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
144화.
전투가 끝난 후 바다는 처참한 꼴이 되었다. 인어를 비롯하여 수십, 수백만에 달하는 몬스터 사체가 아무렇게나 둥둥 떠다니고 있어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물론 바다 생물들이 먹어 치워 곧 깔끔하게 만들어 주겠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이 전투에 승자는 없었다. 외래종은 전멸했고, 토종도 마찬가지였다. 중간에 빠져나간 인간들이 상대적으로 가장 적은 피해를 입었으니, 승자가 있다면 그들이다.
물론 진정한 승자는 자신이 원한 대로 정확히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정시우였다. 만약 그들이 중간에 나서 조율하지 않았다면 인어의 괴멸을 대가로 인간들까지도 싸그리 죽어 버리고 말았을 테니까.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뿌오오오오옹!]
바다를 내려다보며 정시우가 하는 말에 고래가 맞장구를 치듯 울었다. 등으로 뿜어져 나온 물이 정시우의 몸을 적셨다.
놈의 공격인 줄 알고 기겁하여 다가오던 마리나가 다음 순간 놀라 멈추었다. 데미지를 입기는커녕, 정시우의 몸에서 새로운 활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시우, 너 지금 회복되고 있지 않아……?”
“그런 것 같아.”
정시우도 얼떨떨하여 대답했다. 놈에게 정시우를 공격하려는 의사가 있었다면 용의 감각이 경고를 해 주었을 것이나 그런 것이 없어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끊임없는 고강도의 전투로 피로해진 육신이 고래가 뿜어낸 물을 맞아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뿌오오오오오오옹!]
“녀석…….”
정시우의 시커먼 속내도 모르고 순진하게 기쁨의 울음을 내지르는 고래 녀석이 조금 짠하게 느껴졌다.
여태까지 몬스터를 보기만 하면 무조건 서로 죽이기 위한 전투만 해 왔던 정시우에게는 살짝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니, 냉정히 생각해 보면 몬스터에게 치유를 받은 것도 지금이 처음이다.
“그렇다면…… 혹시 인간과 몬스터가 공존하는 방법도 있을까?”
[……글쎄. 하지만 우리 세상의 경우를 말하자면, 몬스터라는 것들을 알게 된 시점에서 그들은 이미 신을 따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주인님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단순하고 우직한 자일수록 힘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렇기에 몬스터는 인간보다 빠르게 신에 ‘전염’된다는 사실을.]
케이나가 이제껏 접해 온 몬스터는 모두 이미 신의 종속이 되어 버린 놈들이었다. 놈들과는 타협의 가능성이 단 1%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막 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변해 가는 지구와는 여러모로 사정이 달랐던 것이다.
[이들도 곧 신의 세력에 흡수당해 우리를 집어삼키려 들 것이다. 솔직히 나는 이들이 저항하는 모습을 보인 것 자체가 놀랍다.]
“그게 말이지.”
[뿌오오오오옹!]
정시우는 전투의 끝을 감지하고 그에게 다가와 뿌옹 뿌옹 애교를 부려대는 고래의 머리 어딘가를 쓰다듬어 주며 설명했다.
“어쩌면 이 녀석들이 적극적으로 헤데아를 적대하는 건, 이미 믿고 있는 신이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신……?”
애석하게도 이 자리에 그 신에 대해 설명해 줄 몬스터는 없었다. 지능이 높은 놈들은 싹 다 죽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 살아남은 몬스터가 이 고래뿐이었다. 그만큼의 혈전이었다. 정시우 일행도 몬스터들과의 협공이 아니었다면 인어들을 상대로 제법 고전했을 터였다.
“이미 신을 믿고 있다니…….”
“적어도 이세계의 신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정시우의 서툰 설명만으로 상황을 추정하며 일행은 실로 아리송한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돌연 고래가 크게 울었다.
[구오오오오!]
그와 함께 고개를 돌려 천천히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집에 가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전에 모비딕 사냥을 한 번 해야 하는가. 정시우가 갈등하며 망치를 들어 올리는데 녀석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재차 울었다.
[뿌오오오!]
“……설마.”
정시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아무래도…… 놈은 지금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시우가 뒤를 돌아보자 그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머지 일행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렇게 친근하게 우리를 유혹해서는, 한꺼번에 바닷속에 묻어 버리려는 거 아냐?”
“저 녀석한테 그 정도로 높은 지능이 있었으면 애초에 일이 이렇게 안 됐지.”
[주인님…… 나는.]
일행이 망설이던 가운데 케이나가 다시 목소리를 냈다. 기분 탓일까, 평소 얌전하던 그녀가 오늘은 자기주장이 조금 센 것 같았다.
[한 번 따라가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만.]
“흠.”
[어차피 어딜 들어가 무슨 일을 겪든 주인님이 죽지는 않을 것 아닌가. 여차하면 해저 밑바닥에라도 열쇠를 꽂아 휴식처로 튀면 그뿐이다.]
“그건 그렇지.”
한없는 자신감 하나는 알아 줘야 했다. 정시우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서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의사를 묻기 위해서였다.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마리나였다.
“나도 고래 테이밍하고 싶어! 갈래!”
“테이밍한 거 아니거든.”
“시우 님께서 가신다면, 저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우리야 서포터이니 어쩔 수 없죠.”
“저도 가겠습니다, 형님.”
마지막은 이서희였다. 그녀는 도전특급! 수중탐험에 들떠 있는 일행을 향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너희 물에 어떻게 들어갈 건데?”
“어…….”
“하지만 난 수중에서도 호흡이 가능하게 하는 대인 결계를 펼칠 수 있지. 나 없이 들어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걸.”
결계능력은 여러모로 만능이었다! 일행은 차례대로 그녀에게 결계를 받고는, 물은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산소만을 받아들이는 결계의 능력에 신기해하며 차례차례 고래 괴물의 등에 올라탔다. 전원 탑승한 것을 확인한 정시우가 고래의 머리를 두드리며 외쳤다.
“좋아…… 이제 가자, 뿌이!”
[뿌옹!]
“이상한 별명 붙이지 말라니까요!”
그러나 이미 늦어 있었다. 고래는 정시우가 붙인 괴상한 별명에 기쁘게 반응하며 완전히 잠수했다. 순식간에 수면 아래로 들어온 일행은 바닷속에 펼쳐진 풍경에……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안으로 들어오니까 더하네.”
“으으, 이곳저곳에 시체투성이…….”
대규모 혈전의 흔적으로 바다가 더러워져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산호초와 열대어와 함께하는 수중탐험 따윈 그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뿌우우우우웅!]
고래는 수중을 나아가며 그 모두를 입으로 빨아들였다. 아군의 사체든 적군의 사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바다를 깨끗이 하며 동시에 등의 구멍으로 물을 뿜어내 추진력을 얻었다. 이서희는 그 모습을 보며 냉정하게 중얼거렸다.
“이 녀석, 그냥 고래처럼 보이는 괴물일 뿐이구나……. 신체 구조가 완전히 다르잖아!”
“그걸 이제 와 새삼스레.”
정시우는 제트 엔진이라도 삼킨 듯 빠르게 수중을 질주하며 마주하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고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팬텀바이크보다야 느리지만 승차감은 제법 훌륭했다.
점차 깊은 심해로 나아가는 동안에도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몬스터가 없었다. 인어는 물론이고, 토종이든 외래종이든 나타나질 않았다. 평범한 상어나 고래 정도로는 이제 그들을 놀라게 할 수 없었다. 몬스터의 흔적이 아예 보이질 않는 것이다!
“전 세계의 바다는 몰라도, 태평양의 모든 몬스터가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것만은 분명해 보이네요…….”
“이 비슷한 일을 전 세계 바다에서 똑같이 일으킬 수 있으면 바닷길을 부활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말도 안 되는 소릴.”
마리나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으나 고래를 쓰다듬는 정시우의 눈은 실로 무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오직 수아린만이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지금, 토종과 외래종을 대상으로 한 계산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단 이 고래가 데려간 곳에서 견적을 내보도록 해요, 오빠…….”
“오우케이.”
수중여행은 그로부터 세 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수심이 점차로 깊어 갔지만 평범한 플레이어도 아니고 정시우 일행이 수압 때문에 이상을 겪는 일은 없었다.
[뿌우우웅?]
“그래, 괜찮아.”
녀석이 내는 소리는 체계적인 언어로 정리되지는 않았으나 그 의사만은 정시우에게 명확히 전달되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고래의 머리를 툭툭 두들기는 정시우의 모습은 무슨 조련사가 따로 없었다. 그러던 찰나 세리아가 신음을 냈다.
“깊은 틈이 보입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무수한 던전과 몇 개인가의 이세계를 거쳐 오며 몬스터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연 환경에 적응한 정시우로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실로 깊고 넓은 틈이 바다 밑바닥에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깊은 어둠, 시각 스킬을 지니지 않고는 내부를 파악할 수조차 없는 심연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리아나 해구?”
“마리아나 해구는 이전의 격변으로 소멸했어. 저건 아마 지구의 변이 과정에서 새로이 나타난 해구겠지.”
애리조나 주의 그랜드캐니언 정도면 변화가 적게 일어난 편이다. 세계 각지의 유명한 산이나 계곡, 명승지 중 뉴 에이지로의 진입과 동시에 명운을 다한 곳이 상당히 많았다.
물론 그만큼이나 새로운 장관이 많이 늘었지만, 지금 세상의 사정이 그런 곳들에 관광객이 들끓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기에 체계적으로 정리는 되지 않고 있었다.
[뿌오오오오오옹!]
“다들 그럴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해구를 발견한 고래의 몸이 거의 수직에 가깝게 기울었다. 정시우는 매끈매끈한 고래의 등에 마나를 발해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저 안으로 들어간대.”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빨라!”
지금까지 여유롭게 바닷속을 항해한 것은 모두 이 순간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고래가 추진력을 발해 해구로 돌진했다! 케이나가 외쳤다.
[주의하라, 저 안에 가득한 마나로 보아 어쩌면 저곳은 73마성에 준하는 아공간……!]
다음 순간, 케이나의 말마따나 주위 공간이 완벽하게 바뀌었다. 순식간에 공간이 사방으로 확장되며 당장 바닷물의 느낌이 달라졌다.
“굉장한 마나야…….”
마리나가 거의 감격하여 중얼거렸다. 30단계 이상의 던전에서나 느낄 수 있는 짙은 농도의 마나가 정시우에게도 느껴졌다.
이세계로 따진다면 그가 다녀온 포투포우보다도 짙다고 해야 할까. 다만 한없이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마나는 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피부에 닿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지게 했다.
[꾸오오오.]
안전한 영역으로 복귀하고 나자 고래의 태도도 한결 느긋해졌다. 놈은 어느덧 경사가 평평해진 바닷속 공간을 느긋하게 헤엄쳤다.
그제야 주위로부터 다가오는 몬스터들이 있었으니 토종임에 분명한 녀석들이었다. 다만 레벨은 고래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았다. 역시 이 녀석이 별종인 모양이었다.
[……인간?]
[세이락시아가 인간을 태우고 돌아왔어.]
이 고래에게 그렇게 화려한 이름이 있었다니!
[세이락시아가 인간을……!]
[제사장, 제사장을 불러와!]
고래, 세이락시아에게 다가오다 말고 일행의 모습을 발견한 몬스터들은 당황하여 그렇게 외쳤으나 고래는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헤엄을 쳤다.
“아.”
이내 통로가 끝나고 더욱 더 넓은 해저 공간의 모습이 드러났다. 정시우는 지금 자신이 혹시 바다 밑으로 가라앉은 아틀란티스 왕국을 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저길 봐요, 오빠. 새하얀 진주로 장식된 성…….”
“저 둥그렇고 거대한 구조물은…… 혹시 몬스터들의 집인가?”
세이락시아가 여유롭게 헤엄칠 수 있을 만큼 압도적으로 넓은 공간. 마치 계획적으로 설계한 듯 반듯반듯하게 지어져 있는, 명백히 인공적인 미가 감도는 구조물들. 언덕과 그 꼭대기에 설치된 기이한 성까지.
[세이락시아!]
[녀석이 살아서 돌아왔어!]
[이런, 인간이잖아……? 잠깐, 그 외의 동포는…….]
[꾸오오오오오오오옹!]
세이락시아가 들어서자 구조물들 곳곳에서부터 몬스터들이 나와 그를 맞이했다. 물론 놈들 대부분의 레벨은 낮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레벨이 높은 이들은 세이락시아와 함께 이번 전투에 참여하여 죽어 버렸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이 자식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우르르 몰려나온 거였구나.”
“이세계의 몬스터들은 앞으로도 계속 몰려올 텐데요…….”
“하지만 아마 지구의 몬스터들도 계속해서 새로 태어날 거야.”
세이락시아는 언덕을 향해 일직선으로 헤엄쳤다. 그 위에 세워진 구조물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는 그래도 좀 레벨이 높은 편이었다.
[세이락시아!]
[뿌오오오오옹!]
세이락시아가 물줄기를 뿜어내며 요란하게 대꾸했다. 몬스터는 그의 대답에 머리 위에 앉은 채인 인간들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망둥이를 닮은 두 눈을 파르르 떨었다.
[설마 저들이…….]
정시우는 그 시점에 이르러 간신히, 이 아공간에 들어온 이래 몬스터들이 그들을 적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대체 이 몬스터들은 뭐하는 놈들이지? 왜 몬스터에 대한 상식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일까? 깊어 가는 의문과 함께 그는 언덕 위에 내려섰다.
아마도 저 망둥이가 그의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