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로그인-163화 (163/260)

# 163

163화.

“헥토라…….”

정시우는 어딘가 익숙한 그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수아린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제주도에서 파에토를 따르는 몬스터들이 말했잖아요. 오빠가 헥토의 신도가 아니냐고.”

“아.”

그런 이름을 가진 신은 모른다. 분명 그렇게 답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있자마자 바로 이곳에서 그자의 이름을 듣게 되다니, 아무래도 그놈도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다.

[네놈들이 그 길을 택한 이상은 우리도 전력으로 네놈을 짓밟아 주마!]

[각오해라!]

좀 더 헥토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 상황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몬스터들은 정시우에게 그럴 틈을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쪽에서 깽판을 쳤으니 투덜거릴 수도 없다.

[죽어라!]

근육이 우락부락한 잿빛 피부의 영장류 몬스터들이, 이곳저곳 신전의 잔해를 떨치고 일어나 정시우에게 쇄도해 왔다.

마나의 기척으로만 판단컨대 놈들 모두 족히 레벨 250 이상의 몬스터! 그리고 특징이라면…… 놈들 모두 하나같이 주먹을 불끈 쥐고 덤벼들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 오빠가 수십 명.”

“난 망치 들고 있잖아 인마.”

수아린이 말하고 싶은 게 뭔지는 대충 알겠다. 뇌까지 근육으로 들어차 있을 것 같은 놈들이 다짜고짜 덤벼드는 부분에서 뭔가 연상이 된 것이 있었겠지.

전투가 끝난 후 단단히 추궁하고자 마음먹으며 그는 일단 해머의 손잡이를 살짝 늘렸다. 미증유의 힘이 해머 헤드로 집중되며 파직, 검은 스파크를 튀겼다.

“흐압!”

[칵!]

우선 해머를 횡으로 크게 휘둘러 전면으로 육박해 온 적을 단숨에 쓸어 낸다. 이것을 피해 물러난다면 그땐 이쪽에서 돌진해 공격한다. 숙여 돌진해 온다면 그땐 해머로 바닥을 내리쳐 충격파로 튕겨 낼 뿐!

그 어떤 방향으로든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파괴의 망치가 지상을 휩쓸었다.

[크학!]

“……엥?”

그러나 결과는 정시우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전개와는 다른 양상으로 드러났다. 피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을 텐데 놈들은 공격 따윈 몸으로 받아 내겠다는 각오로 그대로 일직선으로 돌격, 해머에 얻어맞고 튕겨 난 것이다. 첫 번째 방에서 살아남은 다섯 명이 전부!

[크아아아아아아아!]

[가, 강하다!]

“얘네 뭐하는 놈들이냐.”

“저도 그걸 묻고 싶어요.”

아니, 분명 뭔가 하긴 했다. 정직한 궤도로 휘둘러진 해머에 얻어맞는 그 순간, 놈들의 육신이 번쩍번쩍 빛나며 버티기 자세를 취하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놈들을 때린 망치는 뿅망치가 아니라 마신의 징벌이고, 그것을 쥔 사람은 정시우다. 괴력과 강타가 조화되어 작렬하는 일격을 버텨 내려는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오만이다.

[보,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공격했다.]

[그것도 저자의 힘이다. 실로 무시무시하구나!]

물론 다섯 명의 방어 스킬을 모두 부수는 것은 정시우에게도 힘든 일이었으나, 그에게는 타격 전이라는 훌륭한 스킬이 있다. 가장 먼저 공격한 놈을 통해 나머지 놈들에게 타격을 전이시키는 방식으로 얼마든지 방어를 부술 수 있었던 것.

그 결과가 지금 이 꼴이었다.

[우, 우리 다섯의 버티기를 모두 부수어 버리다니……!]

[인정할 수밖에 없군. 우리가 졌다.]

[큭, 죽여라.]

놈들은 다 같은 자세로 바닥을 구르면서도 입만 살아 조잘거렸다. 이 바보들이 조금만 더 다각도로 공격해 왔으면 정시우도 제법 호쾌하게 망치를 휘두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단념하기로 했다.

“그래, 죽여 주지.”

덤으로 여기사도 아닌 근육 우락부락한 사내놈이 ‘큭, 죽여라’같은 말을 해 봤자 기분만 더러울 뿐이다. 정시우는 아무 미련 없이 깔끔하게 놈들을 찍어 버리곤 다음 방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그 뒤를 따르며 용세하는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 남는 게 있어야 정리하지.”

강자의 동굴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던전에는 자신의 힘(주로 물리적인)을 과시하며 도전자와 정면에서 강함을 겨루려는 뇌근육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얼핏 수도승에 가까운 분위기마저 풍기는 몬스터들이 지키고 있는 방을 케이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관통했고, 정시우는 괴력을 유지하며 놈들 전원을 쓸어버렸다.

놈들의 행동방식은 첫 번째 방과 별 다를 게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수준은 방을 거칠수록 높아졌기 때문에 정시우로서도 완전히 긴장을 늦출 수만은 없었다.

[쿠학! 네, 네놈의 힘은 터무니없이 강하구나.]

[어째서 헥토 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내려 보내셨는지 이제야 알겠다. 네놈은 그분의 사도가 되기에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열 번째 방을 거칠 때쯤, 비로소 정시우는 일격으로 놈들을 정리할 수 없게 되었다. 괴력과 강타, 타격 전이의 조합으로도 단숨에 놈들을 쓸어 낼 수 없었던 것.

다른 말로 하자면, 놈들이 정시우에게 얻어맞고도 제정신을 유지하며 어떻게든 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정시우는 지금이 놈들에게 물어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헥토가 대체 누군데.”

[쿡…… 크하하. 그만한 괴력의 소유자가 헥토 님을 모른단 말인가.]

[헥토 님은 오직 그 무력만으로 신의 위에 오르신 분. 파괴로 강함을 증명하고, 파괴로 업적을 쌓아, 파괴로 더욱 강해지는 신이 바로 그분이다!]

“허어.”

어라, 얘기를 듣자하니 어쩐지 정시우와 죽이 제법 잘 맞을 것 같은 놈이 아닌가! 그의 귀가 쫑긋하자 수아린이 그의 가슴팍을 퍽퍽 때렸다. 그는 수아린을 무시하며 놈들의 말에 집중했다.

“그러면 그냥 힘을 모두 통괄하는 신이냐?”

[그럴 리가. 그분은 힘으로서 모두를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다.]

“모든 것을 하나로…….”

모든 것을 하나로. 어라? 정시우는 고개를 들었다. 새삼스레 이 던전의 환경이 눈에 들어왔다.

비록 지금 이 순간도 케이나에 의해 실시간으로 기둥뿌리가 뽑히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이 붉은 돌로 반듯이 세워진 신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이곳은 통합 던전이다. 무수한 던전의 가능성이 한데 뭉쳐 탄생하는 곳이란 얘기다. 저번 던전은 그 융합 과정에 메티모아의 힘이 섞여, 던전 안을 탐색하면서도 혼란스러울 만큼 다채로운 환경과 몬스터 구성을 경험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던전의 숫자는 적다고 해도 그 수준만은 이전에 비해 월등히 높은 만큼 방대함에 있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터인데.

[그분의 힘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은, 끝내 그분께 굴종하고 그분의 것으로 거듭날 뿐. 알겠는가, 미천한 인간이여? 그분의 힘이 이곳을 만든 것이다.]

[메티모아 따위 천박한 누더기 잡종이 감히 간섭할 수 없는 분이지.]

“힘으로 통합한다니…… 말 그대로였나.”

신의 힘을 느끼고, 그 무한한 가능성에 전율하기도 해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무식한 영향력은 처음이었다. 가장 거대한 힘이 다른 모든 것을 집어삼켜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버리다니.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단지 에너지로 환원시켜, 흡수해 버렸다는 사실이 적잖이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지닌 고유능력과도 비슷하긴 한데.’

강탈, 그것은 타인의 것을 빼앗아 제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타인의 것…… 물건이든 마나가 되었든 그 안에 깃든 개성을 지우고 자신의 특성을 부여해 버리는 절대적인 능력.

그리고 지금 들은 헥토의 능력은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게 들리는 면이 있었다.

“너희는 신을 직접 만나 봤냐?”

[그분을 어찌. 그저 그분께서 내려 주신 축복의 한 자락이나마 붙잡고 감읍할 따름이다.]

“그러냐.”

역시 결정적인 부분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연이란 그런 것이니 어쩔 수 없다.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해머를 들었다. 마침 패널티 타이밍이라 괴력은 유지되고 있지 않지만, 패배자들을 정리하는 데에는 그의 힘만으로도 충분하다.

“세하, 여기서 몸 좀 풀고 와라.”

“옙.”

그는 뒤에서 따라오는 용세하에게 짤막하니 전달한 후 가볍게 망치를 들어 바닥을 찍었다. 네 마리의 몬스터가 그것으로 일소되고, 오직 두 마리만이 그 자리에 남았다.

그는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방으로 향하며 마음속으로 새로운 다짐을 새겨 넣었다.

‘헥토. 만나 봐야겠어.’

물론 당장 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놈을 만나게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정시우 자신이 품은 비밀에 대해서도 조금쯤은 알 수 있게 되리라. 물론 그 다음은 녀석이랑 붙어 그 힘까지 고스란히 정시우의 것으로 만들 뿐이지만.

[주인님, 막혔다.]

라는 메시지가 정시우에게 들려온 것은, 그가 마악 스물두 번째 방을 정리했을 때였다.

언제나와 같은 신전 내부, 똑같은 잿빛 피부의 근육질 몬스터가 한꺼번에 서른 마리나 몰려나와 그래도 제법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벌인 끝에 용세하의 랜스 차징이 만들어 낸 틈을 이용한 거대화 내려찍기(정시우는 그것을 도장 찍는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스탬프라 부르기로 했다.)로 정리한 직후.

‘네가 막혀?’

[만만치 않다. 합류해야 할 것 같군.]

실체를 갖추고는 있다지만 케이나는 어디까지나 정시우에게 소속된 영체에서 비롯된 존재. 먼 거리에 있어도 의사로 소통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는 통로 너머, 케이나와 팬텀바이크가 돌진한 흔적을 따라 뻥 뚫린 공간 너머를 주시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돌아와.’

[라져 댓.]

요즘 영화를 많이 보고 있는 모양이구나, 멍하니 생각하고 있자니 저 너머로부터 다시 사방이 무너지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되풀이되는 파괴, 몬스터들의 고함…… 그리고 추격자들의 목소리.

“어디서 들어 본 종류의 목소리인데, 저거.”

“일단 나아가죠, 오빠. 최소한 신전 내부 몬스터들만이라도 정리해 놔야 전투의 부담을 덜 거예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케이나가 뚫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한다면 괜히 위험요소를 늘릴 필요는 없다. 정시우는 여태까지의 느긋한 마음을 버리고 마력의 출력을 높였다.

아직까지도 잘 섞이지 않는 전투질주와 괴력을 각기 다른 경로의 마나 운영으로 활성화하고, 호흡을 조절하며 빠르게 방 안으로 돌진, 잿빛 피부의 거인(방을 거칠수록 놈들의 무력과 함께 덩치가 커지고 있었다.)들의 숫자를 파악하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놈을 빠르게 후려쳤다.

“약해 빠진 놈들이, 눈치만 보는 사이에 다 죽겠다!”

[뭣!?]

[약해 빠졌다고……!?]

놈들이 어떤 말에 분노하는지도 이미 대충 파악이 끝난 상황! 정시우는 그의 번개 같은 등장에 얼이 빠져 있던 몬스터들이 자신에게로 몰려드는 바로 그 순간에 용의 위엄을 끌어내어 워 크라이를 내질렀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아이 정말!”

끔찍한 포효에 순간 제자리에 굳어 버리는 몬스터들.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거대화한 해머로 놈들을 후려친다!

허공에 피어오르는 녹색의 핏줄기가 선명하게 빛난 다음 순간에는 크루얼 차지를 발동해 놈들을 덮친 정시우가 맹수 앞의 쥐새끼처럼 쪼그라든 놈들을 후려쳤다.

[주인님, 간다!]

“오우케이!”

마침 좋은 타이밍에 팬텀바이크를 탄 케이나가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정시우는 그녀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기를 기다려, 추격자들을 향해 눈앞의 다 죽어 가는 몬스터들을 쳐 날렸다.

“동료 받아라!”

[크아아아아아아악!]

[크륵.]

홈런 타자도 울고 갈 깔끔한 궤도! 그러나 몬스터 무리가 추격자들을 압살해 버릴 것만 같던 그 순간,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허공에서 몇 개인가의 도끼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잿빛 거인들은 정시우에게 농락당한 끝에 동료의 손에 의해 참수되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우리는 약한 자를 동료로 두지 않는다, 인간.]

[잘도 강자의 동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구나. 지금부터는 징벌의 시간이다.]

이곳까지 추격해 들어온 자의 숫자는 총 다섯. 정시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째 제법 그리운 얼굴들이지 않은가.

“과아연.”

[기뻐 보이는군. 강자를 눈앞에 두고 기뻐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전사의 자격은 증명된 셈이지만.]

[그 얼굴을 일그러트려 주는 것 또한 우리 강자의 숙명이지!]

놈들은 험악한 인상을 웃음으로 찡그러트리며 제멋대로 지껄였다. 그 기세, 위압감은 오만한 말에 어울리는 격을 증명했다.

덩치는 잿빛 거인들보다 작지만 그 육신에 깃든 힘은 가공한 수준이며, 무엇보다 놈들의 트레이드마크는 신체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기계!

[징벌!]

[징벌이다!]

“그래, 그거. 나도 제법 좋아하지.”

같은 단어를 반복적으로 말하며 뻐드렁니를 드러내는 적들을 앞에 두고, 마신의 징벌을 꼬나 쥔 정시우가 히죽 웃었다.

기갑 오크와의 재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