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146화.
세루타를 비롯한 대부분의 토종은 해구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했다. 세이락시아의 승전보에 기뻐하기엔 희생이 너무나 컸던 것.
해구 안에 터무니없는 양의 마나가 밀집되어 있는 만큼 몬스터들의 성장과 새로운 탄생이 끊임없이 반복될 터였으나 그만큼 이세계 몬스터들의 세력도 커질 터, 그들이 마음 놓고 바깥으로 나오는 것은 정시우가 수중던전과 그로부터 비롯된 외래종 몬스터들을 싹쓸이 해 버리기 전까진 힘들 것이다.
‘물론 이 토종 놈들이 인간을 적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적당한 선에서 균형을 유지해 주는 쪽이 나로선 더 고맙지만…….’
그곳을 나오기 전, 정시우는 심해관의 내부에 쓰인 기록을 대충이나마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분의 계시! 라고 호들갑을 떨던 세루타의 말과는 달리 별로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지는 않았는데, 이건 십계명을 따라 한 것이 아닐까 싶은 규율들 사이 중간중간 그가 참고할 만한 얘기도 있기는 했다.
‘심해관은 바다에 숨어든 신들의 수족을 던전 안에 묶어놓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이세계의 몬스터들이 던전으로부터 풀려난 후에도 질색하며 다가오지 못하게 된 거지. 즉, 지구 몬스터들이 그곳에 살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선후 관계가 명백해지니 마음이 개운했다. 그가 심해관의 플레이어로 선정되었다고 해서 딱히 지구 몬스터들을 책임져야 할 위치는 아닌 것이다. 물론 이세계 몬스터들을 격파하는 데 녀석들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굳이 사양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따지고 보면 개미굴과 하늘성도 또한 그렇다. 이세계 몬스터들이 직접 지상으로 풀려나면 인간이고 몬스터고 가릴 것 없이 이세계의 신의 힘을 퍼트리게 될 터,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바로 하늘성과 개미굴인 것이다.
심해관 또한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웠다. 물론 심해관에는 직접 지구의 몬스터들이 살고 있다는 사소한 차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뿌오오오오옹.]
“나중에 또 올게, 뿌이.”
[구오오오오.]
얻을 것을 대충 다 얻은 정시우는 일행을 끌고 해구 바깥으로 나왔다. 세이락시아는 들어올 때 일행을 인도했던 것처럼 그들을 해수면 바깥으로 태워 주었다. 정시우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마다 기뻐 꼬리를 흔드는 것이 바다 안에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좋아, 그럼 가자.”
“수중던전 들어가 보고 싶지 않아?”
“일단 선단에 합류해야지.”
예상치도 못했던 소란을 겪기는 했으나 지금 당장 변할 일은 없었다. 설마하니 이 일을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공표하기라도 하면 아무리 특권을 인정받은 정시우라 해도 조용히 넘어가기는 힘들 터였다.
결국 그들은 세이락시아의 작별인사를 뒤로 하고 날아가 선단에 합류했다. 대체 뭘 하고 온 것이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정시우는 뒤를 쫓는 인어 무리를 깔끔하게 해치웠다는 믿음직한 구라로 다시 한 번 찬사를 받았다.
정시우가 정말로 인어의 추격대를 때려잡은 것도 아닌데 그 후로의 항로는 제법 평온했다. 적어도 태평양에서는 몬스터들의 습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몬스터의 숫자가 줄어든 것.
플레이어들의 힘만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그날의 삼파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기적이었다. 비록 이번 항해는 처참한 패배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다음 항해의 결과는 제법 좋을 터였다.
“오늘 저녁입니다. 몬스터들이 어류를 모두 먹어 치운 것도 아니더군요. 플레이어 여러분들이 싱싱한 참치를 제법 잡아 주신 덕분에…….”
“오.”
[오……!]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한 가지 더 있었다. 민간인들과 플레이어들 사이의 감정의 골이 한때는 정말 해결할 수 없을 만큼 깊어져 있었으나, 플레이어들의 목숨도 보장하기 힘든 대난투에서 힘을 합쳐 선단을 지켜 낸 이후 그들의 관계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는 것이다.
민간인들은 강한 힘을 지닌 플레이어들이라 해서 항상 몬스터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플레이어들 또한 힘을 지니지 못한 자들의 설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하는 자들의 용기에 대해 알았다.
화합하지 못하는 자는 어디에나 있었으나, 그럼에도 대다수가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화물을 날려 먹었으니 그 대신 어류라도 좀 건져 가려고 다들 여기저기서 잠수하고 있어요. 이 참치도 그중 일부고요.”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마, 맛있군. 베토에게도 이 맛을 알려 주고 싶은데…….]
“걱정 마, 인벤토리에 챙겨 놓을게.”
[주인님……!]
생전 처음 먹어 보는 참치 스테이크와 참치 회에 케이나는 적잖이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마법생물인 만큼 뭔가를 그리 많이 먹을 필요도 없는 그녀이거늘, 정시우 이상으로 왕성하게 먹으며 베토의 몫까지 챙길 정도였다.
[지구에 오길 잘한 것 같다.]
“그 정도냐!?”
[주인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충성심 얻기 한 번 쉽네…….”
그녀가 그렇게까지 좋아해 준다면…… 정시우는 좋아, 하고 중얼거리며 그릇을 내려놓고 웃옷을 벗었다. 저녁놀 지는 석양 아래 그 어떤 조각가도 재현하지 못할 예술적인 반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본 수아린이 꺅꺅 소리를 내며 황급히 조막만 한 얼굴을 조막만 한 손바닥으로 가렸다. 미처 다 가려지지 않았지만 수아린도 정시우도 신경 쓰지 않았다.
“몇 마리 잡아 올게!”
“참치 잡아 온 플레이어가 얼마나 된다고…….”
신체가 발달한 플레이어들 가운데에서도 보기 쉽지 않은 완벽한 체형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찬탄하던 그때, 정시우는 멋들어진 다이빙 폼으로 깔끔하게 입수했다.
카오스 스케일이 있어 물속에 들어가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그에게 참치 몇 마리 정도 잡는 것 정도 문제가 될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 몇 마리가 어째 보이질 않았다.
“이건 상어고.”
참치 대신 상어들만 죽어라 그에게 달려들었다. 금방 상해서 문제지 싱싱할 때 먹으면 맛있다고는 하는데…….
“요즘은 수은 많아서 못 먹는댔지…….”
[고오오오오오옹.]
괜히 시비 틀지 말고 저리 가라며 상어 놈들을 밀쳐 내는데, 갑자기 그놈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깔끔하게 사라졌다. 정시우는 익숙한 울음소리와 함께 그의 발치에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 고래의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 뭐해, 뿌이.”
[뿌오오오.]
알고 보니 녀석은 정시우를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그들의 뒤를 멀리에서부터 계속 쫓아왔던 모양이었다. 정시우는 어이가 없어하면서도 녀석을 쓰다듬어 주다가…… 문득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이거 먹어.”
[뿌오오.]
녀석은 정시우가 인벤토리에서 꺼낸 참치 회 한 점을 날름 받아먹었다. 녀석의 덩치에 비하면 좁쌀 한 톨만도 못할 텐데 찹찹거리며 먹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제법 웃기면서도 귀여웠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먹었으니 이제 일을 시킬 차례였다.
“이거랑 같은 맛을 가진 생선을 몇 마리만 잡아 와. 할 수 있겠어?”
[뿌오오오오오옹!]
세이락시아가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장에 몸을 돌려 심해로 나아갔다. 정시우는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일단 다시 뱃전으로 올라왔다. 그를 기다리던 수아린이 이젠 눈을 가리는 시늉도 안 하고 물었다.
“뭐예요, 그렇게 폼 잡으며 들어가더니 한 마리도 못 잡은 거예요?”
“기다려 봐.”
“응?”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행이 가만히 수면을 내려다보길 잠시, 곧 수면이 보글보글하더니 화려하게 물기둥이 솟구쳤다.
“모, 몬스터!?”
“아니 잠깐만, 저건…….”
그 물기둥을 타고 실로 거대한 참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높이 튀어 올라 정확히 정시우의 눈앞에 펄떡거리며 떨어진 참치. 정시우는 녀석을 들어 올리며 수아린에게 훗, 하고 웃어 보였다.
“어때.”
“반칙…….”
수아린이 짜게 식은 눈으로 중얼거렸으나 정시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참치 세례는 한 마리로 끝나지 않았다. 이곳저곳에서 물기둥이 치솟으며 한 마리, 두 마리 참치를 퍼 올리더니, 이내 뱃전에 수십 마리도 넘는 3미터 길이 이상의 참치가 펄떡거리게 된 것이다!
[뿌오오오오오오오오옹!]
나 잘했지? 하는 울음소리와 함께 수면 아래로 멀어져 가는 세이락시아. 정시우는 녀석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마 다른 이들은 방금 어떤 녀석이 찾아와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앞으로 생선은 걱정할 것 없겠어.”
“테이밍 맞네요 뭐.”
정시우는 한 열 마리 정도만 인벤토리에 넣어 두고는 나머지 참치를 다른 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사람들은 이제 정시우가 마법까지 쓴다며 수군거리면서도 그날의 참치를 즐겼다. 해상전에서 그가 만들어 낸 해일 다음으로 이슈가 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나 배가 뉴질랜드에 닿았을 때, 유람선의 항해는 중단되었다. 유람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정시우에게 이를 갈았으나 일부는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자신의 안전이 아닌 지구의 균형을 볼 줄 아는 이들이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미국은 언제든 당신을 환영할 겁니다.”
“우리 영국도 마찬가지야.”
“아니, 프랑스가 최고지.”
“같은 아시아끼리 힘을 합쳐야지 않겠습니까.”
물론 정시우는 그들 모두에게 아직 어색한 영업용 미소를 지어 줄 뿐이었다. 그렇게 내릴 사람들과 화물이 내리고, 새로운 화물을 싣고 배는 재차 출발했다. 인간과 몬스터의 전면전이 무승부로 끝났다는 전보를 남기고서 말이다.
그렇게 배가 한국의 부산항에 도달했을 때, 정시우 일행은 하선을 택했다.
“곧 다시 놀러 갈게, 시우!”
“곁에서 모시고 싶습니다만…….”
미국 대표 플레이어로서 항해의 시작과 끝을 함께해야 하는 마리나, 결계의 유지를 위해 남아야 하는 이서희와는 달리 세리아는 그를 따르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정시우가 거절했다. 그녀가 휴식처에 들어와 봤자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 레이든지 뭔지 일어나면 불러 줘.”
“끄응…… 알겠습니다.”
비서의 꿈을 버리지 않는 세리아와 쿨하게 작별한 후, 정시우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그럼 이제 밀면이나 먹으러 가자. 아, 세리아 너 돼지국밥 먹어 봤냐?”
[대지국빱……? 굉장히 강력할 것 같은 이름이군……!]
“이 오빠가 왜 먹는 얘기 안 하나 했네.”
누군가에게는 국가의 명운이 걸린,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걸린, 또 누군가에게는 일탈에 불과했던 여정의 끝. 항해가 이루어 낸 결과물에 전 세계는 다시 한 번 달아올랐다.
몬스터가 줄어든 틈을 타 무역을 재개해야 한다는 자들과 바다의 고요는 일시적인 유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들의 의견이 부딪혔고, 탁상공론을 하는 자들 대신 소수의 플레이어들을 끌어모아 직접 무역에 나서는 이들도 있었다.
인도양과 대서양도 마찬가지로 개척해야 한다는 자들도 있었고, 아직 인간이 대처를 완벽히 마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인간과 몬스터의 전쟁이 심화되면 큰일이 날 것이라는 자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침몰했고 누군가는 성공했다. 바다 몬스터의 숫자는 다시 불어나기 시작했고, 그에 대항하려는 인간들 사이에서 플레이어들의 가치는 점점 더 높아만 갔다.
정시우는 그 모든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케이나와의 대련에 열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