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133화.
마치 세상이 멸망하는 것만 같았다. 검은 스파크에 감싸인 태양이 지상에 떨어져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는 모습에 그 누구라도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흑뢰에 담긴 저주가 뇌전의 연쇄 반응을 일으켜 퍼져 나갑니다.]
흑뢰의 메커니즘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친절한 메시지가 정시우의 눈앞에 떠올랐다. 과연, 그래서 해머에 얻어맞은 테디베어가 순식간에 그 자리에 무너져 움직이지도 못하고 빌빌거리고 있는 것인가.
“저, 저자는…….”
“한순간 끔찍한 힘이 폭발한 것까지는 보았어. 저것은 정말 우리가 알고 있는 마나가 맞단 말인가……?”
그것을 지켜보던 저항자들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1대1로 상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여겨졌던 재앙의 괴물을 고작 일격으로 무너트리다니! 그것도 끔찍하기 그지없는 물리력과 마력의 조화를 이루어!
“근접 스킬의 발휘에 있어 강한 마력을 싣고 싶거든 강한 물리력이 기초되어야 하지. 방금 저 사람이 보인 마력 반응에 걸맞은 물리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대체……?”
“한가롭게 분석할 때가 아냐, 살아남은 분체들이!”
정시우의 공격은 실로 파괴적이었으나, 무수히 많은 분체를 모조리 때려죽이고 흑뢰에 감염시킬 수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아장아장 일어나는 테디베어 분체들의 모습을 확인한 저항자들은 어떻게든 제정신을 차려 다급히 놈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본체가 무너진 후인지라 놈들을 각개격파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레벨이 1 올랐습니다.]
“좋았어.”
그 시각 정시우는 무수한 테디베어의 집합체의 그 기록과 마나를 모두 흡수, 간단하게 레벨을 1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만하면 마신의 징벌의 데뷔 무대로도 손색이 없는 셈이다. 역시 거대 해머는 거대 몬스터를 향해 휘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거대화한 채 연속공격을 해 보고 싶긴 했지만.”
“그러나 여기 다 아작 나겠어요.”
“테디베어의 규모가 조금 더 커지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히익.”
수아린은 상상을 그만두기로 했다. 테디베어들의 구조상 어디까지나 그런 일이 가능해 보인다는 점이 가장 무서웠다.
“읏차.”
그는 무기의 거대화를 풀어 인벤토리에 수납한 후, 팬텀바이크를 몰아 아래로 향했다. 대기하고 있던 용세하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 상당히 커다란, 구체적으로는 루이노스 리자드 새끼의 마석보다 조금 작은 정도 크기의 마석이 들려 있었다.
“아무래도 육신의 결합과 동시에 마나의 결합이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형님. 무수히 많은 시체들의 중심부에서 나온 겁니다.”
“흠.”
그는 그것을 받아 살폈다. 과연 용세하의 지적이 실로 타당했다. 작은 테디베어들이 합체를 위해 그들의 마나를 한 점으로 모으고, 그 마나를 중심으로 육신의 변이를 일으켜 거대 테디베어를 완성시키는 것.
외부의 공격에 의해 분체로 다시 나뉘기도 하지만 그놈들은 어디까지나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마나도 거의 품고 있지 않고, 시체를 살펴도 속이 텅 비어 있다. 겉으로 보기엔 참 귀여운데 그 비밀은 실로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독일도 난리 났겠는데.”
“마리나 비셋은 예리한 사람입니다. 이 몬스터의 비밀을 금방 깨닫고 잘 대처했을 겁니다.”
“그렇긴 한데 근본적인 부분에서 덜렁이니까 말이지…….”
마석을 자세히 살피니 레드 티베이드의 마석이라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테디베어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고만 있었는데 그러고 보면 확실히 털이 빨간색이긴 했다.
“저, 저기…….”
정시우가 일행과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그의 등 뒤로 몇몇 사람들이 쭈뼛거리며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정시우가 뒤를 돌아보자 그들의 대표로 나선 남자가 피막 날개를 얌전히 접은 채 고개를 숙였다.
“구, 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남구의 생존자들로…….”
“난 이세계에서 왔으니 너희 세계의 기준은 몰라.”
“……역시 그렇군요.”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줄이야. 정시우가 눈을 꿈뻑거리자 그가 쓴웃음과 함께 말했다.
“당신 같은 강자가 우리 세계에 있었다면 진즉 당신을 중심으로 나라 하나가 생겼을 겁니다. 육성소도 무너진 지금 새로운 강자의 출현은 불가능하고…… 모두가 간신히 버티고 있을 뿐이죠.”
“육성소라…….”
정시우는 다시 한 번 그들의 날개를 살폈다. 그것으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하늘성은 지구 고유의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들에게 있어서의 하늘성이 바로 육성소였겠지.
……그런데 잠깐만.
“그게 무너졌다고? 무너지기도 하는 거였어?”
“세계의 힘이 소진되니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잠깐, 그렇다면 당신의 세상은 아직 육성소가 멀쩡하단 말입니까? 당신이 그렇게 강한데!? 그런데 우리말은 대체 어떻게 통하는 거죠?”
정시우는 그에게서 이 세상에 대한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팬텀바이크에 올라타고는 그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일단 이 테디베어들이 없는 장소로 좀 가자. 나한테 조금 어울려 줘야겠다.”
“안내하겠습니다.”
경계심 따윈 팔아먹은 모습으로 그들은 정시우를 안내했다. 정시우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 자가 그들에게 적의가 있었다면 굳이 번거로이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아지트’의 규모는 정시우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제법 컸다. 거대한 결계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그곳은 과연 어지간한 몬스터들은 발견하지 못하게끔 인식 저해 마법과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그래도 허술하네.”
“여태까지 몇 번이고 부서져 왔습니다.”
그를 안내하며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어렸다. 한편 정시우는 본격적으로 이세계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에 거대 몬스터가 침범해 오고 내가 그놈을 때려잡아 영웅으로 추앙받기만 하면 이세계 소설 도입부로는 충분하겠는데…….”
“소설 도입부마다 개고생하는 토착민들은 무슨 죄람.”
인간들이 외부의 위험 때문에 작은 영역 안에 갇혀 살아가는 이야기에도 몇 가지 패턴이 있게 마련인데, 그들은 그중에서도 제일 운이 없는 편에 속했다.
외부에 위험한 몬스터들이 들끓어 결계 안에서 버텨야 하는 주제에 내부에서는 충분히 먹고살 만한 식량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여력이 없어 주기적으로 외부에 나가 구해 와야 하는 것.
정시우는 아지트 내부의 수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둘러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너흰 희망이 없겠다.”
“네,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는 정시우와 그에 수긍해 버리는 남자. 그의 등 뒤에 달린 날개가 애처로이 펄럭였다.
“어찌 수년 버텨 왔지만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불만이 내외부로 쌓여 가고 있죠. 최악인 것은, 외부를 틀어막는다고 신의 공격을 모두 막아 낼 수는 없다는 겁니다.”
신.
평범한 이세계 소설 속 산책이 끝나고, 드디어 그 얘기가 나왔다.
“처음부터. ……네가 기억하는 처음부터 들을 수 있을까.”
“목숨을 구해 주신 분께 무엇인들 못해 드리겠습니까.”
저항자들은 우선 오늘도 서로 살아남았음을 기뻐하며 저마다의 장소로 흩어져 갔다. 정시우가 감각을 돋워 확인해 보기로는 오늘 테디베어와 싸웠던 이들 말고도 아지트 내에 몇 명인가의 저항자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종합해 보면 대략 15명, 그것도 레벨 200에 못 미치는 사람들. 충분히 절망적이다.
“우리가 판타지 소설을 쓰고 있을 때 여기 사람들은 생존 소설을 쓰고 있네.”
“설마 지구도 이렇게 되는 건 아니겠죠, 오빠?”
“지구엔 내가 있잖아. 이렇게 될 리가 있냐.”
“아아, 이럴 때까지 재수가 없다니.”
충분히 좁은 집으로 안내된 일행은 구정물을 우려낸 것 같은 차를 예의상 받기만 하고 그 자리에 놔둔 채 남자의 설명을 들었다. 남자가 태어났을 땐 이미 세상 포투포우에 육성소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는 태어날 때부터 날개를 달고 있는 저항자였다.
“그때만 해도 버틸 만했습니다. 고레벨의 저항자들의 집단인 펜타곤을 주축으로 어떻게든 문명을 지켜 내며 각 신의 세력에 대항했죠. 하지만 제가 레벨 150에 이르렀을 즈음, 그들 중 하나가 군단의 신에게 넘어가는 바람에 사태가 최악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신의 힘이 무서운 것은 종교와 비슷한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믿음과 그에 따라 주어지는 힘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유리시켜 버린다. 무엇보다도, 신들은 그들의 신도에게 믿음의 증표로서 정복을 원한다.
“다른 신의 세력을 밀어내고, 이 세상을 자신의 이름으로 물들이는 것…… 아직까지 우리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있는 것은 오직 이 세상에서의 승자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신의 만신을 향한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군단의 신과 화염의 신이 주축이고 그 외에는…… 세례의 신 정도가 버티고 있는 것 같군요.”
“육성소가 무너졌다는 건?”
“세계의 지분의 절반 이상을 신이 먹어 치운 시점에 본래 세계의 의지는 힘을 잃고 스러진다고 합니다. 불과 5년 전이었습니다. 새로운 저항자를 선정하고 그들을 육성하는 육성소가 추락한 것도…… 그렇게 되자 신의 세력이 더욱 확장되기 시작했죠. 우리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지만, 그들은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슬슬 하늘성을 진정한 지구의 아군으로 받아들여 줘도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정시우에게는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이 남아 있었다.
“그 육성소는 하늘에 떠 있었던 거지?”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럼 땅이나 지하에는 뭐 없었냐?”
“네……?”
정시우는 대답 대신 자신의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남자는 그제야 그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뇨…… 그런 건 없습니다. 어쩌다 보면 이세계의 사람이 우리 세상으로 흘러드는 일도 있기는 있지만, 그들에게서도 그런 얘기는 전혀…… 그렇다는 건, 당신은 대체……?”
“비밀이지.”
정시우는 그에게 답해 주며 씨익 웃었다. 물론 남자는 도저히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묻자. 그럼 이 세상에도 신들의 신전 같은 게 있어?”
“아마 그들의 세력이 융성한 곳에는 하나둘 생겨나고 있을 겁니다. 서로의 세력의 확장을 막기 위해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적극적으로는 행동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만…….”
“그래, 알겠어. 고맙다.”
정시우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설마 아니겠지 하는 눈으로 정시우를 보았지만 정시우에게 있어 그런 시선은 질리도록 익숙한 것이었다.
“아…… 자꾸 물어봐서 미안한데, 정말로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뭐, 뭡니까?”
“그 군단의 신이랑 붙어먹었다는 남자의 레벨, 알고 있어?”
“마지막으로 육성소의 비석에 기록된 레벨이라면 알고 있습니다만…….”
“좋아, 그걸 원했어.”
남자는 입에 뱉기도 두렵다는 투로 배반자의 레벨을 입에 담았다.
그로부터 30초 후, 천막을 벗어나 미련 없이 세상의 생존자들을 버리고 팬텀바이크에 올라타는 정시우의 입가에는 섬뜩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