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성공할 확률 100%-109화 (109/200)

109화 몇 개월 동안

정민우가 보고를 한 것은 일요일 저녁이었다.

다들 쉬고 있을 그 시간이 된 이유는, 서인하가 일요일까지 출장이었기 때문이다.

귀국 시간에 맞춰서 공항으로 그를 마중 나간 정민우는, 만나자마자 일단 투덜댔다.

“제가 한참 딸 재롱 볼 때라는 건 알고 불러내신 거죠?”

“야, 너도 어차피 나한테 할 말 있다며. 후배 좋다는 게 뭐냐. 이럴 때 선배한테 잘 보여 두면 나중에 너도 편하고 그런 거야.”

뻔뻔하게 조수석에 오르며 안전벨트를 매는 그를 보고 정민우는 그냥 피식 웃었다.

“가신 일은 잘되셨습니까?”

“당연하지. <언더커버 싱어> 현지 방영 반응이 괜찮아서, 추가로 몇 개 더 판권 계약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본부장 자리 거절하신 것 맞죠?”

“그게 뭔 헛소리야?”

“아니, 거절하셨다는 분이, 전보다 더 바빠지신 것 같아서요. 제 착각입니까?”

사내에는 서인하가 본부장 자리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정민우는 그게 그저 소문만이 아닌 사실임을 알고 있었다.

서인하는 본부장 직함을 거절했고, 현재는 다른 후보자를 찾는 중이다.

하지만 애초에 서인하 말고는 생각한 이가 없었기에, 이사진에서 의견이 분분해 인선이 쉬이 결정되지 않고 있을 뿐.

결국 그 여파가 서인하에게까지 넘어온 것이다. 본부장 자리가 채워지질 않았으니 본부장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서인하에게까지 넘어왔던 것이다.

“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본부장을 할걸 그랬어.”

“지금이라도 받아들이시죠.”

“야, 남자가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돼.”

둘은 마주 보고 낄낄 웃었다.

정민우는 사실 맘이 좋진 않았다. 해외 출장 중에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피부도 푸석하고 수염도 안 밀었다.

피로가 얼굴에 쌓여 있는 게 보여 염려되어, 웃어도 웃긴 기분은 안 되었다.

“몸조심하세요. 국장님이 안 계시면 저희 다 힘듭니다.”

“너도 있고 다른 팀장들도 있고, 그런데 뭐가 걱정이야? 너희 믿으니까 내가 이렇게 출장도 다녀오는 거지. 나 없어도 다 잘할 거 알아.”

“너무 믿지 마세요. 국장님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믿을 거라니까.”

국장, 팀장 이전에 선후배인 두 사람이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차는 영종대교로 올라섰다.

“그런데 할 말이 뭔데?”

스마트폰으로 왕이범에게 보고할 것들을 간단히 메시지로 보낸 뒤, 서인하가 물어왔다.

괜한 긴장에 정민우는 침을 삼켰다.

“대한이가 새 기획을 가지고 왔습니다.”

“오, 초안 나왔어? 비행기에서 보게 파일로 좀 보내 주지 그랬어.”

“아뇨, 초안 전입니다. 초안 만들기도 전에 확인 좀 해 달라고 해서 봤는데, 확실히 그럴 만하더라고요.”

“천하의 강요물께서 또 무슨 기획을 가지고 왔길래 그래?”

“메일로 보내 두었는데 한번 확인해 보세요.”

조수석에 앉아 서인하는 메일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얼굴이, 점점 더 날카롭게 변해 갔다.

“……으음, 그렇네. 이거 꽤 큰일이 되겠는걸.”

“예, 맞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게 맞으면…… 그 테마로 다른 방송사에서도 성공시킨 적이 없어요.”

서인하가 얼개만 있는 기획안에서 눈을 떼 어둑해지는 하늘을 봤다가, 정민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 팀장은 어떻게 생각해. 이 기획, 대한이가 할 수 있을까?”

“제 의견을 물어보시는 거라면, 딱히 의심하고 싶진 않습니다. 잘할 거예요. 잘할 자신이 있으니 가지고 왔겠죠.”

“하긴 그렇지. 시킨 일도 잘해 내고, 시키지도 않은 일도 굳이 잘해 내는 녀석이니까.”

<언더커버 싱어>가 그랬고, <당잠사>가 그랬다.

시킨 일만 어느 정도 해내도 충분히 예뻐할 3년차 PD가, 나서서 일을 만들더니 이젠 그것도 모자라 더 큰 일도 벌이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인하가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사이즈가 너무 커지겠는데. 우리 방송사만이 아니라 다른 제작사도 끼어야 하는 거잖아.”

“예. 기획사도요.”

그 사이에서 강대한이 제대로 기준을 가지고 컨트롤을 할 수 있을까.

믿음은 있지만, 막상 정민우 정도 되는 10년차 짬밥도 쉬이 장담할 수는 없는 기획이었다.

“이걸 대한이가 먼저 저쪽에다가 제안한 건가?”

“거기까지는 못 들었습니다. 아마 저한테 도움을 요청한 건, 본격적인 제작이 들어가기 전에 사이즈를 재어 달라는 의미겠죠. 그걸로 봐서는 대한이가 제안한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단 질러 본 걸 수도 있지. 그놈 일단 지르고 보는 덴 선수잖아.”

그 몇 번의 지름에 당한 전적이 있는 두 사람이 같은 의미를 담은 웃음을 터뜨렸다.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두 PD가, 자신보다 한참 젊은 PD의 기획에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다니.

서인하는 스마트폰을 도로 집어넣고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어 봤자 의미는 없을 것 같은데? 정 팀장이 함께 미팅 잡아서 만나 봐. 새로운 도전이고 큰일이 되겠지만, 버리기는 아까운 아이템이니까.”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럼 약속 잡고, 만나서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기나긴 영종대교를 빠져나갈 즈음에, 강대한이 모르는 곳에서 새 기획은 첫발을 내디디고 있었다.

* * *

정민우 팀장이 일요일 저녁에 연락을 주었다. 우선 미팅을 잡아 자신도 함께 나가자고.

그 의견에 따라서 저쪽에 의사를 물어보자, 다행히도 월요일 오후에 시간이 괜찮다 하였다.

그렇게 오늘 월요일.

나는 정민우 팀장과 함께 플래티넘에 방문했다.

“……강 PD에게서 이야기를 듣고서, 솔직히 놀랐습니다.”

정민우 팀장의 인사말에, 준혁이 형님은 웃었다.

“어떤 면에서 놀라신 건지 혹시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배우를 키워 보고 싶다는 꿈이 있으셨다는 걸 몰랐으니까요. 아,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면을 봐서 놀랐다는 의미였습니다.”

둘은 얼굴 보고 인사를 한 적이 많이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 간에 예의를 지키고 딱딱한 문답이 이어졌다.

“모르시는 건 당연하죠. 이 이야기한 게…… 대한이를 포함해서 손에 꼽거든요. 회사에서도 몇 명밖에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플래티넘 대표, 송일현 팀장, 그리고 준혁이 형님의 매니저 정도이려나.

“그 몇 명 모르는 이야기를 저희 강 PD가 알고 있다는 거군요.”

“플래티넘과 계약할 때부터 대한이에게는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사실 대한이가 아니었다면, 저도 이런 생각은 전혀 꿈도 못 꿨을 겁니다.”

“그렇죠. 저희도 그럴 겁니다.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니.”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 이야기가 처음 나온 건, 준혁이 형님을 <언더커버 싱어> MC로서 캐스팅할 당시의 일이었다.

의외로 간단하게 MC 제안을 받아들여 준 준혁이 형님은, 통화 끝에 이러한 질문을 해 왔다.

“플래티넘 계약한 이후로 나 정말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일해 왔다고 생각하는데, 대한이 네가 보기엔 어떠냐.”

“형님 소처럼 일하셨잖아요. 영화, 드라마, CF 등등 계속 나와서 소준혁이라는 별명도 붙으셨으니, 말 다 했죠.”

“그렇게 말해 주니 다행이다. 그래, 그래서 나도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걸 한번 해 보려고.”

“하고 싶은 거요?”

“전에 이야기 한번 했었지? 내가 아카데미를 세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예, 기억하죠. 배우 양성을 하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플래티넘과 계약한 것도 그에 대해 협조하겠다고 해서였고.”

“그래, 그거. 내가 지금 그 아카데미에 관련해서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하나 있거든. 나중에,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좀 도와줄 수 있을까?”

“도움요?”

“그래. 아마 네가 많이 도와줘야 할 거야.”

<언더커버 싱어> MC도 받아들여 준 마당에 내가 거절할 명분도, 실리도, 이유도 없었다.

“당연하죠. 형님께서 불러주신다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계획 어느 정도 정리되는 대로 한 번 더 이야기할게.”

그 이후로는 <언더커버 싱어>가 진행되는 동안 간간이 그 약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본격적으로 방향이 설정된 것은, 현준영의 투표 조작 스캔들이 터진 다음이었다.

우리 방송에 뭔가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닐지 준혁이 형님이 전화로 확인을 해 왔었다.

“걱정 마세요. 오히려 내부에서는 잘됐다고 하는 중입니다. 4차 경연도 실수 없이 진행될 예정이에요.”

“그렇다면 되었고. 참, 현 PD님도. 없어도 오히려 잘됐다는 소리 듣는 걸 보면 문제가 많은 사람이구나.”

주변에 현준영에 대한 비판이 그 정도로 그치는 사람은 처음이라 차라리 신선한 감각이었다.

“그건 그렇고…… 전에 내가 한 이야기 말이야.”

“예. 배우 아카데미 관련 말이죠.”

“응. 플래티넘 사장님이랑도 이야기해 봤는데, 아무래도 아카데미를 당장 시작하기에는 회사 내 배우 풀이 그렇게 만족스럽진 못해서 말이야.”

대배우 류준혁이 계약한 이후로, 그 네임벨류로 플래티넘에 소속 배우가 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돌 기획사라는 간판을 다 버린 것은 아니라서, 여러 가지 현실적으로 부족함이 많다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일단 아카데미를 당장에 시작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고, 주변에 물어보면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고 있어.”

“배우 풀이…… 결국 아카데미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인력이 문제인 걸까요?”

“아무래도 그렇지. 지금도 회사 차원에서 오디션은 진행하고 있는데 아주 잘 돌아가진 않아.”

소속 배우임에도 회사에 대해 아주 냉철하게 파악하고 있다. 이 점이 사실 그를 롱런하게 해 준 비법일 것이다.

<언더커버 싱어> 제작으로 내 머리가 바쁘긴 해도, 나는 그사이에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형님, 이런 건 어떨까요. 배우 오디션 프로그램을 하나 만드는 겁니다.”

“오디션 프로그램?”

“네. 가령…… 음, 드라마나 영화 같은, 그런 조연 자리 하나를 두고 경쟁을 펼치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만들고, 특정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배우들을 대상으로 공모를 받으면 어떨까요.”

“기획사 계약 주체는 플래티넘이 되는 거고?”

“캐스팅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명 배우들은 이름을 알릴 기회가 될 거고, 플래티넘 입장에서는 싹이 보이는 배우들을 영입할 기회가 될 거고요.”

“나는 그 배우 풀로 아카데미를 만들 수 있다…… 는 거로구나.”

“예. 일석삼조입니다.”

급작스럽게 떠오른 아이디어였지만 나쁘진 않아 보였다.

옛날에는 방송사마다 공채 배우라는 것도 존재했다. 기획사들도 매달 오디션을 통해 배우, 가수 등의 인재를 뽑는다.

가수 오디션이 많은데, 배우 오디션이 없으리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갑자기 떠올린 거라 구멍이 좀 많습니다.”

“아냐, 충분해. 괜찮아 보여. 그렇구나, 방송이니까 그런 방법도 있겠군…….”

“형님도 저한테 이야기하신 건 이런 방송을 만들려고 하신 거 아닌가요?”

“난 오디션이 아니었지. 그냥…… 뭐랄까, 아카데미를 만드는 과정의 기록? 정도만 떠올렸을 뿐이야.”

그것도 관찰 예능이라면 예능일 수 있겠지만, 나는 보이지 않게 고개만 저었다.

“알았어. 그럼 나도 한번 주변에 타진해 보면서 짜 볼게. 이런 기획은 처음 해 보니까 잘될지 모르겠지만.”

“디테일한 것은 계속 이야기 나누도록 하죠.”

“그래, 그러자. 서로 여유가 생기면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그래서 내가 <언더커버 싱어>가 끝나고, <당잠사>로 또 준혁이 형님에게 부탁하는 일이 생기고, 그러는 와중에도 우리의 논의는 계속 이어졌다.

디테일한 진전이 일어난 것은 <당잠사> 시즌5의 베트남 촬영 중이었다.

효명이, 백종현까지 넷이서 맥주 한 잔을 걸쳤던 날, 자리를 정리하면서 효명이와 백종현이 쓰레기를 버리러 먼저 로비를 떠났다.

그사이 준혁이 형님이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괜찮은 영화 하나가 있어. 거기 제작사랑 친해서 대본을 먼저 받았거든. 남자 주연 투톱인 처절한 액션물이야. 액션이야 찍어 봐야 알지만, 대본이 괜찮아서 그걸 해 보려고 해.”

“액션 연습 또 하셔야겠네요.”

“그래야지. 그 영화의, 내 상대역을 한번 목표점으로 잡아 보면 어떨까.”

나는 행동을 멈추고 그를 보아야 했다.

“형님 말씀대로라면…… 더블 주연 아니에요?”

“그 정도 비중이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뽑힌 배우라면, 어쨌든 신인이거나 무명 배우일 텐데…… 그게 될까요?”

“그쪽 제작사엔 한번 툭 던져 봤는데, 연기력만 된다면야 신인도 상관없다고 그러더라고. 오디션 프로그램만 잘되면 화제성도 생길 거고, 나쁘지 않지 않을까?”

준혁이 형님이 고른 대본이라면 퀄리티는 괜찮을 거고, 더블 주연에 가까운 비중의 역이라면 오디션 프로그램의 목표점으로도 괜찮아 보였다.

“거기 제작사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가능하다면 감독이라거나 그런 정보도요.”

“음, 아직 감독은 확정이 안 되었는데…… 알려 줄 수 있는 만큼은 알려 줄게.”

그렇게 또 한 번 우리의 기획은 진전이 생겼고, <당잠사> 시즌5와 <달리는 도시인>이 진행되는 동안 조금씩 더 틀을 갖추어 나갔다.

* * *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 지금.

어느 정도 갖추어진 틀만으로도 내가 다룰 수 있는 스케일일까 의심이 되어서 나는 정민우 팀장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와 이렇게 플래티넘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초안도 아닌, 아이템 수준의 기획안.

제목조차 정해지지 않은 기획안을 두고, 정민우 팀장도 고민이 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 PD한테는 이미 이야기했습니다만, 저희 방송사로서도 이렇게 외부 제작사와 조인하는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아마 확인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거예요.”

“네, 당연한 고민이실 것 같습니다.”

“영화 제작사뿐만이 아니라 플래티넘까지 끼어 있으니…… 그 회사들의 대략적인 구두 동의 정도라도 있어야, 아마 위로 보고를 올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민우 팀장의 다소 딱딱한 말에, 분위기가 다소 어두워지는 듯했다.

나는 정민우 팀장과 준혁이 형님을 번갈아 보며 보이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달에 걸쳐 조금씩 진행되어 온 기획이라서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정민우 팀장의 반응도 썩 좋은 것은 아니라서, 그것만으로도 약간의 좌절감이 느껴졌다.

아예 부정적인 판단은 또 아니라는 게 더욱 그랬다.

분명히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되는데. 도전해 볼 만한 프로그램이라고 여겨지는데.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사용자님의 변화한 미래 예정 패턴에 대한 분석이 완료되었습니다.]

나만 보이는 시야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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