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191화.
오랜만에 찾은 심해관은 한창 난리통을 겪고 있었다. 다름 아닌 크레센트 에이지로의 진입 때문이었다.
[신입은 이쪽으로 정렬해라!]
[교전은 어떻게 되고 있나, 세이락시아는 잘 버티고 있나!?]
[저쪽도 일단 수습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세이락시아도 귀환하고 있습니다!]
“전쟁터가 따로 없네.”
심해관과 연결된 수중 몬스터들의 터전, 해저도시 안에서 이전 정시우가 들렀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숫자의 수중몬스터들이 부산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제사장 세루타의 모습도 그곳에 있었는데, 이전보다 마력이 한층 강력해진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몬스터만의 특징이지. 인간보다 훨씬 세상과 마나의 영향을 쉽게 받기에, 자신이 맡은 직책이나 스스로 세운 업적에 의해 금세 모습을 바꾸는 거야. 그렇기에 한없이 강력해질 수 있는 존재지만, 동시에 허무하게 스러질 가능성도 함께 지니고 있지…….]
“대충은 알 것도 같아.”
정시우는 케이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며 바닷속을 유영했다. 카오스 스케일만 있을 때에도 수중을 지상처럼 자유로이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는데, 거기에 카오스 윙이 추가된 지금은 하늘을 날아다니듯 빠르게 수중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앗, 저 인간은…….]
[신님이시다! 우리를 이곳에 머무르도록 허하신 신의 재림, 그것이 바로 저분, 새로운 신이시다!]
세루타가 잽싸게 반응했다. 지팡이를 들어 올린 그가 제물을 바치는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양팔을 높이 벌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이시여!]
“아, 그래.”
세루타의 말에 모든 수중 몬스터들이 눈을 반짝이며 정시우를 경배했다. 이미 오해는 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이젠 신이 아니라고 해도 안 믿겠지. 정시우는 그들 좋은 대로 생각하도록 놔두기로 했다.
“많이 밀리고 있냐?”
[아닙니다. 비록 혼란스러운 상황이기는 하나 무력의 균형은 이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저들에게 닥쳐 온 변화만큼 우리의 성장도 확연합니다!]
약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세루타가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나 뒤이어 조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신께서 친히 저들의 본영을 한 번 휘저어 주신다면 앞으로 확실한 우세를 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해서 좋구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처음 하늘성이 생겨난 순간부터 수중던전 또한 마찬가지로 생겨났다고 가정하면, 지금 이 순간까지 방치된 수중던전의 숫자는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좋아, 그럼 바로 가지.”
[세이락시아가 오거든 그 아이를 데려가시지요. 그 아이는 항상 신님을 그리워했습니다. 분명 곁에서 보좌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사람도 아닌 고래가 자신을 그리워했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알 수는 없지만, 정시우는 일단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수중던전에는 나, 그리고 나와 계약관계로 묶여 있는 녀석들만 들어갈 수 있어.”
[그렇다면 세이락시아와 계약관계를 맺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걸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으면 여태 내가…….”
까지 대꾸하다 말고 정시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수아린, 용세하와는 플레이어와 서포터의 관계로, 케이나와는 소울 포스를 통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로 묶여 있기에 그들을 던전에 대동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방법 외에 다른 이를 던전에 대동할 방법이 정녕 없는가?
[뿌오오오오오옹!]
정시우가 한창 자신의 능력과 그 한계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찰나, 어딘가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대 고래 세이락시아가 도시 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세이락시아가 귀환했다!]
[생존자들을 맞이해. 어서 치료해라!]
[세이락시아!]
도시 내의 모든 수중 몬스터들이 고래를 맞이하며 환호했다. 레드 카펫을 밟는 인기 스타를 보는 것만 같은 광경이다. 그러나 녀석은 정시우를 발견하자마자 함께 돌아온 동료들을 내버려 두고 그에게 달려왔다.
[뿌오오오오옹!]
“녀석…….”
“왜 저렇게 오빠를 좋아하는 거람. 혹시 암컷은 아니겠지……?”
수아린이 또다시 쓸데없는 걱정을 시작할 무렵 세이락시아가 정시우 앞에 멈추었다.
막 도시 안으로 들어왔을 때만 해도 크기가 어마어마했던 것 같은데 용케도 도시 내부의 건물들을 무너트리지 않고 심부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하던 찰나 정시우는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다. 녀석의 크기가 상당히 줄어 있었던 것이다.
“크기까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거냐. 대단한걸.”
[뿌우우오오오.]
세이락시아는 정시우의 칭찬에 등으로 물을 뿜어내며 기뻐했다. 그러는 동안 크기가 더욱 작아졌는데, 종국엔 사람 두 명 타면 딱 맞을 사이즈로까지 줄었다. 정시우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놀아 줄 시간이 없어. 바로 수중던전으로 들어가 봐야 해.”
[뿌우우우우우.]
오랜만에 찾아와서 고작 머리 몇 번 쓰다듬어 주고 갈 뿐이라니. 세이락시아가 투정을 부리듯 울음소리를 내며 그의 허리에 머리를 부볐다.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녀석을 달래다가는 아까 했던 고민을 떠올렸다.
‘하늘성이 되었든, 개미굴이나 심해관이 되었든 결국엔 자격이 없는 자를 걸러 내기 위한 관문에 불과하지. 하지만 내가 날개를 얻는 과정에서 고유능력으로 시스템을 거슬렀던 것만 보아도 명확하듯 이 시스템은 결코 절대적이지 않아.’
다시 말하자면, 어떤 방법으로든 외부인, 혹은 외부요소를 던전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의 경우 토종 몬스터인 세이락시아를 수중던전 안으로 데려가는 것이 목표인 셈인데, 당장 그의 능력으로는 이렇다 할 방법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뿌이이이이이.]
정시우가 고민하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세이락시아가 더욱 적극적으로 그에게 애교를 부렸다. 마냥 사랑을 받는 것은 익숙하지 않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녀석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가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조금 더 녀석과 놀아 줄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던 그때, 정시우의 몸속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꿈틀했다.
[두 번째 고유능력을 해방하기 위한 조건이 추가로 달성됩니다.]
정시우가 딱히 뭔가 적극적인 행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세이락시아의 마나가 정시우의 마나와 교감하는 순간, 잊고 있었던 감각을 되찾는 것만 같은 전율이 그의 몸을 타고 흐른 것이다.
자신에게서 비롯되지만 타인에게 보다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 그에게 내재된 두 번째 고유능력이란 어쩌면 타인을 필요로 하되 끝내 자신에게 수렴되는 고유능력인 강탈과는 사뭇 다른 능력이 아닐까, 정시우는 생각했다.
[고유능력의 편린을 스킬로 다룰 수 있게 됩니다. 플레이어 고유 스킬 조련(액티브)을 익혔습니다. 자신의 마나를 다른 존재에게 베푸는 것으로 대상을 자신을 닮은 방향으로 성장시키며, 자신에게 소속시킵니다. 단 강제성이 없으므로 둘 중 어느 한쪽이 바라는 순간 스킬이 취소됩니다.]
결정타는 바로 고유능력의 편린에서 비롯된 액티브 스킬이었다. 스킬을 획득하는 순간 그의 전신에 새기듯이 강하게 흐르고 지나간 특유의 마나 흐름을 곱씹으며 정시우는 대충 나중에 자신이 얻게 될 고유능력의 정체를 간파해 내는 데 성공했다.
[뿌우우우! 뿌이이이이이!]
세이락시아가 내는 울음이 도시에 울려 퍼졌다. 전투로 상처 입은 이도, 이제 막 전장에 나갈 준비를 하는 이도, 이제 막 태어난 이도, 싸울 힘이 없는 이도 모두가 세이락시아를 올려다보았다.
[조련 스킬로 Lv335 세이락시아를 조련합니다. 상대가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스킬 레벨이 낮음에도 성공적으로 발현되었습니다.]
[조련 스킬이 Lv8이 되었습니다.]
정시우가 스킬을 얻는 그 순간 이미 정시우와 세이락시아의 교감은 시작되어 있었다. 그리 많은 양도 아니었지만, 정시우의 마나가 녀석의 거대한 육신에 닿은 순간 그것은 물속에 떨어진 잉크처럼 순식간에 녀석의 전신을 물들였다.
[뿌오오오오오!]
그 결과 무엇이 일어났는가 하면, 녀석의 체내에서 터져 나온 마나와 정시우의 마나가 부드럽게 섞여 발산된 빛 무리 안에서 녀석의 덩치가 더욱더 줄어들었다!
[뿌우우우우…… 뿌이?]
빛이 서서히 가시며 그 안에서 세이락시아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드러냈다. 정시우는 조련 스킬에 따라붙는 설명이 무엇을 뜻했는지 녀석의 모습을 보며 완전히 깨달았다.
[뿌이이.]
세이락시아는 더 이상 고래가 아니었다. 녀석은 물처럼 푸른 단발에 푸른 눈을 지닌 작디작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래 가죽과 비슷한 재질의 옷을 입고 멍하니 눈을 끔벅이고 있는 모습이 실로 귀여운 미소년.
“헉, 귀여워.”
세이락시아가 정시우에게 흑심을 품고 있다는 가당치도 않은 오해를 하고 있던 수아린마저 무심코 그런 말을 흘릴 정도였다. 세이락시아는 완전히 변한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만지는가 싶더니, 고래였던 때와 변함없이 능숙하게 물속을 움직여 정시우에게 다가왔다.
[뿌이?]
“아직 겉모습만 인간이지 발성기관은 미스테리하기 짝이 없는 상태 그대로구나.”
[뿌우우.]
녀석의 머리에서 가느다란 물줄기가 솟았다. 이상한 것은 발성기관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양새였다. 정시우는 그것을 보며 피식 웃어 버리곤 세이락시아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덕분에 내게 숨겨진 힘을 발현해 낼 계기를 찾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고맙다.”
[뿌이.]
녀석은 정시우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좀 더 애교를 부리다가는 이내 다시 빛에 휩싸여 고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직 정시우의 조련 스킬 레벨이 높지도 않고, 녀석도 인간의 형체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본 모습에 비하면 훨씬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아앗, 귀여웠는데…….”
“어쨌든 이 녀석도 던전에 데려갈 수 있게 됐어. 서포터 관계나 혼의 종속 관계에 비해선 연결이 약하긴 하지만…… 뿌이 본인이 날 따르고 싶어 하는 한 어떻게든 될 거야.”
보다 구체적으로는, 조련 스킬의 옵션에 의해 세이락시아가 정시우를 닮는 방향으로 성장하게 되며, 던전에 입장할 때 세이락시아가 정시우의 일부인 것처럼 속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세이락시아의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시우 본인의 마나 컨트롤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이제 와 이 정도 일은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래, 던전에 따라올래?”
[뿌우우우우우!]
조금 큰 돌고래 정도의 크기로 돌아온 세이락시아가 정시우의 권유에 기쁘게 울었다. 조금 전의 인간화로 녀석이 수컷임을 알게 된 수아린도 기꺼이 녀석을 일행으로 받아들였다.
[큿, 이렇게 되면 유일한 인외 포지션이었던 내 비중이…….]
“헛소리하는 걸 보니 너도 슬슬 전투가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정시우는 수중에서도 무리 없이 작동하는 팬텀바이크를 케이나에게 넘겨주고는, 본인은 세이락시아의 등에 올라탔다. 세이락시아가 인간으로 변했다가 다시 고래로 돌아오는 모습을 지켜본 수중도시의 모든 몬스터들이 경외의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적당히 정리하고 돌아올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무운을!]
그러나 그때만 해도 정시우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수중던전이 적의 본영이라는 세루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