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누군가의 파국
“업체를 다시 바꾸자고 했습니다. 분명 원래 업체에 무슨 수를 써 놓은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당장에 표정이 굳었다.
“현준영 이 인간…… 진짜 갈 때까지 간 건가.”
정민우 팀장이 분통을 터뜨렸다.
서인하 국장도 심각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반응을 살피며 나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말하는 투로 봐서는, <스프K> 투표 조작 증거를 가진 사람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뭐라고?”
“그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서부터는 AGD 앱에서 본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를 뼛속까지 믿어 줄 두 분을 속이는 게 죄송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들 모르게 눈을 한번 질끈 감고서 거짓말을 이어 나갔다.
“예. 증거는 모두 폐기하기로 결정하고 처리했다는 것 같은데, 아직까지 그 증거를 쥐고 있는 사람이 있는 모양입니다.”
“현준영이 그런 이야기까지 했다고?”
확실히 현준영이 그럴 타입은 아니긴 하다. 나는 부연 설명을 했다.
“그렇긴 한데…… 술이 좀 들어간 데다 제가 업체 관련으로 완강히 거절하자, 저를 꼬드겼거든요. 조작을 같이 하자고. 제가 당연히 합류할 거라 생각했는지 안전하다면서 과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상태에서 좀 더 추궁하다 보니 실수를 하더라고요. 말이 꼬여서 뱉은 것 같은데 막상 말하고 후회하는 것 같았습니다.”
뜻한 대로 말이 술술 나오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게 혓바닥이 길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 둘은 믿는 눈치였다.
“그래…… 만약 그 말이 정말이라면, 지금이라도 정의를 구현해야지.”
서인하 국장이 굳은 얼굴로 이야기했다.
정민우 팀장이 뜨악해서 그를 쳐다봤다.
“국장님, 지금은 때가 영 좋지 않습니다……. 현 팀장이 지금 <언더커버 싱어>에 관여하고 있어서, 프로그램도 같이 피해를 입을 겁니다.”
그러면서 정민우 팀장은 나를 한번 쓱 돌아봤다.
“최악의 상황에는 대한이가 타격을 입을 수도 있고요.”
“아니야. 현준영은 아직 스태프롤에 올라가지 않았잖아?”
역시 짬바는 다르다. 서인하 국장도 AGD 앱을 보는 건 아닌가 잠깐 곱씹어 봐야 할 만큼 정확한 상황 판단이었다.
“스태프롤에만 없으면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어. 아니, 외려 이 건으로 현 팀장을 내보낼 수도 있고.”
과거의 투표 조작이 사실로 밝혀지기만 하더라도 현준영의 자리가 날아갈 건 뻔한 일이었다.
아무리 신호현 이사여도 도리가 없을 터.
주제넘지만 내가 생각해도 서인하 국장의 판단은 정확해 보였다.
하지만, 정민우 팀장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강 PD, 너는 어때. 지금 네 팀에 지원 나가 있는 사람이야. 이 사실이 만약 진실로 밝혀지면 어떨 것 같아?”
선뜻 대답할 수는 없었다. 민희와 박주영 선배, 오지환 PD, 구은경, 도채린 작가까지, 함께 방송을 만들고 있는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상황이 최악으로 흐른다면 나 혼자만의 문제일 수가 없다.
비록 회사 밖까지 팀 전체가 들먹일 일은 없을 수도 있지만, 회사 내에서 우리 팀 전체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확신할 수 있다.
AGD 앱이 제시한 대로, 증거 발표 상황만 앞당긴다면 나는 내 팀을 지킬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역겨운 걸 놔둘 수는 없다.
방송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그딴 짓을 하는 사람을 내 팀이 다칠 거라고 쉬쉬하는 게 맞는 판단일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잘못된 걸 바로잡는 게 먼저일 것 같습니다.”
나는 소신을 담아 답했고, 정민우 팀장은 잠자코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고개를 주억거리기도 했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상황을 앞당기려면 오늘 안에 마무리 지어야 한다. 당장 내일이면 방송을 터는 날이고, 그다음 주부터는 스태프롤에 현준영의 이름이 담긴다.
나는 갑자기 떠오른 척 화제를 돌리며, 문제의 이름을 거론하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서 잊었는데 증거를 가진 사람의 이름을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듣진 못했는데, 주혜진? 주진혜?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제발 그 이름이 이들의 범위 안에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한 번 더 거짓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주진혜?”
그런데, 서인하 국장의 표정이 일변했다.
“아시는 분입니까?”
“아니, 그게…… 허어, 그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무슨……?”
정민우 팀장도 듣지 못한 일인 건지 되물었다. 서인하 국장이 그를 보았다.
“갑자기 투표 업체를 바꾸자고 하니 나한테 무슨 뾰족한 수가 있나? 옛날에 알던 인맥 수소문해서 업체 좀 알아보는 수밖에.”
궁금증이 더욱 커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스프K> 때 업체 이야기도 들었지. 그 업체는 이미 폐업했고 그때 있던 직원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몇몇은 다른 업체에 취직한 모양인데, 그 이름 중에 주진혜라는 이름이 있었어.”
번개처럼 떠오른 생각이 맞았다. 주진혜는 투표 업체 직원이었던 모양이다.
“주진혜, 그때 당시 말단 직원이었어. 그것도 경리 직원. 그래서 조사를 제대로 받지도 않았고, 이후에 그 누구보다 빨리 회사를 그만뒀지.”
서인하 국장은 자신의 스마트폰을 뒤져서, 아는 사람에게서 받은 메시지를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그 업체에서 일했던 몇 명의 직원들의 이력, 그리고 현재 거취가 나와 있었다.
메시지를 확인하고서,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주진혜
슈프림 엔터테인먼트 경영지원실 과장』
* * *
“……그래서?”
강대한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현준영은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움직였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강남의 한 고급 아파트 단지 내에 도착했고, 지금 현준영은 장년의 남자를 눈앞에 두고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네가 그 팀에만 들어갈 수 있으면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해서 지원으로 보낸 거야. 그런데 지금 나한테 와서, 그 애송이 PD 하나 어떻게 못 해서 다 틀어졌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가?”
단지의 입구를 통과하여 주차장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서 얼굴을 마주한 신호현 이사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다 틀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아직 기회는 남아 있어요.”
“이봐, 현준영이.”
아무도 없는 주차장.
아파트 주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인 데다 늦은 시각이어서인지 다니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이곳에 현준영이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빈번하게 들락거려 경비원이 얼굴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대한과 헤어진 후, 일이 틀어졌음을 깨닫고 곧바로 신호현을 찾아온 현준영으로선, 적어도 오늘만은 사람이 없다는 게 감사한 일이었다.
신호현에게 욕을 먹어도 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나도 자네가 마음에 들어. 나하고 마음도 잘 맞고, 잘 움직여 주기도 하고. 이런 사람을 다시 만나긴 힘들겠지. 나도 알아.”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 믿고 날뛰어선 안 되는 거야.”
고개를 조아리던 현준영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자네가 할 일은 하나였지. 그 팀으로 가서, 보우건이라고 하는 놈이 우승하게 만드는 것. 우승만 시킨다면 하이지에서도 큰 보상이 있을 거라고 약속을 했네. 자네는 반드시 우승시키겠다고 했고.”
“……그렇습니다.”
“어차피 과거에도 해 본 일이라고 장담한 건 자네였어. 프로그램 하나 말아먹은 자네가 빳빳이 고갤 들고 호언장담하게끔 한 게 누구 덕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신호현 이사가 뒷짐을 지자,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서도 위엄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나타나서, 또 내 힘을 빌려달라 이건가?”
신호현의 눈빛을 보고, 현준영은 다시 얼어붙었다.
“이렇게 무능력한 줄 알았으면 애초에 데리고 오지도 않았지.”
“…….”
할 말이 없었다. 아니, 숨이 턱 막혀서 말도 못 꺼낼 지경이었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붙들고 있던 라인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아직 끝을 겨우 잡았을 뿐인데…….
“아, 아닙니다. 죄송, 죄송합니다. 제, 제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현준영은 그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그래서 빌고 사정했다.
“그래, 믿어도 되겠지?”
돌아온 대답에 현준영은 그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잘해 봐. 기대하고 있을 테니.”
현준영의 어깨를 두들겨 준 신 이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현준영은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직 괜찮아…….”
완전히 내쳐진 것은 아니다. 그동안 알아온 신호현에게 아직 그 정도 믿음은 있었다.
문득 강대한의 재수 없는 면상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중요한 건 앞으로의 대책.
다른 수를 찾아야 한다.
그런 마음을 분명히 새기며 현준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현준영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데서 파국을 맞이해야 할 운명임을.
* * *
나는 주진혜의 회사가 슈프림 엔터테인먼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건 뭐, 소설도 이렇게 기막힌 우연으로 엮이진 않을 것 같은데…… 참, 어떻게 이런 일이.
머리로 스치는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온이 현준영을 처음 대면한 날, <스프K> 이야기를 꺼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것도 관련이 있나 하는 추측을 했다. 다만 지금 거기까지 생각을 하기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지금 할 일은 하나였다. 남만덕 매니저에게 연락하는 것.
늦은 밤중인데도 남만덕 매니저와는 어렵지 않게 통화할 수 있었다. 아온의 경연 연습으로 인해 연습실에서 대기 중이었다고 했다.
나는 어려운 부탁이라고 말하며, 그에게 아무런 이유도 묻지 말라고 당부하며 주진혜 씨의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확보한 주진혜의 연락처.
이제 문제는 어떻게 접촉하느냐였다.
그런데 고민을 해결해 주겠다고 자청하는 이가 있었다.
“연락은 내가 할게.”
서인하 국장이었다.
“국장님이 직접 말입니까?”
“강 PD. 더 나섰다간 다른 의미로 이름이 퍼질 거야. 네 팀 일이 아니라 예능국 자체의 일이니, 국장이 나서는 게 맞아.”
서인하 국장이 다른 상사들과 다른 점은, 직접 나서길 꺼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작부장이던 시절이든 지금이든 그 자세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 강 PD. 내일 6화 방송인데 아직 편집 다 못 끝냈잖아. 가서 일단 일부터 해. 여기서부턴 우리한테 맡기고.”
“하지만…….”
“주제넘게 굴지 말고. 알았지?”
짐짓 으름장 놓듯이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이 뻔히 보였다.
난 더 뭐라고 반론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 인사만 남기고 국장실을 나섰다.
팀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내려와 사무실 쪽으로 걷는데,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닫힌 문틈으로 빛이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하기야 내일이 당장 방송하는 날인데 다들 퇴근은 꿈도 못 꾸고 있을 거다.
다른 사무실도 띄엄띄엄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이렇게 밤늦게까지, 방송 하나 만들겠다고 매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현준영이란 작자는.
기분이 급작스레 불쾌해지고 무거워졌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자, 작가진들이 뭔가를 이야기하다가 내 쪽을 돌아봤다.
“어, 퇴근 안 하셨어요, PD님?”
“안녕하세요.”
“아, 예. 뭐, 어쩌다 보니. 고생 많으시네요.”
구은경 작가와 도채린 작가와 인사를 나누고 있자니, 현준영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민희가 질문을 해 왔다.
“벌써 왔어? 어떻게 됐어?”
“선배는? 지환 씨랑 편집 중이지?”
“응. 부를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 앉자, 민희가 서둘러 단톡방으로 둘을 호출했다.
5분 정도 지나자, 박주영 선배와 오지환이 문을 벌컥 열고 돌아왔다.
“뭐야, 왜 이렇게 빨리 끝났어? 아니면 그냥 다 집어치우고 온 거야? 그놈이 뭐래?”
이야, 이 선배. 박력 좀 보소.
나는 그들을 일단 자리에 앉히고 일어섰다.
막상 일어나고 보니 어디서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많이 고민이 됐다.
하지만 한배를 탄 사람들이다. 역시 이 사람들에게 사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처음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우리 추측대로, 현 팀장은 보우건을 우승시키려고 했습니다. 여러 수작을 부리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시청자 투표 조작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외부 업체랑 이미 입을 맞춰 둔 상태였고요. 하지만 업체를 우리 쪽에서 바꿨고…….”
투표 업체 교체 건과 함께, 나는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스타 프로듀스 K>의 진실을 말하는 대목에서, 사람들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헐, 대박…….”
“그때 그 일이 사실이었다고요?”
“생각보다 더…… 바닥인 사람이었군요.”
불만 한번 토로하지 못했던 오지환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매우 거칠었다.
어쨌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빠르면 내일,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각자 마음의 준비는 하고 출근하는 걸로 합시다.”
긴 설명 끝에 나는 한 가지 감정을 느꼈다.
어쨌든 이 복잡했던 사태를 해결하고, 우리 방송을 성공시킬 기미가 보인다는 것.
바로 그로 인해 후련함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