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
138화.
“아니, 거주지역이 왜 이렇게 쓸데없이 넓다고 생각하셨던 건가요. 애초에 거주지역의 개방조건이 뭐였는지 기억하시잖아요?”
“이게 이세계 난민 대피소 같은 거였어?”
“오오!”
정시우의 실로 정확한 표현에 루타가 짝짝 박수를 쳤다. 물론 정시우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럼 앞으로도 이곳은 한적하겠네.”
“단호한 것도 정도가 있죠…….”
“베토를 들인 건 굉장히 특수한 사정이 있어서였어. 난 제 앞가림도 못하는 칠칠맞은 것들을 돌봐 주는 취미는 없다. 그러니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 아님, 너도 돌아갈래?”
여기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면 그대로 쫓겨나리라는 사실을 짐작한 루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도 얼마 가지는 않았다.
“베토만이 지닌 특수한 기술처럼 영주님께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지닌 이들도 많을 텐데…….”
“적어도 이번에 다녀온 세상에는 그렇게 싹수 있는 놈은 안 보이던데.”
더욱이 그들의 세상, 포투포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시들어 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시우의 말에 루타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이제 곧 끝나겠죠? 우리 요정상인들이 그곳에 가지 않게 된 것도 시간이 제법 되었으니까요! 우리도 자선 사업가는 아니라서 말이죠…….”
“요정상인들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거냐?”
“그건 금칙사항입니다!”
정시우는 루타의 존재를 금칙사항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런 그에게 루타가 설득하듯이 말했다.
“다양한 세상의 존재를 거주지역에 들이게 될수록 거주지역의 가능성은 늘어날 거랍니다. 영주님 본인이 그렇게 느끼고 계시듯이.”
“느끼기는 개뿔.”
아무래도 루타의 목적은 그것뿐인 듯했다. 정시우가 됐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루타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더했다.
“기회만 주어지면, 모든 이는 빛날 수 있답니다.”
“……흥.”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그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해 오는 루타의 모습에는 솔직히 거부감밖에는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렇다 해서 그녀의 말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도 다른 세상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시는 게 좋답니다! ……앗, 내 쿠키!”
정시우는 그쯤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를 귀찮게 한 대가로 쿠키를 하나 뺏어 들고는, 그것을 오독오독 깨물어 먹으며 숲을 거닐었다. 휴식처의 성장에 따라 더욱 넓어진 거주지역에는 이제 울창한 숲과 호수까지 생겨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어쩌다 보니 저 비밀상점이 점점 더 깊숙하고 신비로운 풍경 안에 자리 잡게 되었잖아.”
“하늘성도 그렇지만 개미굴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곳이라니까요.”
대장간도 지나쳤다. 그새 다시 일을 시작한 것인지, 대장간에서는 연신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바깥에 나와 있던 케이나가 정시우를 보고는 가볍게 인사를 했다.
[휴식은 충분하다. 전투가 주인님을 부를 때, 나를 데려가 줘.]
“오냐. 그때까진 혼자 검이라도 다듬고 있어.”
거주지역을 나와 휴식처로 돌아오자 바깥을 산책이라도 하고 온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여태까지 잊고 있던 피로감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정시우는 으으, 소리를 내며 겉옷을 벗어 던졌다.
“이제 좀 씻고 자야겠다.”
“오빠, 그리고 내일 쇼핑가요, 쇼핑.”
“그래그래.”
그 대상이 사람이건 침실이건 뭔가를 꾸미는 것에 대한 여자의 집착이란 대개 완수되기 전까지 사그라지지 않는다. 과거 이서희를 통해 그 사실을 충분히 실감하게 된 정시우는 수아린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며 욕실로 향했다.
욕실이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던 정시우는 그만 특별한 마력을 품고 그의 전신을 어루만지는 욕조의 기능에 그 안에서 잠들 뻔했다.
다음 날, 정시우는 세포 하나하나의 피로까지 모두 말끔히 해결된 기분으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업그레이드의 효과는 실로 굉장했다! 덤으로 그날 아침 식사로 나온 베이컨에그를 먹자 3시간 동안 체력과 마력이 5% 상승한다는 메시지까지!
이래저래 너무 대단하게 변한 휴식처의 기능에 하나하나 놀라며 정시우가 식사를 마쳐 갈 즈음, 용세하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님, 저는 오늘 수련하고 있겠습니다. 케이나가 도움을 주겠다더군요.”
“그래, 그렇게 해.”
이세계에 다녀올 즈음부터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용세하였기에 조만간 그런 말을 해올 거라곤 생각하고 있었다. 발전의지가 있는 인간은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정시우가 용세하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당분간은 너무 강한 적은 안 나타났으면 좋겠네요.”
“매번 짜증나게 강한 놈들 하고만 싸우다가는 나도 지쳐 죽는다, 인마.”
그래서 결국 휴식처 바깥으로는 정시우와 수아린만이 나오게 되었다. 침실을 꾸민다는 생각에 들떠 있던 수아린은 바깥으로 나와 강림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시우와 단둘뿐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어어어어어떡하지. 우리 일단 여, 영화라도 볼까요!”
“진정해, 진정. 왜 나왔는지 까먹었어?”
수아린의 태세 전환에 어울려 주고 싶은 마음도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수아린의 모습을 보면 데이트가 아니라 여동생과 다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정시우는 잔뜩 긴장한 수아린을 이끌고 우선 백화점으로 향했다.
이미 그와 수아린의 모습이 널리 알려진 만큼 주목을 받는 일도 있었지만, 최근 ‘레이드’가 활성화되며 그들 못지않게 주목을 받는 이들이 늘어났기에 얼마 전처럼 모든 이의 시선이 쏠리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거리에 제법 사람들이 있어요. WPC에 의한 체제가 제법 잘 잡혀 가는 모양이에요.”
“플레이어들의 하늘성 공략 속도도 별로 변화가 없다는 모양이야.”
거듭 말하건대 플레이어들은 하늘성에 그리 자주 들어가지 않는다. WPC는 그 점에 착안하여 플레이어들의 하늘성 출입 시간을 패턴화하고 조정, 그들의 주거지역을 따라 담당 구역을 설정하여 각 도시에 몬스터 방위를 위한 최소한의 플레이어가 머무를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것에 따르지 않는 이들에게 제제를 가하는 대신, WPC에 협조하는 이들에게 파티나 길드의 참가와 보상 분배에 있어서 혜택을 주고 인공섬에의 출입권을 부여했다.
그렇게 하니 WPC를 무시하고 제 뜻대로 움직이는 플레이어의 숫자가 극단적으로 줄어들어, 결국 플레이어에 의한 지구 수호가 보다 체계적이고 튼튼해지게 된 것이다.
“다만 플레이어들이 레이드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게 걱정이긴 한데…….”
“결국 그놈들도 신의 첨병인 건 마찬가지니까 적극적으로 처치하는 게 나쁜 일은 아냐. 다만…….”
어째서 신이란 작자들이 거대 몬스터를 출몰시키는가, 그것은 문명을 부수고, 인간들에게 공포와 경외를 심어 주기에 거대한 괴물만큼 적격인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정시우는 추측하고 있었다.
놈들은 그만큼 강하다. 그 부산물에만 욕심을 내고 덤벼들다가 낭패를 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포투포우에서 만난 저항자의 얘기를 듣자면 플레이어들의 생성에도 어디까지고 한계는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지…… 사망률이 너무 높아져서 좋을 건 없겠지.”
얘기가 어두운 방향으로 흐르자 수아린이 화제를 전환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뭔가를 발견하곤 박수를 쳤다.
“저 커튼 예쁘지 않아요?”
“침실에 창도 없잖아.”
“아, 그랬죠 참.”
하지만 끝내 수아린은 커튼을 샀다. 침대에 캐노피를 달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침대에 달든 창가에 달든 햇빛이 비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아닐까, 정시우는 가만히 생각했지만 수아린에게 태클을 걸 수는 없었다. 그녀의 기묘한 박력에 비집고 들어갈 틈 따위는 없었다.
“후후, 실은 동경했었거든요.”
“그래그래. 왜 아니겠어, 공주님.”
그 외에도 침실에 장식할 소도구나 가구를 찾아 백화점을 오르락내리락하길 무려 세 시간. 수아린은 굉장히 뿌듯한 표정으로 쇼핑을 마쳤다.
“같이 다녀 주셨으니 커피 정도는 제가 살게요!”
“그래, 난…….”
“카페모카 맞죠?”
“그래.”
사나이로 태어나 단것을 사랑하는 데에 아무런 주저도 없다. 커피가 담긴 트레이를 들고 자리에 앉은 정시우는 자신 몫의 커피 위에 얹어진 휘핑크림을 휘휘 젓고는 빨대를 입에 물며 폰을 꺼내어 들었다. 원하던 정보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다행이다. 이젠 영화관도 정상적으로 영업을 하네.”
“네……?”
“영화 보자며?”
거의 기습에 가까운 정시우의 말에 수아린은 잠깐 멈칫했으나, 곧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봐요! 꼭!”
“그래, 대신 그거 보고 나선 일해야 돼.”
“마리나 말이죠? 그럼요, 일이니까요. 어쩔 수 없죠. 그건 일이니까.”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으면서도 동요하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지금 그녀의 기분이 몹시 좋은 모양이었다. 어쩜 이렇게 단순한 녀석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정시우는 끝내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 날 오후, 수아린과의 데이트를 마친 정시우는 약속장소에서 인벤토리에 개틀링을 담아온 마리나에게 협박을 당했다.
“나도 볼래! 보고 싶어! 보게 해 줘!”
“일단 진정해, 그거 쏴도 나 하나도 안 다치니까.”
“다칠 것 같았으면 애초에 안 겨눈다구!”
덤으로 이 시점에서 이미 총기 반입, 위법이었다.
“기술을 B&Y에 가르쳐 달라곤 안 할 테니까 나한테만 공유해 줘!”
“솔직해서 참 좋다.”
“진정해라, 마리나.”
마리나 담당 태클요원 세리아가 그녀의 뒤통수를 내리치며 개틀링을 빼앗아 정시우에게 건네었다. 이쪽 계열에서 가장 유명한 M61 Vulcan이었다.
“진짜 이걸 마도구로 만들 수 있단 말이야? 정말로? 시우, 나도 갖고 싶은 총이 있는데 말이지, 마탄의 속성을 저격탄으로 강화할 수만 있다면 내가…….”
총기에 대한 집념이 깊은 마리나의 일장연설을 대충 받아넘기며 정시우는 개틀링 건을 꼼꼼히 확인하고는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마리나와 세리아, 덤으로 이서희를 둘러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오든가.”
“역시 그럴 것 같더라니.”
“정말!?”
설마 정말로 승인이 떨어질 줄은 몰랐던 마리나가 두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세리아와 이서희는 오히려 당황한 모습이었으나 마리나가 간다는데 빠질 수도 없는 노릇. 끝내 그들 모두 휴식처에 들어오게 되었다.
“맙소사…….”
“방금 시우가 뭘 어떻게 한 것 같았는데? 열쇠로?”
“이러니 우리가 모르는 것도 당연했군요…….”
예전엔 휴식처의 입구가 오직 정시우 일행만을 받아들였다면, 이젠 정시우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외부인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들은 이제야 정시우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순서가 반대였던 것이다.
“이건 거의 게이트를 이용하는 느낌인걸.”
“그 열쇠에 대체 어떤 마법이 적용된 건지 짐작도 안 가…….”
“안도 터무니없이 넓은데. 여긴 혹시 지구와는 별개의 공간인 거 아냐?”
휴식처에 입장하며 각자가 내뱉은 소감도 남달랐다. 정시우와 수아린은 일상처럼 겪어 오던 일이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손님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앗, 저 침실 좀 꾸미고 올게요!”
일행은 휴식처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자신의 침실로 달려가는 수아린을 배웅하고 휴식처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어째서 그동안 정시우가 휴식처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당최 영문을 알 수 없는 공간이야.”
“내 폰, 충전기도 없는데 여기 들어오니까 그냥 저절로 충전이 되기 시작했어.”
“냉장고 안에 이상한 포션이 가득해!”
이때만 해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 개틀링을 가져온 이유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아직 더 놀라운 곳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