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7
237화.
“여, 역시 용족…… 아니, 드래곤……!?”
이 상황에 오두방정을 떨지 않으면 엘프가 아니다. 그러나 정시우는 용의 발톱에 집중하느라 엘프를 상대해 줄 시간이 없었다.
‘내게 흐르는 마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용의 마나…… 꿈속에서 느꼈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어. 어쩌면 용의 감각과 내 육신의 감각을 일치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어 줄지도 모르겠는데.’
정시우의 손과 맞닿은 부분에서 은은한 검은빛이 일어, 거대한 발톱을 점점 물들여 나갔다. 이윽고 수백 미터에 이르는 크기의 발톱이 전부 검게 물들자 이번엔 발톱의 크기가 천천히 작아지며, 뭉개지기 시작했다. 정시우의 마나에 반응하여 모습을 변형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요, 용아병이라도 튀어나오는 거 아녜요, 이거?”
“그건 이빨이고 이건 발톱이니까 안심해.”
그러나 겉으로는 여유롭게 수아린에게 대꾸해 주면서도 정시우 본인도 긴장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유구한 세월 변형되지 않고 제 힘을 간직해 온 용의 발톱은 지금 이 순간도 정시우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마나의 흐름을 만들어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흡.”
어느 순간 절로 그의 전신에 카오스 스케일이 돋아났다. 그의 팔뚝을 감싼 마룡의 완갑이 격렬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정시우는 그것을 보며 비로소 깨달았다. 이 발톱이 뿜어내는 마나의 패턴에 대해서도 감이 왔다.
“보상의 제단인가.”
즉, 발톱은 정시우의 마나와 접촉한 것이 트리거가 되어 그에게 어울리는 아티팩트로 재탄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나와 물질을 변형하여 새로운 성질의 물건으로 만들어 내는 보상의 제단 특유의 마나 구조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네? 제단 같은 건 없잖아요.”
“하지만 이건 그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용 본인의 발톱이잖아.”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덧 정시우가 처음 살폈던 바위도 그들에게 공명하듯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아무런 고난도 없이 마냥 얻어먹기만 하는 것은 정시우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단지 용의 힘을 얻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은 정시우가 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수순이었다.
“터무니없는 기세로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위, 위험한 일은 아니겠지……? 그렇지……?”
처음엔 수백 미터에 달했던 용의 발톱은 점차 몸집을 줄여 나가 백 미터, 수십 미터, 이내 고작 몇 미터 크기로까지 줄어들었다.
물론 그 안에 담겨 있던 마나의 총량은 변하지 않기에 기세는 점점 더 흉흉해졌지만, 정시우는 이제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마법의 패턴에 간섭할 수 있을 만큼은 여유를 되찾았다.
‘휴식처 능력의 반절 정도는 바깥에 나와 있어도 얼마든지 구사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눈앞에서 벌어지는 아티팩트 생산 과정에 ‘세례의 터’의 힘을 적용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정시우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답이었다. 앞으로도 한참은 꾸물거리고 있을 것처럼만 보이던 검은 부정형의 물체에 정시우의 마나가 본격적으로 섞여 들어가자, 그것은 순식간에 크기를 줄이더니 어느덧 정시우의 하체로 날아들어 그의 두 다리를 감쌌다.
카오스 스케일이 그것에 반응하듯 유독 밝은 빛을 토해 냈다.
“후우우…….”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격이 그의 육신과 조화되는 과정에서 정신에 막대한 부하가 걸렸다. 그러나 이것도 이겨 내지 못하면 신들과 정면으로 맞붙는 일은 불가능! 정시우는 이를 악물고 세례의 터의 힘을 발휘했다.
‘내가 인지할 수 없는 영역의 힘을, 내 인지의 방식으로 가공하는 것…… 지금은 이게 최선이야.’
차츰차츰 그 힘의 본질을 이해해 나가며, 자신의 힘과 조화시켰다. 아직 그것을 정시우의 내부로 받아들이는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그를 감싸는 갑옷이 되어 줄 수 있도록! 그의 비늘과 동화되어, 그가 완벽히 부화하기까지 그를 보호하는 단단한 알 껍질이 되어 줄 수 있도록!
“오빠, 그건…….”
“마치…….”
“이럴 수가, 정말로……!”
처음 크라켄과 맞서 싸웠을 때보다도 더한 집중의 끝에 대체 얼마나 되는 시간이 흘렀을까, 정시우는 더 이상 괴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용의 발톱에 머무르던 드높은 격의 일부나마 자신이 받아들이는 데에 성공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광룡의 정강이받이를 얻었습니다.]
[카오스 스케일이 Lv20이 되었습니다.]
[용의 감각이 Lv20이 되었습니다.]
[마룡의 완갑이 광룡의 마나에 반응합니다. 힘의 해방에 한 발짝 다가섭니다.]
어느덧 정시우의 망막 위로 몇 줄인가의 문장이 나열되어 있었다. 시선을 내려다보니, 그의 무릎 아래에서부터 발가락 끝까지를 완벽하게 감싸고 있는 검은 비늘의 부츠가 그곳에 있었다. 마룡의 완갑도 그러했지만 마치 그의 몸의 일부가 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광룡의 정강이받이]
[랭크 ? SS++]
[방어력 ? 10,220 ? 13,550]
[숙련도 ? 0/90,000]
[속성 ? 1. 뇌전 SS 2. ???]
[옵션 ? 1. 뇌전을 몸에 두를 수 있다. 신체의 반응속도, 방어력, 속성 공격력과 공격 범위 모두를 끌어 올린다. 2.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속성 공격을 30% 무효화 3. ???]
[최초이자 최후의 용의 파편이, 인간의 손에 빚어져 거듭난 모습. 아직 그 힘은 모두 발현되지 못하였으나 드러난 힘만으로도 충분히 경악스럽다. 신이 아니되 신을 뛰어넘고자 하는 이에게 내리는 용의 축복.]
광룡의 정강이받이는 전투용 아티팩트로서 습득한 것으로는 가장 랭크가 높았다. 비록 마룡의 완갑에 비해 겉모습이 그리 요란하지도 않았고, 히스테릭 게이지 같은 특수한 수치도 없었지만…… 그러나 아티팩트의 능력치 자체는 터무니없이 강력했다.
당장 방어력 13,550이라니, 적어도 정시우는 처음 보는 수치였다. 더욱이 뇌전을 몸에 두른다는 것은 또 어떤가! 바람의 질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성 버프 능력임에 틀림없었다. 마지막으로 속성 공격 30% 무효화의 효과는 굳이 그의 입에 담을 것까지도 없다.
“그, 그래도…… 이렇게, 권능 비슷한 게 깃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걸로 충분해. 무엇보다 용이잖아.”
마룡의 완갑 때와 같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광룡의 정강이받이는 카오스 스케일과 동화하는 과정에서 카오스 스케일의 레벨을 무려 5이상 업그레이드해 버린 것이다.
이것을 단순히 그 안에 담긴 거대한 힘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그 이상으로 광룡이라는 존재가 정시우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야 할지…… 아니, 어쩌면 둘 다려나. 정시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과 용 사이에 모종의 연결이 있다는 것은 이제 와 굳이 의심할 필요도 없는 사실. 그저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계속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모든 것이 확실하게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로 그것도 그리 머지않은 미래의 일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거주지역이 확장됩니다.]
“음?”
그런 정시우의 상념을 끊어 버리듯 당돌하게 그의 망막에 스쳐 지나가는 문구가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어쩐지 그럴 것 같기는 했지만, 처음에 그가 반응했던 거대 바위가 그 자리를 지우개로 지우고 지나간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거주지역에 들어갔을 때 저 바위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으면 그건 또 그것 나름 웃기겠지만.”
“그러면 일단 돌아가 볼까요, 오빠? 루타한테 이번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음…… 아니.”
정시우는 잠시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용…… 광룡에 대해서는 루타보다 정시우가 더욱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더욱이 자신이 광룡의 유해로부터 힘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또 얼마나 흥분하며 달려들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그보다는 기껏 얻은 이 힘의 근원을 추적해 보자. 이 세상, 히토이에 떨어져 나온 바위나 발톱은 어디까지나 파편에 지나지 않아. 이 마나를 분석해 만상만화경으로 비출 수 있다면 분명 근원의 세상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근원의 세상이라니 듣기만 해도 굉장히 강해 보이네요…….”
용의 힘을 직접 얻으며 정시우에게 내재되어 있던 중2엔진에 불이 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흥분한 자신을 다스리듯 깊게 심호흡을 반복했다.
이제 막 그의 육신과 동화된 광룡의 정강이받이, 그리고 그것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인지 평소와 달리 예민하게 빛을 발하고 있던 마룡의 완갑도 끝내 저항을 포기하고 그의 피부 속으로 스르륵 기어 들어갔다.
“이걸로 완벽해. 수소폭탄도 노 데미지로 받아 낼 수 있을 것 같아.”
“무서운 말씀 하지 마시죠, 형님.”
“호, 호호호호호혹시……!”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정시우를 보며 클라나가 경악하여 외쳤다.
“혹시 당신은 위대한 분이십니까!?”
“얜 대체 지구의 서브 컬쳐를 어느 영역까지 커버하려고 이러냐.”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도 용은 더 이상 어떤 세상에도 남지 않았다. 신이 되어 버린 용이라면 생각나는 후보가 있지만 말이다. 정시우는 조금 전의 그가 보여 준 기적의 행사에 몸을 벌벌 떨고 있는 클라나의 어깨에 손을 툭 얹었다.
“고맙다. 네 덕분에 또 새로운 길을 열 수 있었어.”
“제, 제제제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기쁩…….”
아, 완벽하게 얼어 버렸다. 이 정도라면 굳이 그가 입을 단속하지 않아도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일은 없겠지. 물론 그녀가 다른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한들 별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다.
“좋아, 그러면 바로 시도해 보자.”
“얘는 이대로 두고 가십니까?”
“곧 정신 차리겠지 뭐.”
정시우는 곧장 만상만화경을 들어, 자신이 바위와 용의 발톱을 통해 느꼈던 근원의 기운을 그대로 복사해 내 그것에 주입했다.
제법 헤매게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예상보다 즉각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일순 무수한 빛을 반사하던 만상만화경이 새까맣게 물드는가 싶더니, 곧 끔찍한 수준의 광량을 토해 내는 것이 아닌가!
“큭, 레벨 1 상태로 라스트보스 잡으러 가는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기 시작했는데……!”
“위험할 것 같은데요, 형님! 그냥 취소하시는 게!”
“칫…… 그러자!”
아무리 간을 배 밖에 내놓고 다니는 정시우라고 해도 이 정도로 노골적인 위험신호를 알아채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는 서둘러 만상만화경에서 마나를 거두어, 근원의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를 끊어 버리고자 했다.
[아니, 잠깐…… 이건 그리운, 그리운 나의 동포가 아닌가.]
만상만화경 너머로부터,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헥토……?”
[그렇다. 나다, 동포여.]
정시우가 눈을 크게 뜨고 중얼거리는 말에 다시 그자는 즉각적인 대답을 해 왔다. 이전에도 놈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에 온전히 힘의 신 헥토의 기세가 담겨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정시우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주 잘 알았다.
“설마, 네놈…….”
[그렇다. 이곳이 바로 나의 세상, 나의 근원. 우리들 용의 마지막 무덤이다. 네가 이곳을 찾아냈다는 것은…… 너도 발견한 게로구나?]
그것은 정시우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사태였다. 무수한 신의 화신들이 전투를 벌이는 세계의 모습까지도 각오를 하고 있었건만, 설마 내심 최악의 적으로 가정해 두고 있던 헥토의 본신이 머무르는 세계와 연결될 줄은!
“너…….”
[크흐, 아주 재미있어. 사태가 재미있게 굴러가기 시작했어! 드디어 모두가 하나로 돌아갈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단언컨대 그 무대 위에 주연은 나와 너뿐이다! 동포여, 너는 아직 힘을 모두 되찾지 못했는가?]
“나는 용이 아냐.”
[큭, 크흐흐흐! 여전히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구나. 동포여, 나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언제고 때가 되면 찾아오너라.]
다음 순간 정시우는 필사적으로 마나를 발해 만상만화경의 발동을 무력화했다. 헥토의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게 되었지만, 영 찝찝한 기분이 남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응? 아…….”
기껏 집어넣었던 마룡의 완갑이 본래 주인의 마나에 반응하여 재차 격렬하게 빛을 토해 내고 있었다. 광룡의 정강이받이에 이어 더한 자극을 받았으니 어쩌면 이 녀석도 조만간 변화할지 모르겠다.
정시우는 그것을 다독여 주며 다시 만상만화경을 붙잡았다. 조금 전의 기 싸움에 지쳤지만,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했다.
“헥토 놈도 뭔가 일을 꾸미는 모양이야. 더 빠르게 움직여야겠어.”
“난 오빠가 저 말 할 때마다 불안하더라…….”
“안심하시죠, 선배님. 저도 불안합니다.”
“위, 위대한 분의 힘이 또……!?”
두 서포터가 성대한 한숨을 내뱉는 가운데 정시우는 이번에야말로 만상만화경을 발동,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었다. 그 자리에 혼자 남은 엘프 클라나는 그로부터 몇 시간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벌벌 떨 뿐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더 흘렀다.
정시우는 지버스 에이지의 세상에 진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