하게 경청했다.
“듣기만 해도 재밌겠군요. 액션이 어떻게 그려질지 기대가 됩니다.”
“이거 그 역을 하려면 우리 류 배우가 몸을 잘 만들어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그래서 무술을 배우러 다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금 감독님, 좋은 데 아십니까?”
“나랑 친한 무술 감독이 하는 체육관 있어. 나중에 소개해 드리지.”
“그래서.”
가만히 듣고 있던 왕이범 이사가 물었다.
“영화 제목은 혹시 정해졌습니까? 그러고 보니 방송 제목도 아직 못 들은 것 같은데, 강 PD.”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이 자리는 단순한 식사, 인사 자리가 아니다.
말이 협력사들이지, 각자가 각자에게 얼마만큼의 투자가 가능한지를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투자사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나는 연결 고리인 거다.
“영화 제목은 아직 못 정했는데, 방송 제목은 그대로 정해졌으려나?”
“아직 가제지만 류 배우님과 상의한 제목이 있습니다.”
“오, 뭔데?”
금완승 감독이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봐서, 나는 준혁이 형님을 힐끔 봤다가 대답했다.
“<더 라이벌>입니다.”
제목이 정해지지 않아서 꽤 고민했지만, 준혁이 형님과 최종적으로 정한 가제가 이것이었다.
“<더 라이벌>이라……. 뭔가 대결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방송 콘셉트가 아무래도 배우들의 연기 대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거기다 목표 대본이 투 톱 주인공을 기본으로 하니까 괜찮은 제목이 아닐까 판단했습니다.”
물론 AGD 앱도 높은 확률로 긍정해 주었고.
“더 좋은 의견이 있으시다면 귀담아듣겠습니다.”
그렇게 덧붙이자, 다들 서로를 쳐다보았다. 눈빛으로 서로 떠밀던 중 가장 먼저 입을 뗀 것은 금완승 감독이었다.
“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걸 그냥 영화 제목에다 갖다 쓸까?”
“영화 제목에도요?”
“그래. 가제이긴 해도 괜찮게 어울릴 것 같은데.”
그가 ‘더 라이벌’이라고 몇 번 중얼거리는 듯하더니, 수첩을 꺼내 거기다 적었다.
“나도 어감이 괜찮아 보이는군.”
플래티넘 사장도 그렇게 말해 주자, 가만히 있던 왕이범 이사도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보았다.
“그래, 그럼 일단 그렇게 진행하도록 해, 강 PD.”
“예. 감사합니다.”
제목이 정해진 것만으로도 하나의 산을 넘은 듯한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들만 아니라면 준혁이 형님과 한번 잔을 부딪치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금완승 감독이 잔을 채우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희 건배도 안 했군요. 방송 제목도 정해졌겠다, 한번 거국적으로 건배라도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거 좋군요. 잔들 다들 채우시죠.”
서인하 국장이 나서서 받아들이자, 나는 즉각 일어나 빈 잔들을 채웠다.
“<더 라이벌>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짠―!
술이 들어가니 신이 나 보이는 금완승 감독의 선창과 함께 모두가 건배를 나눈 뒤,
잔이 빈 시점에 왕이범 이사가 서인하 국장에게 눈짓을 했다. 그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옆자리의 잔들을 따르면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겠군요.”
좀 전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단숨에 진지해졌다.
그리고 나로서는 처음 참여해 보는 투자 회의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