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해 볼 만해졌다
순간 말문이 턱 막힐 뻔했다. 그러나, 예상한 이야기 중 하나였기에 태연한 미소를 가장하고 웃어넘겼다.
“그 별명은 좀 부끄럽습니다. 전 그냥 평범한 예능 PD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유명하시더라고요. 연락 주신 후에 저희도 이것저것 좀 알아봤습니다. 저희한테 주신 기획안이 입봉작이시라고요.”
남만덕 매니저가 꺼내 든 것은 내가 메일로 보내준 기획안이었다.
“혹시 확인해 보셨나요? 첫 메일로 보내 드린 기획안보다 좀 더 구체화된 기획안이었거든요.”
“읽어봤습니다. 흥미로운 기획이긴 하더라고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첫 메일은 제대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심하게 솔직한걸.
오늘 내 자세처럼, 남만덕 매니저도 솔직하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사실 1인 미디어 시대라며 말이 많은 시대다 보니, 방송 업계에서 꾸준히 연락이 있긴 했습니다. 다만, 대다수가 이쪽 업계를 취재하고자 하는 기획이었지, 이렇게 커버계 BJ만을 모여서 경연을 한다는 방식은 없었습니다.”
물꼬를 트는 것치고는 좋은 말이었다. 긍정적 반응인 거니까.
남만덕 매니저가 말을 이었다.
“여기 예정 출연진 중에서는 구독자 수가 아직 궤도에 오르지 않은 분들도 있고, 특히 그런 분들한테는 홍보로서도 매우 좋은 방송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태도에 비해 매우 긍정적인 평가만 늘어놓는다.
거기에 감사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우연히 내 기획안 위에 눈길이 갔다.
[41%]
아…… 그럼 그렇지. 역시, 인사치레일 뿐이었나 보다. 하기야, 이렇게 술술 풀릴 거였음 이렇게까지 빼지 않았을 터.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어조는 바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시잖습니까? 저희 아온이는 굳이 방송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됩니다.”
맞는 말이다. 400만 구독자 수의 미투버. 무시할 수 없다. 과거면 몰라도 지금 세상에서 미투브만으로도 아온은 이미 유명 가수였다.
남만덕 매니저의 말은 틀린 게 없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요.”
“거꾸로?”
“방송의 힘을 빌리는 게 아닙니다. 저희 방송이 아온 님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겁니다.”
“힘을 빌린다라.”
“말씀하신 대로 아온 님껜 저희 방송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희로서는 아온 님이 합류해 주시면 큰 힘이 될 겁니다. 도움이 되는 대상과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 생각하시는 것과 정반대인 거죠.”
<언더커버 싱어> 출연진을 꾸리면서 내가 가장 중요시한 것은, 장르적인 다양함이었다.
구독자 수나 재생수 같은 수치도 있지만, 그게 제일 중요할 것 같았고, 실제로 그 조합 결과가 확률로 증명됐다.
그중 특유의 허스키한 하드록 스타일로 400만 구독자 수를 달성한 아온은, 확실히 말해 방송의 명확한 축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블라하이와 동일한 비중으로.
두 BJ가 중심을 잡아 준다면, 방송 끝까지 라이벌 구도로 잡아 갈 수만 있다면, 방송은 무조건 성공할 거였다.
내 말은 결코 꾸민 게 아니다.
필요한 쪽은 우리인 거다.
“저희는 아온 님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 한 번이라도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남만덕 매니저의 얼굴에 다소 이채가 감돌았다.
“상당히…… 솔직하시군요.”
“허풍으로 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럴 자리는 아닌 것 같아서요. 이렇게 만나 주셨는데 그럴싸한 감언이설로 부풀리거나 과장해서 여유 있는 척하고 싶진 않습니다.”
캐스팅이 성사될 확률이 40%대인 이상, 아무리 내가 그럴싸하게 포장한다고 해도 확률이 획기적으로 상승할 것 같진 않았다.
그럴 바에야, 내 솔직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한 내 말이 통한 것일까.
남만덕 매니저의 침묵이 조금 길어졌다. 후덕한 인상이라곤 해도 기획안을 찬찬히 다시 훑어보는 그 눈은 날카롭기만 했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매니저라고 할 수 있는 송일현에 비하자면, 훨씬 더 베테랑 같은 느낌이 났다.
난 그가 대꾸를 할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이윽고.
“……후우.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저희한테 콘택트하시면서 이렇게까지 다 솔직하게 말해 주시는 분이 없어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네요.”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해 주시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남만덕 매니저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보다는 조금 유해진 자세로 어깨를 풀면서 나를 보았다.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아온이가 예전에는 가수 데뷔를 위해 연습생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때 이리저리 방송 업계에 상처 받은 게 많아서…… 덕분에 저희도 처음 계약할 때 꽤 애를 먹었었죠.”
슈프림 엔터테인먼트도 방송계에 몸 담고 있는 기획사. 아온과 계약하면서 BJ 전담 부서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BJ로서는 첫 계약이고 지금도 주력 BJ이기 때문에, 아온이가 부담스러워하는 일은 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제안은 감사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는 점, 양해해 주십시오.”
그가 기획안을 덮었다.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듯.
소속 아티스트를 우선시하는 것은 매니저로서, 기획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만덕 매니저는 정말 좋은 매니저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내 입장에서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아온 님 본인에게라도 한번 의향을 물어볼 순 없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만약의 가정조차 남만덕 매니저는 칼같이 잘랐다.
아온 캐스팅 성사에 대한 확률 보기가 실패했다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다.
이 정도로 완강해서는 어찌해 볼 여지도 없었다.
실패 알림 메시지가 뜨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
어라, 왜 안 뜨지?
확률 보기 실패 메시지가 안 뜨는데?
그 순간.
[현재 사용 중인 ‘미투버 아온의 출연 교섭을 성사시킬 확률’이 변동되었습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메시지.
실패가 아니고, 변동이라고?
[53%]
응……?
수치가 되레 상승했다. 그것도 10% 이상.
회의실에 앉은 자리에서, 최종 거절 의사를 들은 직후에 도리어 확률이 오르다니.
이게 무슨 일이지?
“강대한 PD님?”
갑자기 말이 사라진 나를 남만덕 매니저가 걱정스러워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실망하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저희도 슬슬 다른 일이 있어서…….”
그가 기어코 축객령을 내뱉으며 일어서려는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며, 금색의 장발을 뽐내며 늘씬한 미인이 걸어 들어왔다.
“만덕이 오빠! 여기 있다며……? 아?”
뒤따라 들어온 직원이 어쩔 줄 몰라 하고, 당당하게 들어온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선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익후! 미팅 중이었군요! 제가 실례했네요! 죄송!”
쾌활하게 웃은 그녀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태도로 사과를 해 왔다. 난 어정쩡하게 일어서 함께 고개를 숙였다가 겨우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온 님……?”
“네, 제가 아온이에요. 어라, 낯이 익은 얼굴이신데……?”
아온.
내가 그토록 실물을 만나고 싶어 한 미투버였다.
중간에서 굳어 있던 남만덕 매니저가 벌떡 일어났다.
“너는 야, 내가 회의실 함부로 열고 들어오지 말랬지.”
“또 전처럼 회의실에 짱박혀서 자고 있나 했지. 진짜 미팅 중이었을 줄 누가 알았나?”
“어휴, 진짜. 이 왈가닥이…….”
남만덕 매니저가 고개를 젓는 걸 보니 한두 번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죄송해하는 직원을 내보낸 뒤, 결심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여긴…… 강대한 PD님이셔.”
“아, 설마! 아이돌 심폐소생 전문가! 엑시트의 외삼촌! 최강 커플링으로 유명하신 그 강 PD님?”
어느 것 하나 흘려듣기 힘든 별명들이라 난 표정이 무너질 뻔하는 것을 가까스로 잡아야 했다.
“가, 강대한 PD입니다. 예전부터 아온 님 팬이었습니다. 이렇게 뵙게 되니 정말 반갑네요.”
“그러게요! 유명한 PD님을 오늘 볼 줄은 몰랐네요. 어쩐지 회사를 쳐들어오고 싶더라.”
“야, 쳐들어오다니…… 회사가 무슨 적진이냐.”
“적장의 목을 땄다! 이런 거?”
알아들을 수 없는 농담을 하고, 그녀가 푸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혼자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남만덕 매니저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아온을 돌려세웠다.
“그만 웃고, 나가봐. 우리 미팅해야 해.”
“뭔데, 뭔데? 무슨 일인데? 어떤 미팅인데?”
“네가 알 것 없어. 너하곤 관계없는 일이야.”
“하지만 내 팬이라고 하시잖아. 강 PD님도 제가 있는 게 더 좋죠?”
“야, 인마, 제발 좀…….”
알겠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아온이 활기차게 뛰어다니고, 남만덕 매니저가 그 뒤를 수습하면서 쫓아다니고.
아티스트와 매니저이기보다는, 마치 남매 같은 케미가 있었다.
“어, 이게 기획안이야?”
그때, 막무가내처럼 빈자리에 앉은 아온이 기획안에 손을 댔다. 남만덕 매니저가 아차 하는 얼굴을 하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확률이 상승한 이유.
AGD 앱이 나에게 준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온 님을 보고 구상한 기획입니다.”
난 서둘러 운을 뗐다.
남만덕 매니저가 눈을 부라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뻔뻔해지기로 했다.
“예? 저를요?”
“네. 얼마 전 EDM페스 무대에서 피처링 하셨었죠? 그때 저는 관객석에서 봤습니다. 그 뒤로 채널 구독도 하고 있습니다. 400만 명 중 1명입니다. 오늘부로 성덕이 됐네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임전무퇴의 기세로 달려드니 입이 평소보다 잘 트이는 것 같았다.
물론 눈앞의 아온이 생각과 달리 텐션이 좋다는 것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어머나, 그러셨구나. 감사해요. PD님 중에서도 제 영상 봐 주시는 분이 있을 줄 몰랐는데. 기획안 좀 봐도 될까요?”
“아온아, 안 봐도 돼.”
“오빠, 그냥 앉아.”
남만덕 매니저가 말리려 했지만, 아온은 되레 그를 자리에 앉히고서 기획안을 빼앗아 손에 들었다.
“<언더커버 싱어>……? 어라, 경연이에요?”
“예. 일단 가제인데, 첫 장에 보시면 어떤 기획인지 설명을…….”
남만덕 매니저가 손으로 이마를 감싸는 사이,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하고 열심히 아온에게 설명을 했다.
내가 예시로 들어 놓은 아온의 커버 영상들에선 호오 하고 감탄성을 흘렸고, 블라하이 출연 교섭 중이라는 문구에는 눈을 크게 떴다.
“이분이 한대요?”
“아뇨, 아직 확정은 못 받았습니다. 노력해야죠, 더.”
“그럼 이분은?”
“그분은 확정했습니다.”
확정 출연진 다섯 명에 대해서는 떳떳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중 즐겨 보는 BJ도 있다고 그녀는 아주 좋아했다.
“우와, 그럼 경연 무대 같이 서게 되면, 이분들 라이브를 직접 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럼요. 특등석에서 보실 수 있죠.”
“우와, 우와.”
아온은 얼굴에서 감정이 전부 느껴졌다. 아니, 온몸에서.
계속해서 우와 소리를 연발하면서 기획안을 끝까지 넘겨보던 그녀는,
“그런데 이거, 정식 방송이에요?”
변화구처럼 나를 굳게 만들고는 쳐다보았다.
순진무구해 보일 정도로 활기찼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녀의 커버 영상에는 밝은 노래도, 어두운 노래도 물론 있다.
그때마다 목소리 톤, 표정, 분위기까지 바꿔 연출할 줄 아는 가수였다.
지금도, 좀 전의 활기참과는 조금 다른 어두운 분위기가 감도는 표정이었다.
난 침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예. NBS―M에서, 평일 저녁 11시 편성 예정입니다.”
“그래요. TV 방송이란 말이죠…….”
아온이 굳은 얼굴의 남만덕 매니저를 돌아보았다.
“오빠는 어떻게 생각해, 이 방송?”
“이미 거절했어.”
“왜?”
“왜긴 왜야. 너…….”
뭐라고 이야기하려던 남만덕 매니저가 나를 보았다. 한차례 아온을 힐끔 본 그가 말했다.
“강 PD님. 죄송하지만 오늘은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아온이와 둘이서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아…….”
뭐라고 해야 할까.
남만덕 매니저와 아온 사이에서 몇 마디를 더 붙일까 하다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실낱같은 희망이 있다고 해도 멈춰야 할 때는 멈춰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저는 드릴 말씀을 다 드렸으니…… 다만, 제 진심을 알아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고, 짐을 챙겨서 일어났다.
“강 PD님, 또 뵈어요. 다음에 만나면 사인이라도 해 드릴게요.”
아온은 다시 표정을 되돌려 쾌활하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마주 웃으며 묵례를 하고서 회의실을 나섰다.
직원의 배웅을 받으면서 사무실을 나간 다음에야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후우…… 폭풍 같았네, 정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아온에게 쉼 없이 설명을 쏟아부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어쨌든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하고, 동시에 기대감이 뭉글 피어올랐다.
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에 떠 있는 기획안 위로, 확률이 홀연히 떠올라 있었다.
[77%]
사실 물러선 이유 중엔 확률이 변동하는 걸 슬쩍 본 것도 있었다.
이제야 겨우 해 볼 만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