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192화.
[수중던전으로 진입합니다.]
[초기 진입입니다. 가장 마력 분포도가 얕은 A-18구역으로 잠입합니다.]
“음?”
세이락시아를 타고 다시 심해관 내부로 돌아와 무사히 수중던전으로의 입장을 마친 정시우는, 던전에 입장하는 순간 그의 망막을 채우는 문자의 나열을 보며 순간 위화감을 느꼈다.
“A-18구역……?”
그러고 보면 수중던전은 개미굴처럼 별도의 탐색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늘성조차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선 단계에 맞추어 순서대로 던전을 찾아 들어갈 필요가 있는데, 이곳은 그냥 심해관의 마법진을 통해 들어서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시우는 처음에 던전 입장 과정이 완전히 랜덤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메시지는…….
“A-18구역이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지.”
“어쩌면 그게 던전의 이름일까요……? 그보다도 던전의 규모는 어때요, 오빠?”
수아린의 물음이었다. 정시우는 감각을 보다 확장하여 던전 전체로 규모를 넓히며 그녀에게 답을…… 답을 해 주려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 이렇게 넓어? 던전 안이 하나의 아공간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세계가 통째로 들어와 있는 것 같은데. 스스로가 내린 결론을 말도 안 된다고 비웃으며 고개를 든 정시우는,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푸르디푸른 바닷속 풍경에 절로 압도되고 말았다.
아니, 그보다도 압도적인 것은 바로 그 안에 깃든 힘이다. 미증유의, 시작점도 종지부도 알 수 없는 힘. 너무나 막대하고 거대하여, 개인이 적대한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힘.
“터무니없는 힘인데, 이거…….”
적어도 정시우가 있는 힘껏 친 정도로 상대는 정시우를 알아차리지도 못하리라. 다른 던전도 지구와는 별개의 환경이라고 느낀 적이 많았지만, 이곳은 그중에서도 별격이었다.
스테이지로 따지면 7스테이지 정도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마 던전 깊숙이 나아가면 더더욱 단계는 올라갈 것이다.
[신의 힘이 느껴진다. 다수, 아니…… 다수처럼 느껴지는 단수인가?]
과거 정시우 이상으로 많은 신의 흔적과 조우하고 싸워 왔던 케이나의 말이었다. 정시우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며 좀 더 마나를 뻗어 보았다.
처음엔 잘 뻗어 가던 그의 마나는 30킬로미터, 100킬로미터로 뻗어 나갈수록 심하게 압박해 오는 신의 힘에 눌려 기세를 잃고 말았다. 정시우는 이 깊은 바닷속 어딘가에 있을 신의 흔적의 크기를 가늠해 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어 말했다.
“하나야.”
“하나라니 뭐가요?”
“수중던전.”
일행이 못 알아들은 것처럼 보이자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심해관을 통해서 입장할 수 있는 수중던전은 처음부터 하나였던 거야. 지구의 해상에, 던전이라곤 단 하나밖에 없어.”
“……맙소사.”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규모로군요…….”
수아린이 경악하고 용세하가 감탄했다. 정시우도 루타가 이전에 했던 경고를 그제야 정확히 이해한 기분이 되었다.
“하늘성만 해도 수만, 수십만 개의 던전이 있지. 물론 종류가 같은 던전도 많지만, 최소한 그 안에 나타나는 몬스터의 행동 패턴이나 숫자, 레벨, 기록은 달라. ……그럼 던전이 나뉘는 이유는 뭘까.”
[첫째로는 신의 세력이 나뉘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그들이 오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데 이 던전은…….”
그 모두가 통합되어 있었다.
어쩌면 바다와 관계된 신은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고, 지금 지구로 들어와 있는 수중 몬스터도 지상의 몬스터들이 그렇듯 무수한 다른 세상으로부터 밀려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바다라는 공간을 매개로 모두 통일되어 있다. 서로에게 자연스럽게 녹아 들어가, 일체화하여 하나의 목표…… 아마도 지구의 바다를 그들에게 통합시킨다는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기에 던전 하나에 힘을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시스템의 개입이 낳은 성과는 아마도 단 하나야. 이 던전을 신의 힘의 밀도에 따라 구역별로 나눈 것.”
처음 던전에 입장했을 때 들려온 A-18이라는 구역명이 필시 그것이다. 어쩌면 이 영역 내의 몬스터들을 처리하면 던전에서 나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이 던전을 상대하기 위해 심해관의 설계자가 짜낸 유일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물론 정시우는 구역 하나 정도로 만족하여 물러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던전은 턱없이 넓어. 지금 이 순간도 던전의 옆구리가 터져 무수한 숫자의 몬스터들이 지구의 해상으로 방출되고 있을 정도야. 토종 몬스터들이 우세를 점하게 해 주려면 최소한 던전의 절반을 쓸어버리지 않으면 안 돼.”
[절반이라니 말은 쉽군.]
“이세계로 넘어가기 전 몸을 풀기 위해서라고 들은 것 같은데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유령들을 동원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도 한결 쉬웠을 텐데, 지금 지구의 상황은 정시우의 몸이 하나가 남지 않는 것이 아쉬울 만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면 엘과 협력하여 이계의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는 토종 몬스터 군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몸이 하나 더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주인님의 고유능력이 분열이 아닌 게 아쉽군.]
그렇다고 이 던전을 헤쳐 나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정시우는 조용히 세이락시아에게 지시하여 녀석의 몸통을 원래의 크기로 돌려놓고는 전속력으로 헤엄치게 했다. 그와 함께 용의 위엄을 적극적으로 퍼트리기 시작했다.
“으으, 소름 돋아.”
“몬스터들이 몰려오는 것이 보입니다!”
A-18구역은 신의 힘이 별로 닿지 않는 외곽 지역임에 분명했다. 그럼에도 몬스터들의 수준은 레벨 100 전후였는데, 정시우는 녀석들을 일별하곤 코웃음을 치며 용세하와 케이나에게 지시했다.
“세하는 왼쪽, 케이나는 오른쪽. 지금부터 중앙으로 몬스터들을 몰이 한다.”
“아, 전에 개미굴에서 서브 스리에 도전했을 때 써먹었던 전법의 업그레이드 버전이군요.”
[주인님, A-18구역을 벗어나 다른 구역에까지 주인님의 도발이 먹히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 이미 알고 있다면 됐다.]
던전마다 규모가 다르고 몬스터 구성이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하나의 던전에는 천을 넘기는 숫자의 몬스터가 머무르고 있다. 수중던전의 ‘구역’은 그보다도 조금 규모가 커서, A-18구역에만 족히 5천은 되는 숫자의 수중 몬스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말 그대로 대기였다. 언제고 지구의 바다로 풀려 나가게 될 순간을 고대하며 자신의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샤아아아아아]
[이곳은 신성하신 헤데아 님의 영역. 날벌레가 설치게 놔둘 수는 없다.]
그런데 그것을 정시우가 있는 한껏 존재감을 드러내며 방해하니, 단숨에 그를 짓밟아 버리고 다시 대기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놈들이 일시에 사방에서 들이닥쳐 왔다.
[무한의 바다에 겁도 없이 들어서, 주제도 모르고 기고만장해하는 꼴이 우스워.]
[더는 저자의 천박한 마나에 이 바다의 순수가 위협을 받지 않게 해야 해!]
[그런데 봐, 저 마나는 어디선가…….]
그 가운데에는 인어의 모습도 많았다. 신의 힘이 별로 닿지 않는 구역이었기에 대체로 레벨 100 이하의 허접한 인어들이었지만, 단순한 수중 몬스터에 비해 전투의 패턴이 다양하기에 충분히 경계해야 할 적이었다.
지금 이곳에 쳐들어온 것이 정시우가 아닌 다른 인간이었다면 말이다.
“세이락시아, 협공이다.”
[뿌오오오!]
어린아이는 어쨌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고 싶어 한다. 세이락시아도 그리 다르지 않은지, 정시우의 목소리에 그저 좋아서 날뛰었다.
그것이 수중에서 격렬한 회오리를 일으켜 인어들을 덮쳤다.
[꺄아아아아아악!]
[큭! 저 괴물은 헤데아 님에게서 비롯되지도 않았으면서 물의 힘을 다루는 그 이레귤러잖아!]
[대체 어떻게 저 괴물이 이곳에…… 어……!?]
물속에 살면서 물의 힘을 다루는 세이락시아의 악명은 과연 이 던전에서 대기하고 있을 뿐인 인어들 사이로도 확실히 퍼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녀석에 더해 정시우까지 이곳에 있었다.
“그럼 간다!”
[뿌이!]
정시우가 수중에서 해머를 꺼내는가 싶더니, 그것을 거대화하여 그대로 전방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자 세이락시아가 일으킨 것과 비견될 만큼 끔찍한 충격파가 물의 회오리를 만들어 내어 녀석의 것과 나란히 겹쳐지더니, 놀랍게도 상승효과를 일으켜 그 크기를 불렸다!
[꾸아아아아아악!]
[피해, 아니, 피할 수 없어! 배리어, 배리어를!]
터무니없는 규모로 생성된 회오리에 인어들이 무참히 휘말렸다. 물을 직접 조종하는 세이락시아의 스킬은 그렇다 치고, 정시우는 단순히 물리력으로 충격파를 만들어 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인어들을 살육하기에 충분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정시우는 그 광경을 보며 홀인원을 성공시킨 골프 선수처럼 상쾌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좋았어.”
“좋았어, 가 아니에욧! 대체 물리력과 마력을 어떻게 저렇게 자연스럽게 섞은 거예요!?”
마력이든 물리력이든 현상으로서 나타나 관측되는 힘은, 그것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은 결국 같다.
즉 마력과 물리력에 구애되지 않고 ‘힘’ 그 자체를 똑바로 관찰하고, 그것에 힘을 보태 주는 정도라면 용의 감각을 지닌 정시우에겐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이대로 설명하면 수아린이 또 그를 엄청나게 째려볼 것이다.
따라서 정시우는 그것을 설명해 주는 대신 공격을 계속 이어 나갔다.
“조련 스킬의 기본은 나의 마나를 받아들이는 이를 나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
세이락시아를 정시우의 일부로서 받아들인다면 세이락시아가 발휘한 힘을 자신의 힘으로 취급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할 터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세이락시아의 스킬로서 발동한 저 회오리를 대상으로 그의 액티브 스킬인 반복재생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
덤으로 저 공격에는 정시우가 해머를 휘둘러 만들어 낸 물리적인 충격파가 섞여 있으므로, 패시브 스킬인 타격전이의 힘까지도 더해 주는 것이 가능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터무니없는 규모로 완성된 회오리가 수천 마리의 인어를 동시에 휩쓸었다. 케이나와 용세하가 돌진할 기회조차 없었다. 인어들은 회오리에 휘말려 지리멸렬하게 분해되어, 그 끝에는 세이락시아가 한껏 크게 벌린 입을 통해 녀석의 먹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A-18구역이 클리어된 순간이었다.
“사기잖아욧!”
“사기가 맞아!”
정시우가 실로 상쾌한 미소로 긍정했다! 정시우가 카오스 윙을 얻고 이런저런 면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런 단순한 공격만으로 몬스터들을 전멸시키는 수준으로 변모하다니, 수아린의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이렇게 강해진 오빠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다니, 신들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수아린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지만 이내 그것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그녀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시우는 그저 씩씩하게 외칠 따름이었다.
“좋았어, 뿌이! 이 기세로 이 던전을 전부 먹어 치우자!”
[뿌오오오오오오옹!]
세이락시아의 기운찬 대답을 대충이나마 해석하자면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요’ 정도라고 볼 수 있었다. 세이락시아에게 호랑이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한 그들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