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212화.
유고가 다스리는 세상은 라이아나 프루타가 지배하는 세상과는 다르게 하늘이 상당히 낮고, 육상생물들이 활개를 치는 곳이었다. 사실 정시우 일행에게는 그쪽이 더 고마웠는데, 문제는 유고가 침입자를 미리 대비해 놓은 탓에 그의 파편의 흔적을 찾는 것도 힘들었다는 것이다.
[크, 하악…… 그것은, 유고 님의 힘…….]
“내 힘이지. 이젠 네가 지키고 있던 것까지 말이야.”
[켁!]
결국 그 세상의 공략은 용의 감각을 필사적으로 동원해 세상을 샅샅이 훑고 나서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강력한 몬스터들이 철저하게 함정을 파고 밀집하여 일행을 상대했지만, 전투 자체는 유고의 파편으로 만든 방어구 포효의 근원 덕분에 어떻게든 밀려나지 않고 치를 수 있었다.
[레벨이 2 올랐습니다.]
“후, 빡셌다.”
“몬스터 상대로는 시종 험상궂은 표정만 짓더니 연기도 일품이시네요.”
[용의 위엄의 영향 아니겠는가. 그나저나 나도 힘들다. 베토 얼굴이 보고 싶군.]
어떻게든 밀려나지 않고 전투를 치러 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반년간 연속된 전투를 치르며 끝없이 성장해 온 정시우와 일행도 단단히 각오를 먹어야 할 만큼 전투가 치열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최근 몇 주간 더럽게도 레벨이 오르지 않던 부여 스킬과 강타 스킬이 99레벨로 오른 것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부여 스킬이 Lv99가 되었습니다. 스킬이 당신 고유의 패시브 스킬들과 공명하는 것이 느껴집니다. 액티브와 패시브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마나의 운용 방식이 눈에 보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필요한 재료가 아직 불충분합니다.]
[강타 스킬이 Lv99가 되었습니다. 당신이 보고 듣고 경험해 온 업적들이 스킬의 새로운 도약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느껴집니다. 당신이 지니고 있는 액티브 스킬과 융합하여, 새로운 스킬의 경지를 창조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필요한 재료가 아직 불충분합니다.]
이다음은 스킬 진화일 것이다. 두 스킬이 99레벨이 되는 순간 그의 전신에서부터 느껴져 오는 감각과 그것을 증명하는 메시지가 심상치 않았다.
[유고의 파편이 동종의 힘을 흡수하여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시우는 지금 그것보다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이 세상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신전을 깔끔하게 부수고 그곳에 남아 있던 힘까지 모두 빨아들여 완성된 유고의 파편이었다.
“유고 이 새끼가……?”
정시우는 파편의 크기를 확인하며 이를 갈았다. 하나의 세상에 남겨져 있던 모든 힘을 다 더했는데도, 이전 지구에서 베히모스와 싸워 얻은 파편보다 조금 큰 정도였던 것이다.
“이 새끼들, 분명히 지들 흔적을 세상에서 빼내고 있어. 아마 상위 세상에 밀집시켜 놓은 것 같은데…….”
“아직은 하프 에이지까지만 도전하고 있으니까요.”
요정상인 루타에게 들은 바로는 하프 에이지 위로도 풀 에이지 전 단계를 의미하는 지버스(Gibbous) 에이지가 있다고 하는데, 정시우는 자신이 크라켄을 압도적으로 짓누를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지버스 에이지로 진입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스스로의 기량이 성장했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문제는 크라켄과 같은 초거대 생물 퇴치의 핵심인 거인화의 숙달 정도였다. 유령들만을 활용한 부분 거인화라면 이제 자연스럽게 해내는 것이 가능했는데, 완전 거인화는 그때 그날 이후로 시도해도 성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크라켄 같이 위험한 녀석과 다시 조우하게 된다면 어쩌면 다시 쓸 수 있게 될지도 몰라. 그때의 절실함은 내가 생각해도 장난이 아니었으니까.”
“크라켄을 이기기 위해 거인화를 연습해야 하는 건데 그러기 위해서 크라켄과 조우해야 하다니 그게 무슨…… 어라, 전에도 이런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수아린이 어이가 없어 말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갑자기 정시우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부르르 진동하는 플라스틱 재질의…….
“삐삐?”
“통신기야. 루타한테 받은 건데…….”
이세계를 본격적으로 넘나들다 보니, 당연히 지구의 통신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차원을 자유로이 넘어 다니는 요정상인들의 통신기를 하나 받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에 착신이 오고 있었다. 음성까지는 전달하지 못하지만, 문자는 충분히 전달하는 것이 가능했다. 어떤 마법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도 없었다.
“이거 뭐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무슨 문자로 된 건지 도통 읽을 수가 없네요.”
[요정들이 쓰는 문자가 아니겠는가.]
“인간 대 몬스터 전쟁 위기라는데?”
순간 수아린과 케이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정시우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그는 원래 그랬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구로 돌아가 봐요. 이세계 공략에도 조금 텀을 두면 신들의 경계심도 풀어질지 모르잖아요.”
[신을 인간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안 된다. 그들에게 조금이란 인간에게 있어서의 수십 년, 혹은 평생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쨌든 지구로는 돌아가도록 하지. 인간과 몬스터 사이의 전쟁이라니 큰일이지 않은가.]
후반부는 급격히 국어책 읽기 같았다. 그녀 입장에선 몬스터도 인간도 먼지와 같을 터, 그냥 베토가 보고 싶을 뿐이겠지. 정시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지에 휴식처 입장열쇠를 꽂았다. 그들이 넘어온 차원의 벽이 단숨에 뚫리며 지구로의 귀환 통로가 나타났다.
[휴식처를 8레벨로 진화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실로 오랜만에 휴식처에 입장한 정시우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바로 휴식처의 진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휴식처에 남은 비드의 94%를 소모하여 휴식처와 부속 가구의 레벨 업, 추가 생성을 진행할 수 있습니다.]
“비드 많이도 먹네.”
“그동안 방치 상태로 늘어난 적이 없을 테니까요. 남은 비드로 어떻게 되는 것만 해도 다행이죠.”
“흠…… 하긴.”
용의 감각을 얻고 성장시켜 오며 자신에 대해, 자신과 연결되어 있는 것들에 대해 본질적인 깨달음을 얻은 정시우는 이젠 어떤 조건이 만족되어야 휴식처가 진화할 수 있게 되는지도 얼추 짐작이 갔다.
아마 9레벨로 진화시키기 위해선 지금 정시우가 고민하고 있는 부분을 해결해야 할 것이고, 10레벨은 지금의 그로선 상상도 하기 힘든 벽을 뛰어넘어야 하겠지.
“10레벨이라…….”
확신까지는 없었지만, 아마도 휴식처는 10레벨이 마지막 단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에 이르면 휴식처는 단순한 휴식처가 아닌…….
“영주님!”
오랜만에 휴식처에 머무르는 마나와 교감하며 선 채로 명상에 빠지려던 찰나, 그의 몸을 붙드는 손길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루타였다.
역시 지금 당장 휴식처를 강화하는 것은 무리겠지. 정시우가 여러 방향으로 뻗어 나가던 사고를 수습하며 그녀를 바라보자, 루타는 활짝 웃으며 그를 가볍게 껴안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드디어 쇼타임입니다! 그동안의 나태했던 자신에 대한 대가를 치르실 시간이 온 것 같네요!”
“네 얼굴 표정이 한 점 구름 없이 상쾌한 게 엄청 짜증나는데.”
“그러게 제가 말씀드린 대로 몬스터들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해 두고 나가셨으면 이럴 일이 없었는데 말이죠! 지금 지상은 난리도 아니랍니다!”
루타가 그 말과 함께 정시우가 휴식처에 놔두었던 그의 스마트폰을 건네었다. 정시우는 그것을 받았지만 굳이 확인하지 않고 바로 품에 집어넣었다. 어디까지나 인간 관점에서 만들어졌을 기사를 보는 것보다 구체적인 사실을 파악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이것보다도…… 너한테 이 사실을 전해 준 녀석 있지?”
“그럼요!”
그렇게 말한 루타가 옆으로 살짝 비켜나자, 꼬리를 돌돌 말고…… 아니, 꼬리는 원래부터 말고 있었지만,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사리테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찌.]
사리테는 숨어 있던 것을 들키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곤 정시우에게 거센 목소리로 말했다.
[이러다가 우리 동포들이 다 죽는다, 찌! 서둘러라, 찌!]
“아직 전면적인 교전은 시작되지 않은 거지?”
[이제 곧 전쟁이 시작될 거다, 찌. 아무리 에리우 님이 평화롭게 해결하려고 해도, 인간들은 에리우 님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찌. 그렇게 되면 남는 건 전쟁뿐이다, 찌. 에리우 님은 그렇게 인내심이 깊지 않으시다, 찌.]
에리우가 섣불리 인간과 싸우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물론 그녀가 쓸데없는 희생을 내고 싶어 하지 않아서이기도 했으나 그 이상으로 인간들 측의 최강자인 정시우와 싸우고 싶어 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바로 그 억제제인 정시우가 이렇게나 길게 자리를 비웠으니, 인간들이 자꾸 깐죽대면 그녀의 인내심이 금방 바닥을 드러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에리우 님께서 기껏 몬스터들을 몰아내고 인간들이 이계에 대한 방비를 튼튼히 할 여지를 주었더니, 그렇게 얻은 여유로 우리 토종 몬스터들을 몰아내려고 하는 거다, 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종자들이 있을 수 있나, 찌!?]
“그런데 엘의 명을 따르는 몬스터 규모는 정말 장난이 아닐 텐데, 인간들이 무슨 배짱으로?”
[우리가 왕국을 세우기 위해 확보한 영역에 핵무기를 투하하고 화학 병기를 살포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다, 찌. 그러니 무리를 이루지 말고 헤치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펼치는 거다, 찌.]
화학 병기에 핵이라니, 대체 언제적 발상인가. 토종 몬스터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뤄 영토까지 확보했으니, 그야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기는 했으나 핵으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을 하다니 이미 코미디 이상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래도 오빠, 그건…….”
“지금 상황에는 충분히 유효하지. 정말 짜증나는 짓들을 해 주는데그래.”
애초에 인간이 이세계의 몬스터들을 상대로 핵이나 화학 병기를 쉬이 구사하지 못했던 것은 그것을 사용한 후 대지가 오염될 것을 우려해서였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인간이 아예 포기해 버린 영역에 대해서라면 얼마든지 거리낌 없이 무기를 쓸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래, 바로 지금 같은 상황에는.
“엘을 비롯한 고위 몬스터들에게는 절대로 통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 같은 잡몹들은 원킬이다, 찌.]
사리테는 스스로 그런 말을 하면서도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자존심 챙길 여유도 없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사막의 낙원만으로는 에리우 님의 뜻을 따르는 몬스터들을 모두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찌. 지구의 대지 위에 영토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찌.]
“지상의 모든 몬스터를 통합했다면,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인간들은 평화를 원한다면 알아서 헤치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만 늘어놓고 있고, 에리우 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실 생각이 없는 것이다, 찌. 기껏 말이 통해도, 협상이 시작되지도 못하니 의미가 없다, 찌.]
정시우의 눈으로 본 엘은 결코 성질이 급한 몬스터가 아니었지만, 정시우가 아닌 다른 이들의 눈에도 그랬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성대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준비해 두었던 다른 카드를 언급했다.
“……마리나는?”
[그 여자는 최선을 다했다, 찌. 그런데 이 이상 하면 몬스터들과 붙어먹은 천하의 역적이 될 판이다, 찌. 반년 동안 다른 인간들도 많이 강해졌다, 찌. 그 여자들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찌.]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아니, 됐다.”
말을 더 이어 가려던 정시우는 사리테의 표정을 보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더 이상 캐물어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이미 일은 터졌고 다른 이의 손으로 수습할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서 있었다. 애초에 정시우가 그녀에게 한 제안으로 일이 이렇게까지 발전했으니, 마무리 또한 그의 손으로 해야 했다.
‘정말로 꺼내 들기는 싫었지만 나와 엘 모두가 상정해 두고 있었던, 마지막 해결책으로 말이지…….’
확실히 당장의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그 뒤가 고행일 것이다. 정시우에게도, 인류에게도.
그래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시우는 품 안의 유고의 파편을 만지작거리다가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엘한테로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