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
165화.
기갑 오크들과의 전투 이래 정시우 일행은 진형을 다시 바꾸어 전진하게 되었다. 그들의 전투 능력은 둘째 치고, 무지막지한 힘으로 막아서는 탓에 케이나의 돌파가 먹히지 않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갑 오크는 이 강자의 동굴에서도 엘리트의 한 축으로 인정받고 있는 모양입니다.”
나비 날개를 펼치고 정찰을 다녀온 용세하가 정시우에게 보고했다. 녀석에게는 서포터로 거듭난 순간 주어진 은신 능력이 있어, 기동력이 뛰어난 나비 날개와 조화되면 위험한 구역을 정찰하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그깟 놈들이 엘리트라 이거지.”
“개체 수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기세가 매서워져서…….”
오크들과의 전투에서 살짝 실망했던 정시우로서는 내심 잿빛 거인도 오크도 아닌 다른 유형의 몬스터가 나타나 주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기갑 오크들이 주장하던 대로 놈들은 정말 힘의 신 헥토의 주력인 모양이었다.
“보스도 기갑 오크려나.”
“저들의 태도나 혼잣말로 판단하자면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이더군요.”
“씁, 어쩔 수 없지.”
정시우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일단 전진을 명했다. 그나마 이 던전에서 편한 게 있다면 함정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방과 방 사이의 거리도 그리 길지 않아 전투만이 쉼 없이 이어졌다. 함정은 없지만 적을 발견하면 건넛방에서도 건너건넛방에서도 우다다다 달려오는 뇌근육 몬스터밖에 없어 도저히 쉴 틈이 나질 않았다.
[강자임을 증명하고 싶다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나선 안 될 것이다!]
“그건 다굴을 치는 쪽의 대사가 아니거든, 이 새끼들아!”
[크아아아악!]
물론 레벨을 얻기 이전부터 일반적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힘과 체력의 소유자였던 정시우는 사흘 연속 전투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난이도가 너무 쉬워 살짝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놈을 복제라도 한 것처럼 기갑 오크 놈들의 능력과 패턴에 변화가 없는 것이다!
“흐아아아아압!”
[카학!]
해머를 양팔로 지탱하고 자신을 중심축으로 삼아 빠르게 한 바퀴 회전하는 정시우! 게임 캐릭터들이나 구사할 법한 황당무계한 기술은 그러나 곧 끔찍한 파괴력을 품은 태풍이 되어 일대를 쓸어버렸다.
정시우는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해머를 바닥에 쿵, 찍었다.
“이쪽은 끝났다.”
[마찬가지.]
마법생물로 거듭난 케이나는 얘기할 필요도 없고, 상처를 입으라고 고사를 지내도 멀쩡할 것만 같은 정시우와 케이나를 놔두고 용세하한테만 신경을 쓰면 되는 수아린도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렇다. 문제는 오직 용세하에게 있었다.
“후우, 후우. 끝입니다. 전 괜찮습니다, 형님.”
“아직 괜찮냐고 안 물어봤다.”
“아…… 하, 하하.”
강자의 동굴을 맘 편하게 산책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정시우와 케이나가 마력으로도 기량으로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 무식한 힘과 속도를 지닌 몬스터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용세하에게 도전과제였다.
비록 그것을 이겨 내는 과정에서 빠르게 강해지고는 있었지만, 솔직히 정신적으로 슬슬 한계가 닥쳐오고 있었다. 그에게 치유 마법을 퍼붓고 있는 수아린은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제일 큰 성과는 세하가 얻어 가네.”
[좋은 일이다. 우리는 아무래도 용세하에게 진심을 낼 수가 없으니, 정말로 죽일 기세로 덤벼 오는 적들과 끝없는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나면 그 끝에 거대한 성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틀렸어. 이 사람들, 이러다 용세하 씨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아예 무시하고 있어…….”
수아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강함이라는 단어 앞에서 죽음도 불사하는 정시우와 케이나는 닥쳐오는 고난에 기뻐하면 기뻐했지 걱정 따윈 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용세하에게까지 그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 용세하가 스스로 부담을 줄여 달라고 말하기라도 해야 할 텐데…….
“허억, 허억…… 충분히, 쉰 것 같습니다. 형님, 가시죠.”
“좋아, 좋은 근성이다. 그럼 바로 넘어가자.”
“후우.”
용세하는 죽어도 못해 먹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저것은 사나이 자존심인가, 혹은 따로 뭔가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인가.
수아린은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두 눈을 들어 앞을 보는 용세하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설마 죽기 전에는 오빠가 구해 주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후후후.]
“음?”
그러다 문득 옆을 보니, 용세하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케이나의 모습이 있었다.
[역시 녀석은 자질이 있어. 마음에 드는군.]
“이 뇌근육 나이트 같으니.”
[실로 마음에 드는 칭호다. 완벽해!]
그렇다, 완벽하게 글러 먹었다. 수아린은 그쯤에서 슬슬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쨌든 그들이 있어 던전 진행 속도가 쾌속에 가깝다는 것만은 사실이었으니까. 이 던전이 헥토의 힘에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그것은 사뭇 대단한 일이었다.
[죽어라! 네놈을 끝장내고 네가 지키는 나약한 연놈들까지 토막 내 주마!]
“하! 어림없는…… 개소리를!”
그렇게 이틀이 더 흘렀을 즈음, 던전 탐색은 완전히 용세하의 전투 경험과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고 있었다.
기갑 오크들의 괴력과 몸에 익힌 무기술에서도 물론 배울 점은 있었으나 정시우와 케이나는 이미 진즉 그 정수를 뽑아내 스스로에게 적용한 후였다. 그러니 남는 것은 용세하의 성장뿐이었다.
“세하 너도 할 수 있어. 그런 의미에서 여기 감각 있냐?”
“아파서 죽을 것 같습니다, 형님.”
“어쨌든 감각은 있다는 얘기구나. 좋았어.”
드디어 용세하가 약한 소리를 냈다. 기갑 오크와 2대 1로 붙다가 팔을 한 짝 날려 먹고 쓰러진 후였다. 그것을 이용해 용감하게 돌진하여 끝내 놈들을 물리쳤으니, 그 기개만은 인정해 줄 만했다.
“제대로 붙었어요. 움직여 봐요.”
“제대로 움직이는군요…… 하지만 아픕니다, 선배님.”
“생의 증거예요, 그 사실에 감사하도록 하세요.”
물론 그들에게 수아린이 없었더라면 제아무리 일행이 무대뽀라도 용세하를 이런 위험에 빠트리지는 않았을 터다. 지금 용세하의 팔은 제대로 그의 어깨에 붙어 있었다. 점점 더 발전해 가는 수아린의 신성력이 그것을 가능케 했다.
“팔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힘들었을 거예요. 다행이네요.”
“몰라, 그거 뭐야 무서워.”
수아린이 활짝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정시우는 오랜만에 공포감을 느꼈다. 그것은 미지에 대한 공포였다.
얘기를 듣자하니 심장이나 뇌가 완전 파괴되지만 않으면 그녀의 마력으로 어떻게든 된다는 모양인데, 이제 제법 마나와 육신에 대해 깨달아 가는 그라고 해도 신성력의 작동 원리와 구조만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마력으로 그것을 강화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전 오히려 그게 더 놀랍거든요? 신성력을 본인의 마력으로 강화하는 인간은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오빠 정도예요.”
[호오, 본래 신체 수복은 고위 성직자의 대표적인 능력이기는 하다만…… 수아린의 그것에는 확실히 놀라운 면이 있군. 주인님과 계약 관계에 있기 때문인가.]
“뭐든지 다 나랑 엮어서 설명하지 마라.”
“형님, 저 이제 그만 일어나고 싶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출발해 볼까.”
“넵…….”
던전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던전 탐험 중에는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던전은 순수한 본인의 기량의 성장을 확인하기에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나타나는 적의 숫자와 레벨은 점점 높아만 가는데 본인은 극적인 변화 없이 그대로. 그 환경은 자체로 모험자들을 고뇌와 자괴에 빠트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이겨 내고 성장하는 이만이 던전의 끝에 이르러 레벨의 극적인 향상을 겪게 된다. 분명 하늘성의 본 목적은 그렇듯 개개인의 각성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발전에 있었다.
플레이어들이 안전주의를 추구해 대인원, 낮은 단계 던전을 위주로 플레이하는 탓에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본래 이곳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을 위한 육성소인 것이다.
[네놈들이 이곳 강자의 동굴의 심부에까지 이를 줄이야…… 환영한다, 나는 헥토 님 휘하의 15군단, 그 가운데에서도 자랑스러운 제네다 부대의 만부장 에로타다. 하지만 날 평범한 기갑 오크들과 마찬가지로 판단하고 있었다면 곧 후회…….]
“세하야, 이제 저놈만 잡으면 나머진 우리가 할게. 저놈도 다른 놈들보다 덩치 크고 힘 좀 세다 뿐이지 별 다를 거 없어 보인다.”
“알겠습니다, 형님! 하아아앗!”
[감히 내가 말을 하고 있는 도중에 끊…… 크헉!]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용세하는 이곳 던전에 들어와 플레이어가 된 이래 처음으로 격한 성장을, 하늘성과 개미굴의 진정한 존재 의의를 실감한 인물이었다.
던전의 초입에 등장한 기갑 오크 한 마리를 상대로도 혈전을 벌여야 했던 그가, 지금은 무려 스스로를 만부장이라고 자칭하는 기갑 오크의 엘리트와 동수를 이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흐아아아아아압!”
[큭, 이렇게 약한 인간이 어떻게 내 움직임을……!?]
“좋아, 저렇게 전형적인 대사를 내뱉었으니 이제 저놈은 확실히 죽겠네.”
“아, 오빠 쫌.”
레벨로는 거의 30 가까이 차이가 나고, 덩치로는 다윗과 골리앗만큼 차이가 나는 용세하와 오크.
그러나 용세하는 거대한 주제에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도끼를 휘둘러 오는 오크의 공격을 피해 빠르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날카롭게 정련된 랜스의 끝부분이 오크의 빈틈이 드러날 때마다 날아들어 유효타격을 입혔다.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가. 그의 감각이 정시우만큼 날카로워져서? 아니다. 그는 지금 단지 마나를 읽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케이나가 가장 집중하여 그에게 가르친 덕목이기도 했다.
지금 그것이 특히나 대단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오크들의 신체 대신 기계장치에 집중된 마나의 흐름을 읽어 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녀석, 확실히 성장하긴 했어. 역시 까딱하면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성장하기에 가장 좋지.”
[동의하는 바다. 그 시점에서 죽느냐 죽지 않느냐로 전사의 자질은 판가름 나는 것이다.]
“정말 최악이네요…….”
이 사람들은 바이킹이라도 된단 말인가. 물론 지금 용세하의 수준을 보면 그것을 마냥 부정하기도 힘들었지만…… 수아린은 분투하는 용세하의 뒷모습을 지그시 보며 빠른 시간 안에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대론 결국 용세하 씨가 밀릴 거예요. 최소한의 균형을 맞추어 줄 필요가 있어요.”
“음, 그런가?”
“분명해요.”
본의 아니게도 수아린은 그간 정시우와 함께하며 전투의 흐름, 곧 전투의 유불리를 읽는 능력이 빼어나게 발달했다.
그것은 능력 있는 성직자의 필수 덕목이기도 했는데, 수아린의 경우 그것이 어지간한 딜러나 탱커보다도 발달하여 전투 현장에서의 미묘한 우세마저 읽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동료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가 굳건한 성벽이 되어 적을 몰아내리라!”
“후…… 감사합니다, 선배님!”
판단을 마친 수아린이 빠르게 손을 뻗어 내며 주문을 외웠다. 치유 마법 못지않게 발전한 신성 버프 마법이었다. 가뜩이나 용세하를 상대하며 위기감을 느끼고 있던 제네다 만부장은 순식간에 그의 능력이 증폭되는 것을 느끼며 눈을 부릅떴다.
[동료의 도움을 받는가!]
“하, 약한 인간이라던 놈은 어디 갔나.”
“용세하, 축복 마법까지 받고 지면 앞으로 당분간 밥 먹을 때 반찬은 간장으로 통일이다.”
“잔혹해라…… 적어도 계란은 주죠.”
“그건 비겼을 때.”
하지만 다행히도 용세하가 간장계란밥을 먹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거의 반쯤 다리를 잘리기 직전까지 갔던 용세하는, 기어이 케이나의 액티브 스킬인 마나 워크를 익혀 내 기갑 오크 만부장에게 훌륭히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보스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