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
197화.
헤데아의 힘으로 가득했던 수중던전.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압력을 가하는 신성한 영역이 지금, 더러운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큰 상처를 입고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정시우의 피로, 지금 이 순간도 너무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바람에 상처가 벌어지고 있는 세이락시아의 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백 번, 수천 번이고 성화에 지져져 몸이 화상으로 얼룩덜룩하게 변한 크라켄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와 먹물로.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감히 짐작하기도 힘든 크기의 신체를 지닌 크라켄의 전신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들었으니, 정시우와 세이락시아가 이룬 위업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것으로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분한 점이 있다면 아직까지 놈의 생명에 직결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놈의 동체는 거대해도 너무나 거대했고, 두터운 피부를 완전히 뚫고 뇌나 내장기관에 타격을 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후, 후우…… 우리가 얼마나 이러고 싸웠지?”
[뿌우우…….]
정시우는 자신의 한계를 진즉 넘어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수십 시간이고 몸을 놀리는 일에는 익숙했지만, 그것은 자신에 비해 미약한 상대를 짓밟는 일이었지 자신보다 격상의 존재를 상대로 매 순간순간 집중하며 전투를 벌이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헤데아시여!]
“칫…… 또 온다!”
[뿌우우우우!]
그러나 지금은 푸념을 늘어놓을 시간도 아깝다. 한껏 고양된 정신과 집중상태를 유지하며 놈의 공격을 피하고, 어떻게든 한 방이라도 더 놈에게 유효타를 먹여야 했다.
가능 불가능을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 그것을 거듭할 따름이다.
[죽어라!]
족히 수만 리터를 넘기는 피를 흘려 본체의 힘이 약화되기는 했지만, 바닷물에 놈의 피가 섞여 들어간 만큼 물을 가공해 공격하는 능력만큼은 강화되어 있었다.
놈의 마력과 피로 변형된 바닷물은 빠르고 자유롭게 변이하며 정시우와 세이락시아의 목을 조르려 들었다. 수천, 수만 줄기로 갈라진 바닷물의 밧줄이 각각 금강석이라도 쪼갤 파괴력을 품고 쇄도하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으나, 이미 수천, 수만 번이나 그것과 마주해 온 정시우에게는 지겨운 장애물에 불과했다.
“이젠 슬슬 안 통한다는 걸 깨달아도 될 텐데.”
[뿌우오오오오오오오!]
정시우는 놈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며 영역을 활성화했다. 거부의 힘, 파에토의 힘, 세이락시아의 힘이 한데 섞여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을 뿜어내는 마나의 영역!
그 안으로 들어온 물줄기들은 순식간에 기세가 꺾여, 다음 순간에는 마나 드레인에 의해 정시우의 마나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이내 모든 힘을 그의 망치에 실어 냈다.
“뒈져!”
[키학!]
한껏 거대화한 마신의 징벌이 크라켄의 몸통을 강타했다. 한 발, 한 발이 도시를 파괴하고도 남을 만큼 묵직한 일격이었으나 결국은 놈의 몸통에 지울 수 없는 화상과 피멍을 하나 더 만들어 주는 것으로 끝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헤데아 님께서 주신 이 육신에 몇 번이고 흠집을 내다니……!]
“흠집이라 이거지…….”
한 대라도 맞으면 절명에 이르기 십상인 공격을 돌파해 필사의 일격을 먹여도, 적에게는 그것이 흠집에 불과하다. 그런 순간을 수만 번이고 반복하다 보니 제아무리 정시우라 해도 지치지 않을 수 없었다.
[용서할 수 없어. 널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헤데아 님께의 공물로 올리리라!]
“하.”
과연 이 전투에 끝은 오는 것일까? 정시우는 막연히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몸을 놀렸다. 육신보다 먼저 정신이 지쳐 나가떨어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수만 번으로 안 되면 수십만 번 두들길 뿐이다.”
[뿌이!]
그런데 정시우가 세이락시아를 북돋워 재차 돌진하던 그때, 크라켄이 몸을 수중으로 강하게 튕겨 냈다.
물을 조종해 공격하는 것으로는 뾰족한 효과를 보지 못하니 육탄전으로 방향을 튼 것일까? 하지만 이미 이 패턴도 몇 번이고 겪어 익숙했다. 놈에게 적응한 이상 마나든 육체든 공격을 피해 내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이것이…… 사도의 힘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지는 장면이 바로 그 순간 펼쳐졌다. 가뜩이나 거대했던 놈의 육신이 걷잡을 수 없이 사방으로 확산되며, 정시우와 세이락시아를 순식간에 압박해 온 것이다.
“뭐……?”
[뿌, 뿌우우우……!]
먹물을 이용한 감각 차단 공격 이후 더는 놈에게 놀랄 일이 없으리라 믿었는데 아니었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른 존재감, 강압적으로 공간을 구기고 들어오는 크라켄의 육신에 밀려나 소멸되는 마나의 영역! 단순히 먹물로 감각이 차단되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마력과 육신이 하나가 되었을 때, 존재의 한계는 사라지는 것이다! 오만한 필멸자여, 그 자그마한 육신으로 발휘하는 힘에는 나도 놀랐지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크학!”
사방이 놈의 육신으로 틀어막혀 오갈 데 없는 상황에서 날아든 공격을, 정시우는 차마 피해 내지 못하고 맞받아야 했다. 그 타격에 실린 힘은 종전에 비할 바 없이 강력하여, 기어이 피를 또 한 바가지 쏟아 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뿌우오오오오!]
‘일단 피해야 해……!’
그러나 피할 곳이 없었다. 긴급탈출을 쓴다고 해도 사방이 놈의 살덩어리로 틀어막혀 있어 이동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스킬을 구사하려 해도 뭔가에 틱, 틱 튕기는 느낌만 들 뿐 스킬을 발동시킬 수가 없었다.
반면 놈은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몸집으로 정시우를 압박하는 한편으로 피부로 물줄기와 먹물을 뿜어내 그를 공격해 올 수 있는 만큼 공격에 훨씬 유리한 상황!
“이, 빌어먹을……!”
정시우는 어떻게든 사방으로 성화를 두른 망치를 휘둘러 공간을 확보하려 애썼지만, 이미 고통에 적응한 크라켄은 육신이 실시간으로 지져지며 피가 터지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압박해 왔다.
수십 시간 계속된 전투 속에서 놈도 정시우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시우를 자유롭게 풀어 주느니 상처를 감수하고라도 승기를 잡았을 때 몰아쳐야 한다는 사실을!
‘아니, 잠깐만…….’
정시우는 자신을 감싸려 몸을 내던진 세이락시아 너머로, 팽창하는 육신으로 그들을 뒤덮어 압사시키려는 크라켄의 살점을 보며 경악했다.
단순히 놈이 헤데아에게 받은 권능으로 육신을 확장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놈은 바깥으로 분출된 자신의 피를 양분으로 삼아 육신을 확장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구나, 그래서 여태까지 몸집을 불리지 않았던 거야…… 아니, 못했던 거야!’
마력과 육신이 하나 된다는 놈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놈은 마력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의 일부, 즉 피를 사방에 흩뿌릴 필요가 있었다. 놈은 완전한 신이 아니었기에!
마력과 피, 모두를 방출할 만큼 방출한 후에야 지금과 같은 위용을 뽐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아챘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뭐가……. 피에서 비롯되었다지만 저건 이미 완벽한 놈의 육신으로 화한 상태야. 내가 뭘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
놈의 공격으로 정시우와 세이락시아가 완전한 사망에 이르기까지 소모되는 시간은 불과 몇 초. 놈이 육신을 불리는 메커니즘을 알아냈다고 해서 뾰족한 대응 방법이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설령 대응 방법이 있다고 해도 몇 초 만에 실행에 옮길 수는…….
‘잠깐.’
정시우의 머리만 한 빨판이 돋아난 거대한 다리가 정시우와 세이락시아의 몸을 휘감고 거세게 졸랐다. 마력으로 강화된 놈의 다리는 마포대교도 휘감아 끊을 수 있을 만큼 끔찍한 압력을 주었다.
그 상황에 정시우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에 대해.
‘나에게도 가능할까.’
당연하지만 불가능했다. 그는 크라켄처럼 마력과 깊이 동화된 육신 따위는 지니고 있지 않았고, 방대한 마력도 없었을뿐더러 많은 피를 뿌려 낼 만큼 기력이 남아 있지도 않았다. 바닷속에 퍼진 그의 피는 이미 크라켄에게 삼켜진 지 오래였다.
[뿌우…….]
그때 세이락시아가 힘없는 소리를 내며 그를 꼭 붙잡았다.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마나와 체력까지도 그에게 보내 오고 있었는데, 조련 스킬로 인해 맺어진 끈끈한 관계 덕에 전혀 소모 없이 즉각 그의 기운을 보충시켜 주는 것이 실로 경이로울 정도였다.
‘……!’
정시우의 머릿속에 번개가 친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말도 안 되는 잡생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냉정하게 실현 가능성을 따져 보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여태까지도 상식을 뛰어넘는 일을 많이 저지르고 당해 온 정시우였으나, 지금 하려는 것은 그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인식해 오고 있던 생물의 기본적인 정의를 완전히 무시하는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무척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기도 했다.
“뿌이, 가능할까?”
[뿌이.]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정시우가 무슨 말을 하든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실로 경솔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놈이 정시우가 자신과 ‘합체’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래도 마음 편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을까!
‘이럴 때 아린이가 거침없이 태클을 걸어 줘야 하는데.’
수아린의 목소리가 그립다. 하지만 더 그녀를 추억하고 있다간 다시는 그녀와 만나지 못하게 될 터, 정시우는 마음먹은 일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세이락시아 다음으로 준비된 수단을 펼쳤다.
“전부 와라!”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도 세계 각지에서 그의 명을 수행하고 있을 유령들을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일이었다.
[주인님!?]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물론 육체와 영혼을 모두 지니고 있는 그의 심복이며 군단장인 케이나였다. 순간적으로 크라켄의 공세가 아주 조금 느슨해졌지만 이내 그녀까지 범위에 넣고 졸라 오는 통에 케이나는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괴로워해야 했다.
[이런 고통까지 나눠 주려 하다니! 주인님을 좋아하지만 뭐든지 같이 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란 말이다! 죽기 전 정도는 베토에게 온전히 할애하고 싶었는데!]
“우리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고통이다, 이 녀석아!”
[주인님!]
[부름을 받고 달려왔습니다!]
케이나뿐만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수천, 수만에 이르는 숫자의 유령들이 그 좁아터진 틈새에 소환되며 어떻게든 크라켄을 밀어냈다.
크라켄의 힘이 압도적인 터라 그 순간에도 수백 명인가의 유령이 그대로 역소환됐지만, 그 정도로는 가렵지도 않았다.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조금 더 발버둥을 쳐 보려는 것이냐, 실로 추악하구나!]
“그래, 추악한 발버둥을 더 쳐 보려고 한다……!”
정시우는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오른손으로는 세이락시아의 몸통을 강하게 부여잡고, 소울 포스의 문신이 새겨진 왼손으로는 케이나의 손을 붙잡는 것으로 그녀와, 그녀와 연결된 모든 유령들과 손을 붙잡았다.
“후우우우…….”
자신에게 부족한 육신을, 완전히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 세이락시아로 충당하며.
자신에게 부족한 마나를, 그의 일부나 다름없는 유령들로 충당한다.
그렇게 해서 놈에게 대항할 수단을, 보다 강력하고 거대한 자신을 연성하는 것이다.
“나만 믿고 따라와라.”
[절대로 믿고 따라갈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씁, 어쩔 수 없나…….]
엉망진창으로 파탄 난 논리, 기합과 의지만으로 밀어붙이는 계획. 언제나보다도 무모한 정시우의 선언에 케이나는 한숨을 쉬고 말았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따라가겠다, 주인님.]
“좋았어.”
[음……? 그 버러지들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지?]
크라켄은 한심하다는 투로 말을 걸어오면서도 보다 거세게 정시우와 그의 종속들을 조여 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정시우를 막을 수 없었다.
‘제발…….’
“성공해라!”
눈앞에 피와 마나로 몸집을 부풀린 크라켄의 모습이 있다. 한낱 신의 시종에게 가능한 일이 그에게 불가능할 턱이 없다.
정시우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의지와 기원을 담아, 마나를 한껏 활성화했다.
[고유능력 ‘지배’를 자각하였습니다.]
그 순간, 어렴풋이 깨닫고 있던 두 번째 고유능력이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직후 그의 전신에서 빛이 일어, 세이락시아와 케이나를 비롯한 그의 권속들을 모두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