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뜨거운 여름이 가고
B22
“벌써 말했다고?”
금요일이 되어서 드디어 회사에서 만난 민희와 점심을 먹으러 가, 김유미 팀장과의 만남에 대한 보고를 했다.
본인이 빨리 정리하라고 해 놓고선, 기대보다 더 빨랐는지 민희는 오히려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빨리 정리하라며. 뒤로 끌 일도 아니니까 빨리 만났지 뭐.”
“아니,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한참 파스타를 뒤적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어.”
민희가 그렇게 말한 이후로, 우린 마치 금지어처럼 김유미 팀장 이야기를 삼갔다.
그렇게 보고를 마치고, 점심을 다 먹고 나오는 길에 카페에 들렀다.
음료를 주문한 뒤에 민희에게 물었다.
“<당잠사> 시즌6 제작 본격적으로 들어간다고 했지?”
“응. 나도 그래서 다음 주까지는 지원 나갔던 일 정리하고 합류할 예정이야.”
<당잠사>는 나도 빠지고, 박주영 선배도 빠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전혀 아니었다.
아예 1팀 체제로 바뀌어서, 권민헌 선배 밑의 PD들과 새로운 체제가 짜였다.
작가들이야 기존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여서 PD들의 교체가 좀 일어난 수준에 불과했다.
내가 없어도, 박주영 선배가 없어도 권민헌 선배는 괜찮다고 장담했었고 우리도 그것을 의심하진 않았다.
“나나 박 선배 없는 몫까지 잘 도와드려. 힘든 거 있으면 말하고.”
“오, 그건 좀 든든하네.”
커피는 든 그녀가 장난스레 내 가슴을 툭 치길래 과장스럽게 가슴을 가렸다.
“이 여자가. 남자 가슴 함부로 만지고 그러는 거 아냐.”
“뭐 어때. 나 말고 그럼 누구한테 만지게 하려고. 이리 와 봐.”
“이러지 마시죠!”
우리 모습을 박주영 선배가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객관적인 시선을 보내는 내 안의 양심을 무시하고, 오랜만에 생긴 여자친구와 꺅꺅댔다.
그러고 점심시간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올라가는데, 민희가 갑자기 물어 왔다.
“아, 그러고 보니 어떻게 할 거야? 슬슬 박 PD님한테 말씀드려야 하는 거 아냐?”
그녀가 묻는 말이 뭔지는 뻔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서, 그간 가지고 있던 고민을 그녀한테 털어놨었기 때문이다.
내가 기획 중이던 프로그램에 관해서.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사무실 층에 도착했다.
커피를 쪼옥 빨고서 나는 슬쩍 팀 사무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음…… 뭐, 말을 꺼내긴 해야지.”
“건투를 빌어 줄게.”
민희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 * *
<달리는 도시인>의 재방영이 시작된 지 5주차.
『“여러분, 그럼 다음 주에 또 봐요~”』
화면 안에서 8명의 패널이 손을 흔들고, 곧바로 예고편이 나갔다.
다음 주부터는 2주 구성으로 편성된, 이번 주에 촬영된 분량이 나갈 것이다.
아주 빡세게 기획해서 준비한 것으로, 외곽순환고속도로로 수도권을 한 바퀴 돌면서 추격전을 펼치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관련 허가를 받느라고 나도, 박주영 선배도 몇 번이나 경기도청과 통화를 주고받았던지.
오죽하면 민희보다 연락을 많이 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오케이. 예고편까지 사고 없이 나갔네. 시청률은?”
주문한 짜장면을 비비면서 박주영 선배가 물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조작해 데이터를 확인했다.
“3.9%…… 마지막 시청률이 그렇네요. 평균으로는 4% 나오겠는데요?”
방송이 나가는 중에 실시간으로 시청률을 확인하고 있었다.
시종 4% 내외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는데, 미션 결과를 확인하는 막판에는 4.5%까지 찍었다.
“다음 주, 다다음 주까지 하면 5%도 넘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작가 중 한 명이 그렇게 이야기해서 우리는 무언의 긍정을 보냈다.
AGD 앱이 없이 여기까지 만들어 낸 내가 스스로 대견했다.
물론 내가 기여한 부분은 일부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대견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동시에.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선배, 밥 드시고 잠깐 이야기 좀.”
“왜.”
“드시고 말씀하시죠. 볼에 다 묻었습니다.”
짜장면을 단번에 가득 씹어 삼켰던 선배의 입 주변이 시커멨다.
나는 인상을 찡그려 주고 티슈를 뽑아 주었다.
나도 먹던 볶음밥을 부리나케 먹어치우고, 선배와 이야기 좀 하고 오겠다고 하고 같이 사무실을 나왔다.
의식적으로 흡연 구역을 향해 걷던 중에 정민우 팀장을 만났다.
토요일인데도 이놈의 방송사는 팀장 팀원 할 것 없이 무척이나 당연히 출근하게 만든다는 게 또 한 번 가슴에 와 닿았다.
“담배 피우러 가냐?”
“예. 같이 가실래요?”
“됐어. 아, 내려가는 김에 내 커피나 좀 사 와라, 그럼.”
카드를 우리에게 넘겨주면서 ‘너희도 사 먹고. 비싼 거 먹으면 죽는다’라고 덧붙인다. 당연히 거부하지 않았다.
1층으로 가 주차장 구석의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담뱃불을 붙이면서, 박주영 선배가 태연하게 물었다.
“헤어졌냐?”
“……사귄 지 얼마다 됐다고 벌써 그럽니까. 아닙니다.”
“그럼 뭔데, <도시인> 그만두겠다고?”
“귀신이시네요. 촉새는 제가 아니고 선배 아니에요?”
“이런 자잘한 일에만 촉이 좋아서 문제지. 그러니까 강촉새한테는 아직 안 되는 거야.”
담배 연기를 후욱 뿜어내면서, 마치 연기가 쓴 듯 인상을 찌푸렸다.
“뭐, 슬슬 그런 말 하지 않을까 했다. 시청률은 이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것 같고, 패널이나 제작진들 호흡도 괜찮고. 이만하면 네가 서브로서 해 줄 건 충분히 다 해 준 것 같아.”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싫은 건 싫은 거지.”
툭 내뱉는 말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진다.
“너 가면 난 누구랑 밥 먹고 술 마시냐.”
“에이, 뭐 제가 어디 가는 것도 아니고, 같은 회사에서 밥이나 술은 앞으로도 마실 수 있죠. <도시인> 팀에 다른 PD들도 많고요.”
“그건 그렇지만, 너만큼 편하진 않지.”
박주영 선배의 말이 무척이나 감사했다. 그동안 나에게 많이 의지하고 믿고 있었다는 감정이 전해졌다.
안 그래도 <도시인> 제작에 있어서 박주영 선배는 유독 나를 많이 찾았다. 우린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눈 일이 많았다.
그런 만큼 단순히 먹을 것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선배가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캐릭터가 아니다 보니 얼굴이 간질거렸다.
“저도 아쉽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는 미뤄 둘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그래, 원래 하려던 기획 말이지? 좀 물어보자. 어떤 거냐.”
반사적으로 대답하려 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통과될지 안 될지도 모르고, 제가 먼저 밝힐 수는 없는 내용이라서 나중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니, 대체 누구랑 뭘 하려고 그러기에 이렇게 비싸게 굴어?”
“죄송합니다.”
웃으며 대답하는 나에게, 박주영 선배는 혀를 차고는 정민우 팀장의 카드를 넘겨주었다.
“팀장님한테는 커피 사서 올라가면서 네가 직접 말해. 내 것도 같이 주문해 두고. 나는 한 대 더 피우고 올라갈게.”
“예.”
그동안 감사했다고 인사말을 말을 해야 할까 하고 잠깐 망설였지만, 어차피 다시 못 볼 사이도 아니고, 안 볼 것도 아니기에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하나는 곧 가지러 올 거라고 가게에 두고, 정민우 팀장 것을 들고 위로 올라갔다.
5팀 사무실에 있던 정민우 팀장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서자, 그가 돌아가지 않는 나를 이상해하는 눈으로 올려다봤다.
“할 말 있어? <도시인>에 사고 난 거 아니지?”
“아닙니다. 다 순조롭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오늘 거 시청률도 좋아 보이던데. 그럼 뭔데?”
“사고는 아닙니다만, 새 서브를 구해 주십시오.”
커피를 쥔 그의 눈빛에 힘이 들어갔다.
“너희들 싸웠어?”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런 약속이었습니다. 자리 잡을 때까지만 서브를 하는 걸로요. 이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제가 원래 하고 싶은 기획으로 가도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 박 PD는 뭐래.”
“예상하고 있었는지 알겠다고 했습니다. 정 팀장님에게 실력 좋은 서브로 구해 달라고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서브라…….”
커피를 마시지도 않고 정민우 팀장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박 PD한테 강 PD만큼 딱 맞는 서브가 또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찾아봐야겠지.”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가 고개를 선선히 주억댔다.
“알았어. 일단 그렇게 진행할 테니, 다른 서브가 구해질 때까진 계속 해. 그사이에 기획안 만들어오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도 내가 계속 앞에 서 있자, 정민우 팀장이 물었다.
“왜, 기획 뭐 준비된 거 있어?”
“네.”
나는 잠시 폰을 꺼내, 내 개인 드라이브에서 기획안을 다운받아 정민우 팀장에게 보냈다.
“뭔데.”
“우선 팀장님께 말씀을 드리고, 그러고 나서 초안을 빼야 할 것 같아서요. 스케치 정도지만 확인 좀 해 주십시오.”
“응? 대체 무슨 기획을 하려고 그러기에 이렇게 거창하냐. 전부터 말도 안 해 주더니.”
<달리는 도시인> 팀의 서브 PD를 하는 사이, 아니 그전부터 기획을 계속 구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 혼자만이 아니라 정민우 팀장의 힘이 필요한 시점이 왔기에, 그에게는 밝히고자 한 것이다.
“일단 보내 드린 것 봐주십시오. 저는 박주영 선배 부르러 가겠습니다.”
“그래. 저쪽 회의실 비었으니까 저리로 오라고 해.”
사무실로 내려가자 박주영 선배가 이미 와 있었다.
“정 팀장님이 오시랍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팀 사무실을 나가는 그의 뒤를 보고 있자니, 우리 팀 막내 작가가 와서 조심스레 물었다.
“박 PD님한테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선배한테 말고…… 아마 우리 팀에 일이 있을 겁니다. 큰일은 아니고, 어차피 선배가 내려오면 알려 줄 테니까 그때까지만 참아요.”
다른 팀원들을 보면서도 말하자, 그들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나는 답변을 돌려주지 않고 내 자리에 앉아서 남은 일을 처리했다.
박주영 선배가 돌아온 것은 10분 정도 지나서였다.
“대한이가 우리 팀 때려치우고 나갈 거야.”
“예?”
“뭐라고요?”
“강 PD님이요?”
PD, 작가 할 것 없이 모두가 놀랐다. 박주영 선배와 나 사이에 있던 약속을 모르니 놀랄 만도 했다.
박주영 선배가 나를 지그시 쳐다봐서, 나는 관련 설명을 간단히 해 주었다.
“그렇다고 해도…… 더 해 주시면 안 돼요?”
“저희 아직 기획 여러 개 남았잖아요.”
“이렇게 가시면 안 돼요.”
모두가 아쉬움을 토로해 주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내 빈자리를 염려한다는 것이고, 그만큼 내가 이 팀에서 괜찮게 역할을 수행해 냈다는 것이니까.
나도 아쉽긴 했다. 주말 레귤러 예능을 소화해 낸다는 것이 어떤 건지 참 많이 배웠으니까.
그렇지만.
“여러분께는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동안 제가 속 썩인 것도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해 줘서 거듭 고맙습니다. 그래도 뭐, 오가며 안 볼 것도 아니고. 다음에 보면 반갑게 인사하죠, 우리.”
솔직하게 그렇게 인사하자, 모두가 아쉬워하면서도 마지못해 받아 주었다.
결국 그날, 우리는 의도치 않게 회식을 가졌다. 후임이 정해질 때까지는 계속 일한다는데도 막무가내들이었다.
“하시는 프로그램 다 잘되세요!”
“뭐 요물 PD님이시니까 걱정은 안 하지만!”
“강요물 PD님을 위하여! 건배!”
“건배!”
목소리를 높이는 팀원들 탓에 기분마저 묘해졌다. 이 사람들, 나를 빨리 쫓아내고 싶은 건가.
나는 내 헛생각에 피식 웃으면서 함께 잔을 마주쳤다.
회식 자리가 끝나갈 즈음, 정민우 팀장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정민우팀장: 이건 내 선에서도 생각 좀 해봐야겠어]
[정민우팀장: 주말 동안 정리해 올 테니까 월요일에 이야기하자]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그러한 진행 상황을 공유하기 위해 다른 톡방을 열었다.
[월요일에 연락이 갈 것 같아요.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요.]
한참 뒤 돌아온 답장을 확인하고서, 나는 한밤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뜨끈한 습기를 담은 밤공기.
한여름을 보냈던 <달리는 도시인> 팀에서의 생활이 끝나가고, 그보다 더 뜨거운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