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
121화.
“안녕하세요, 손님. 던전 보스와 싸우기 전에 시원한 음료수 한잔 어떠세요?”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펑, 하고 희뿌연 구름을 터트리며 나타난 그 녀석을 정시우는 이전에도 본 기억이 있었다.
“요정상인…… 루타?”
“절 기억하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 손님! 생각보다 빨리 뵙게 되었네요!”
호랑나비의 그것을 닮은 화려한 날개를 펄럭이는 요정. 쉴 새 없이 반짝이는 은색의 머리칼과, 검은자와 흰자가 같은 눈 안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기이한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모두 이전에 보았던 것과 같다.
하지만 지금 보면 그녀의 날개는…….
“플레이어의 것이랑 같네.”
“네. 저는 하늘성, 개미굴과 관계되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제게 그것을 굳이 확인하시는 것을 보면, 아직 손님께서는 많은 사실을 알고 계시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렇죠?”
“수수께끼 놀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조금만 더 루타가 깐죽거리면 그대로 망치를 내리쳐 그녀를 산산조각 낼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정시우. 요정상인 루타는 애매하게 웃으며 슬쩍 뒤로 물러났다.
“손님을 놀리려는 것이 아니랍니다. 저희는 언제나 상부상조! 서로 돕고 살아가는 행복한 세상!”
“하아.”
그녀를 보고 있으면 무언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억이거늘 떠올리지 못해 갑갑해지는 그런 기분.
그러나 루타는 그 이상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녀가 정시우에게 적의를 품은 것도 아닌 이상 정시우가 그녀에게 무언가 해코지를 할 수도 없었다.
“원래는 주기적으로 손님과 교류하며 정보를 드려야 하는데, 그동안 손님께서 던전에 비해 너무 강한 힘으로 여유롭게 던전들을 클리어하시는 바람에 나타날 기회가 없었답니다…….”
“내가 조금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어야 나타날 수 있는 건가.”
“그건 금칙사항입니다!”
금칙사항은 개뿔, 지 입으로 다 말하고 있구만. 입술을 삐죽 내미는 정시우를 보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루타는 헤실거리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손님께서 개미굴의 새로운 기능을 활성화하신 덕분에, 제가 필수적으로 전해 드려야 하는 정보가 생겨나 이렇게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죠. 설마 이런 던전에 나타나게 될 줄은 저도 몰랐지만요!”
“새로운 기능? 이 통합 던전을 말하는 거야?”
“어, 아뇨.”
루타가 깔깔 웃었다.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거주 지역에 대해 말씀드린 거랍니다, 손님!”
“아, 아아아.”
과연, 정시우는 대충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혹시 거주 지역에 들어오고 싶은 거냐?”
“빙고! 거주 지역의 개방으로 인해 저희 요정상인은 던전에서 손님의 핀치를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는 신세에서 벗어나 손님을 직접 찾아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일반적인 던전에서는 구할 수 없는 마도 공학의 재료, 거주 지역을 가꾸고 확장하는 데에 필요한 온갖 자재를 취급한답니다!”
“그게 어디서 나서?”
“그건 금칙사항입니다!”
정시우는 요정상인을 으깨 버리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정말로 비밀이라서 어쩔 수가 없답니다! 살려 주세요!”
“오빠, 저희가 모르는 제한이 걸려 있을 수도 있어요. 하늘성도 개미굴도 모르는 것투성이잖아요.”
“끄응…….”
그는 한숨을 쉬며 루타에게 물었다.
“거주 지역을 어떻게든 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해 주어야 하지?”
“입주허가를 내려 주세요!”
루타가 잽싸게 말했다. 그 순간 정시우의 눈앞으로 익숙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요정상인 루타가 거주 지역으로의 입주를 희망합니다. 그녀를 받아들이면 그녀와 거래하는 요정상인들을 통하여 거주 지역에 필요한 온갖 물자는 물론 던전 진행을 위해 필요한 소모품과 아티팩트들을 안정적으로 거래할 수 있게 됩니다.]
“입장이 아니라 입주?”
“아무래도 손님을 보다 완벽하게 서포트해 드리기 위해선 한 명이 거주 지역에 상주하는 것이 좋겠지요! 입주한다 해도, 저는 요정상인이니만큼 다른 요정상인들을 통해 물자를 가져오는 것이 가능하답니다!”
“그 다른 요정상인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그래, 말 안 해도 돼.”
금칙사항이겠지. 이게 어디서 어설프게 흉내를 내고 있어. 정시우는 아직 개미굴과 하늘성에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입주를 허락해 주지.”
“감사합니다, 손님! 이제 영주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필요 없거든.”
루타는 입주허가를 받은 것이 기쁜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재롱을 피웠다. 정시우는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럼 이제 가 봐.”
“그전에 입주허가를 내려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여기 시원한 음료수 한 잔 하세요!”
허공에 음료수 컵이 생겨났다. 정시우가 그것을 손에 쥐고 확인하니, 이전 그녀에게 보너스로 받았던 원기회복의 포션이었다.
체력과 스태미나를 깔끔하게 회복시켜 주는 바로 그 포션. 원기회복의 포션은 요정상인들에게 있어 복덕방에 놓인 박카스와 같은 것일까. 정시우는 그것을 반만 마시고 용세하에게 넘겼다.
“혀, 형님…… 감사합니다.”
“앗, 아아아앗.”
수아린이 용세하를 부러운 눈으로 째렸다.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비드 몇 개인가를 꺼내어 루타에게 내밀었다.
“원기회복 포션 하나 더 줘.”
“항상 감사합니다, 손님! 아, 비드의 질이 높으니 하나만 받겠습니다!”
“아, 으, 제가 원했던 건 그런 게 아닌데…… 아니, 주신다면 마시겠지만요…….”
[주인님, 나도 원한다.]
“둘이 나눠 마시든가.”
비록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케이나는 언데드가 아닌 마법생물로 거듭난 덕에 마력과 신체구조만 제외하면 일반적인 생물과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음식물을 섭취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투덜거리지 마라, 인간.]
수아린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결말에 무척 불만족스러워 보였으나 어쨌든 포션을 정확히 절반어치는 마셨다. 케이나가 나머지 포션을 마시는 사이 정시우는 아직 뭔가 할 말이 남은 것처럼 보이는 루타와 마주했다.
“마력 포션을 팔고 싶은 거라면 됐는데. 이젠 굳이 소모품으로 마력을 보충할 필요가 없거든.”
“그건 저도 알고 있답니다. 손님의 각성이 너무 빨라서 놀라울 정도이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제가 팔려는 것은 마나 포션 따위가 아니랍니다. 하나의 정보와 그 정보에 따르는 부가적인 물품이지요!”
정보에 물건? 실로 수상한 조합이지 않은가. 아직 정시우가 떡밥을 물지도 않았거늘, 루타는 신이 나서는 부가설명을 했다.
“정말 운이 좋았지요! 원래 손님이 위기에 처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 철칙인데 거주 지역 입주 건과 관련해서 나타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덕에 손님께 도움이 되는 정보와 물건을 팔 수 있게 된 것이죠! 자, 제게 감사하셔도 좋습니다!”
“…….”
혹시 이 녀석은 한 문장 안에 느낌표가 들어가지 않으면 쇼크사하는 병에라도 걸린 것일까, 생각하며 정시우는 마지못해 물었다.
“정보비 얼마냐.”
“레벨 200 이하 의태 몬스터들의 비드 3,500개, 레벨 200 이상 키메라의 비드 500개만 받겠습니다!”
다른 던전을 돌았더라면 그런 교환조건을 듣는 순간 망치를 꺼내어 들었겠지만, 3주나 되는 기간 동안 이 거대하기 그지없는 던전을 화려하게 박살 내며 전진해 온 정시우의 수중에는 방금 루타가 제시한 비드의 수십 배는 되는 양의 비드가 있었다.
“좋아, 가져가.”
“감사합니다, 손님! 그럼 정보를 말씀드리죠. 앞으로 손님께서 나아가실 방향에 무척 중요한 조언이 되리라 자부합니다!”
“말이나 해.”
루타가 에헴,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손님께서는 여태까지 번개의 신과 언데드의 신의 파편을 입수하셨습니다. 그렇지요?”
루타가 그것을 알고 있으리라고는 이미 정시우도 짐작하고 있었다. 정시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더욱 신이 나 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손님은 무척 현명한 수단을 본능적으로 취하셨어요. 뇌신의 흔적이 남은 물건으로 뇌신의 힘을 빨아들였고, 언데드의 정수로 언데드의 신의 힘을 빨아들이셨죠. 아, 그전에는 보유하고 있던 스킬을 강화하셨던가요.”
“그게 왜?”
“앞으로도 그렇게 하셔야 해요.”
“유언은 그것뿐이냐?”
정시우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망치를 들었다. 루타가 당황하며 빠르게 그 뒤를 설명했다.
“손님께서 신의 파편이 지니고 있는 힘을 직접 육신으로 소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답니다!”
“그래,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지?”
“하지만 그 결과 성장하는 건 손님의 레벨과 마나뿐이잖아요! 손님의 힘은 지나치게 압도적이어서, 그 모든 힘을 제 것으로 소화시켜 버릴 뿐이에요!”
그것이 바로 강탈 능력의 요지이다. 정시우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레벨과 마나는 그냥 몬스터를 잡아서도 올릴 수 있어요. 신의 힘이 지니고 있는 특성, 고유능력을 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요!”
“음……?”
그때 들려온 루타의 말은 정시우를 두 가지 방향에서부터 두들겨 왔다.
“그러니까 여태까지 해 오셨듯, 신의 힘을 빼앗으실 경우엔 그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아티팩트나 스킬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시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랍니다!”
“아니, 잠깐만. 너 방금 고유능력이라고 했냐?”
“네! 모든 신은 고유능력을 지니고 있잖아요! 뇌신은 번개, 언데드의 신은 죽음과 혼! 각기 그 특성을 강화시킨 고유능력을 보유하고 있지요!”
정시우는 다시 망치를 거두었다. 그의 시선이 소울 포스로 거듭난 자신의 문신, 이어서 신의 힘의 특성만 남고 지배력은 사라진 결과 탄생한 마법생물 케이나, 마지막으로는 뇌신의 힘을 고스란히 빼앗아 만들어 낸 레이지 라이플에 차례대로 머물렀다.
그리고 자연스레 납득하고 말았다.
“그게 고유능력의 결과물이었단 말이지.”
고유능력이 플레이어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힘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마 그것이 신에게 이르러 있을 줄이야. 자신이 지닌 힘이 신과 동격의 것은 아니겠지만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루타의 조언이었다.
“정리해 보자고. 신의 힘을 내가 직접 흡수해 버리면 그 개성을 잃고 나의 마력으로 화한다. 그러니 그것의 소유권을 일단 빼앗아 온 후, 내 몸에 저장하지 말고 아티팩트나 스킬에 따로 저장하라는 얘기인가. 케이나에게 그랬듯이, 레이지 라이플에 그랬듯이?”
“빙고!”
정시우는 상황을 정리해 보고는 경악했다. 이거, 정말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조언이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너는 이 던전의 끝에 있을 메티모아의 힘을 내가 직접 흡수하지 말고 다른 것에 저장하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로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신의 힘을 적용할 대상을 굳이 물건으로 한정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던전은 무한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곳, 던전이 지닌 힘을 이용해 신의 힘을 가공할 방법 또한 있으니까요!”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결론만 얘기해.”
“그렇게 하지요, 손님!”
루타가 품에서 돌돌 말려져 있는 한 장의 종이를 꺼내어 들었다. 심상치 않은 마나를 담고 있는 그 물건은, 어째선지 처음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익숙한 느낌을 주었다.
“손님께서는, 던전을 클리어한 후 제법 낮은 확률로 나타나는 제단의 존재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제단……? 잠깐, 설마.”
정시우의 눈이 살짝 커졌다. 루타가 배시시 웃으며 종이를 그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끝이 종이에 닿은 순간, 그 소모품의 이름이 드러났다.
[보상 제단 변환서 ? 합성의 제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