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
236화.
“내 이름은 클라나 페카티다.”
하늘을 날아 그 용의 흔적이라는 것을 찾아가던 중 갑작스레 엘프가 말했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는 대충 예상이 갔지만 정시우는 그 말에 그냥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엘프는 그의 반응에 기가 막혀 재차 물었다.
“……네 이름은?”
“비밀. 그냥 용족이라 부르든가.”
“정말 무례한 남자군.”
수아린은 정시우와 통성명을 한 모든 여자를 잠재적 연적으로 분류하기 때문에 덜 귀찮아지기 위해선 미리 모든 가능성의 싹을 잘라 두는 것이 상책!
더욱이 이름을 교환하는 순간 두 사람 사이에 보다 깊은 연결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세상을 돌아다닐 정시우의 입장에선 만나서 대화하는 모든 사람들과 일일이 교분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흔적을 찾는 대로 조사하고 최대한 빨리 이 세상에서 떠날 거야. 그러니 그냥 나한테 신경을 쓰지 마.”
“그것 참 감사한 배려다. 그 말씀대로 따르도록 하지.”
엘프, 클라나 페카티는 잔뜩 뿔이 난 표정이었다. 그러나 정시우는 이로써 완벽히 플래그를 회피했다는 생각에 절로 뿌듯해졌다.
그런데 다른 세상에 비하면 유독 나무들이 거대하고 풀숲이 우거진, 정말로 정통 판타지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히토이의 지상을 훑어보며 비행을 계속하길 몇 분…… 정시우의 귓가에 꽂히는 목소리가 있었다.
[주인, 이쪽 세상에서 미레타의 파편을 발견했다.]
“음.”
그것은 바로 지금 그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움직이고 있는 케이나의 보고였다. 그렇다. 정시우는 이계 탐험 부대를 나누어 운용하고 있었다.
어차피 신의 화신이 돌아다니지도 않는 하위 세계는 정시우 일행의 전력이 아까울 정도로 만만했고, 효율을 늘리기 위해 소울 포스로 연결된 다른 유령들 대다수를 케이나에게 맡겨 독립 부대를 운용하고 있었던 것!
“좋아, 그건 루타한테 전달해 둬.”
[알겠다. 그러면 주인, 무운을.]
그들은 아무리 먼 차원으로 떨어져 있어도 정시우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뿐더러 그가 부르면 곧장 그의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그의 능력이 과거에 비할 수 없이 발전한 지금은, 지금 이 자리에서 만상만화경을 발동하여 케이나와 유령들만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는 것까지도 가능했다. 그것이 이 놀라운 분업을 가능케 한 것이다.
물론 케이나가 이끄는 유령 군단을 2파티로 두고, 세이락시아와 엘을 한 팀으로 묶어 낸 3파티도 따로 운용하고 있었다. 지상과 수중을 감당할 수 있는 두 녀석이 뭉치면 어지간한 세상은 확실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미레타의 파편이라…….”
“케이나의 보고였나요?”
“응. 미레타의 파편을 얻었다네. 굳이 내가 흡수할 필요도 없으니 루타가 부탁한 대로 넘겨줄 생각이기는 한데…….”
그 녀석이 뭘 꾸미고 있는지도 대충 견적이 잡혔다. 요정상인들 뜻대로 일이 굴러 갈지는…… 그야 정시우도 확신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본의 아니게 기반을 닦아놓고 있는 지금은 어쩌면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보고? 미레타?”
“앞 잘 보고 날아라.”
“쿠으으으.”
클라나는 정시우의 반응에 볼을 한껏 부풀렸으나 반문은 하지 않았다. 정시우가 지닌 힘으로 보나 세상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권능으로 보나, 사실 그와 관련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은 그녀 또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결국 멈출 수가 없는 것이죠…… 언제나 이성보다 호기심이 앞서고 마는 엘프 종족답군요.”
“슬슬 아린이 표정이 무서우니까 하지 말자, 세하야.”
히토이는 대륙의 크기로만 따지면 지구보다 아주 약간 컸다. 그 절반을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이 안에 엘프 부족이 살고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법한 대수림. 그러나 정시우가 그렇게 묻자 클라나는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족히 레벨 250 이상의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숲이야. 과거 세계수가 이곳에 있었다는 얘기도 들은 적이 있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수백 년 이상 전에 괴물들이 이 숲을 점거해 버렸으니 이젠 그것도 확인할 길이 없어.”
“세계수가 없으니 엘프들은 이대로 멸망하는 건가.”
점점 판타지 소설과 비슷해진다고 생각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클라나가 그를 비웃었다.
“나무가 그래 봤자 나무지, 무슨 멸망.”
“……이쪽 엘프들은 제법 현대적인 인식을 하고 있네.”
“하지만 세계수가 굉장한 마나와 축복을 품고 있었던 나무였던 것만은 사실인 모양이다. 그 증거로 이 세상에 강하다고 자부하는 몬스터들은 모두 이곳에 몰려들었고, 욕망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오크들도 주기적으로 이곳을 정벌하려고 드니까.”
그러나 정시우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이 세상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오크 종족이 이 숲을 노리고 있다면 숲 안에서 오크들의 기척이 느껴져야 하는데, 딱히 특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클라나는 정시우의 의문에 후훗,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답을 알려 주었다.
“언젠가는 그들의 세력이 숲을 뒤덮을 정도로 강해질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냐. 이 안에 들어가서 살아 나온 이는 없거든. 날 제외하고는.”
아, 그러고 보면 이 여자가 세계 최강자라고 했었지. 정시우는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렸다. 마신 스킬을 얻고 일선을 넘은 이래, 어지간한 이들의 무력은 고만고만해 보이는 것을 그도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말하면 클라나가 화를 내며 더 귀찮게 굴 테니 그것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왜 들어갔었지?”
“세계수를 보고 싶었으니까. 하늘성에서 관련 자료를 얻은 후 곧장 이곳으로 향했었지. 실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지만…….”
그녀는 엘프 종족이 오크들에 의해 존망의 위기를 겪고 있음에도 차마 세계수에 대한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확실히 엘프다운 구석도 있구나,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정시우는 눈앞에 펼쳐진 숲 전체에 의식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정말로 용의 흔적을 찾아냈다. 실로 당황스럽게도, 정시우가 꿈에서나 느끼던 바로 그 용의 기운이었다!
“맙소사…….”
“당연하지만 드래곤의 흔적은 대수림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은밀하게, 마나에 어지간히 민감한 이가 아니면, 과거 용의 마나와 접촉할 일이 없었던 이가 아니면 알아채지도 못하게 감추어져 있다. 나는 과거 던전에서 용의 흔적이 남은 아티팩트를 얻은 적이 있어 그것을 알고 있지만…….”
정시우는 수다쟁이 엘프가 무어라 떠들든 신경 쓰지 않고 피막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검붉은 용의 날개가 숲속 깊은 곳에서 느릿한 숨을 쉬고 있는 용의 흔적과 호응하듯이 은은한 빛을 뿌려 냈다.
“가자.”
“넵.”
“내 말을 듣고 있는가? 세계수를 찾으려 대수림을 샅샅이 뒤진 끝에야 간신히 발견할 수 있었던, 이이이익! 기다려라!”
정시우는 최고속으로 비행했다. 날개를 수십 미터 이상으로 펼쳐 허공을 가르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용이 하늘을 나는 것만 같아, 대수림에서 살아 숨 쉬는 고위 몬스터들조차 그 모습을 보며 움츠러들어 어디론가 도망치고 말았다.
“크흑, 정말 엄청나게 빠르잖아…… 나의 삶에 머무는 바람이여, 나에게 보다 빠른 걸음의 가호를!”
클라나가 스스로에게 온갖 보조마법까지 걸어가며 간신히 정시우를 따라잡았을 땐, 정시우는 이미 목적하던 것을 발견하고 비행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지 못한 클라나는 전속력으로 날다가 그만 그의 등짝에 부딪히고 말았다.
“아켁.”
“……이거야.”
정시우는 거대한 나무 아래, 나무뿌리와 얽혀 반쯤 지면에 묻혀 있는 평범한 바위를 보며 넋을 놓고 중얼거렸다. 클라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다. 이쪽에 보면 확실하게 용의 기운을 품고 있는 거대한 발톱이…….”
“알고 있어. 아마 너보다 내가 더 잘 알 거야. 하지만 일단 이걸 보고.”
정시우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클라나에게 굳이 답해 주지 않고 바위를 향해 다가갔다.
그 위에는 미세하게 긁힌 흔적이 있었다. 바로 마법진의 흔적이었다. 온 세상에서 오직 정시우와…… 그리고 용의 언어를 아는 이만이 읽을 수 있는 마법진의 흔적 말이다.
“하늘성.”
“하늘성?”
“태초의 하늘성을 구축할 때 만들어 냈던 술식의 일부야.”
정시우는 그렇게 대꾸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바로 최근에 꾸었던 용의 꿈, 용이 스스로 정시우를 인식했던 최초의 꿈.
지구인지 어디인지 모를 행성에서 용은 하늘성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때 놈이 펼쳤던 마법의 기반, 그 일부가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그 세상인가? 그것은 아니리라 생각했다. 그 정도로 오래된 세상이 고작 크레센트 에이지에 머무르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마법의 발동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오빠, 이쪽에 정말로 발톱이 있어요! 어마어마하게 커요!”
“보라, 이 짙은 용의 기운을! 나는 과거 던전에서 용종과 싸운 적이 있으니 거짓말이라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정시우의 시선이 수아린과 클라나의 목소리를 쫓아 흘렀다. 지면에 파묻힌 바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마찬가지로 지면에 반쯤 파묻힌 거대한 발톱이 있었다.
그것은 그나마 발톱이 바깥쪽으로 튀어나와 있었으니 망정이지, 안으로 들어가 있었더라면 평범한 돌산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거대했다.
“후우…….”
그것을 보자 절로 정시우의 가슴이 요동쳤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꿈에 나왔던 용의 유해의 일부라고 확신했다. 설마 그것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을 줄이야…… 진즉 파괴되어 사라졌거나, 헥토나 다른 신에 의해 흡수되어 소멸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지, 조금만 늦었어도 그렇게 되었겠지. 이미 많은 세상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을 테고……. 운이 좋았어.”
“후흐, 이제야 인정하는가?”
유감스럽게도 고개를 끄덕여 줄 수밖에 없었다. 정시우는 기고만장한 표정의 클라나를 개무시하며 사고를 이어 갔다.
“그리고…… 하늘성을 이루는 마법이 어떻게 발동했는지도 알겠네.”
“어떻게요?”
“글쎄, 일단 이게 전투의 흔적이 아니라는 건 명백해 보이지 않아?”
정시우의 말에 수아린이 멈칫했다. 그렇다. 무수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막 용의 발에서 뽑아낸 것처럼 생생한 기세를 발하고 있는 그 발톱은, 도저히 전투에 의해 손상되었다고는 말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뽑아낸 거야.”
“그렇, 다는 건…….”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발톱 하나이지만, 어쩌면 놈은 모든 세상에 하늘성을 만들어 내고 링크를 구축한다는 대마법의 발동을 위해 자기 자신의 몸을 전부 제물로 바쳤을지도 몰랐다. 그쯤 되지 않으면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마법을 납득할 수가 없다.
“그, 그러면 이거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녜요?”
“아니. 마법이 발동할 때나 필요했던 거지, 이 바위도 발톱도 마법이 끝난 후에 남은 잉여물에 불과해.”
“흥, 유감이지만 네가 이걸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용의 흔적을 회수해 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지만 조그마한 흠집도, 일말의 움직임도 이끌어 낼 수 없었으니.”
클라나가 자신 있게 말했지만 정시우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성큼성큼 발톱을 향해 다가갔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느덧 그의 머릿속에는 그 꿈속에서 들었던 용의 말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 걷는 길에 거짓도 실패도 없으니, 미혹 또한 필요가 없다. 단지 스스로 존재함을 잊지 마라.]
끝내 정시우의 손이 거대한 발톱과 맞닿았다.
발톱이 눈부신 빛을 발하며 그에게 호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