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81화.
정시우와 마리나에게 엠퍼러 길드의 사냥을 막을 권리는 없었다. 정시우도 죄 없는 이를 핍박하거나 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이 오기 전에 사태를 정리했으면 그것이 최선이었으나, 그렇게 되지 않은 이상은 그들과 경쟁하며 최대한 ‘신의 힘’을 그들 선에서 처리하는 방법뿐.
“아직 갈피도 잡히지 않는데.”
“일대에 세트나크의 힘이 가득해서 그래. 졸병들을 부수다 보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거야.”
“이 길고 긴 협곡을 탐색하면서 말이지.”
“그 너머로 뻗어 갔을 가능성마저 있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상황이 막막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뿐이다. 하지만…… 정시우는 그들의 활약에 자극을 받아 열심히 날뛰며 언데드를 깨부수고 있는 엠퍼러 길드를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쟤네가 있어 주는 덕분에 적어도 몬스터를 처리하는 속도는 빨라지겠어.”
“저들이 세트나크의 파편과 접촉하는 사태는 막아야 해. 엠퍼러 길드는 적극적으로 신의 힘을 이용하기를 주장하는 급진파 중 하나란 말이야.”
역시 마리나도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인가. 과연 마나를 다루는 능력을 타고난 만큼, 그녀는 그 어떤 플레이어보다도 먼저 신의 힘의 위험성에 대해 깨닫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다른 엘리트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신의 힘을 순수한 축복처럼 여기는 것과는 딴판이야. 과연, 내가 괜히 나서서 다른 이들을 설득하고 다닐 필요는 없어졌네.’
정시우는 내심 감탄하며 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 끝에 쥐고 있던 거랑의 앞발이 순간적으로 크기를 늘리며 전방의 갑각 사슴 무리를 깔끔하게 분쇄했다. 단단한 파편들을 한 번에 휙 쓸어 인벤토리에 담고, 반대편의 거인의 비명을 가볍게 휘저어 그에게 다가오려는 다른 몬스터들을 경계한다.
그가 보이는 일련의 동작은 나비처럼 우아하면서도 폭풍처럼 거칠어, 사람에게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마리나가 감탄사를 발하려는 찰나 정시우가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근데 이미 늦었어.”
“뭐?”
그녀는 타인의 마나를 읽어 내는 능력만은 출중하지 못하다. 저들이 이미 다른 신의 힘을 몸에 품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시우에게는 보였다. 그 특유의 마력 패턴과 색이 결코 그들 본연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저들은 신의 힘을 이미 품고 있어. 아마 축복을 받은 거겠지.”
“그래서 다른 놈 것까지 탐을 내고 있단 말이야 지금?”
마리나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정시우도 대충 그녀와 비슷한 심정이었다.
‘서희의 길드원들과는 수준이 명백히 다른 덕에 신의 힘을 받아들이고도 잘 버티고 있어. 그러니 완벽히 자신의 힘으로 소화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여전히 그 힘의 주도권은 신의 본체가 쥐고 있다는 걸 어째서 모르는 거지.’
신에게서 분리되어, 완전히 떨어져 나온 레이지 라이플과는 얘기가 다르다. 저들에게 부여된 힘은 신 본인이 원한다면 언제든 떼어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힘의 형태를 변형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오타루에서의 참극이 되풀이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직접 저들에게 말한다고 순순히 정시우의 말을 따를 리도 없고, 정시우의 말을 믿는다고 해서 신의 힘을 그들에게서 떼어 낼 방법도 뾰족하게 생각나는 것이 없다. 정시우는 그저 그들이 최대한 자극을 받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 주길 바랄 뿐이었다.
“흐아아아압!”
바로 그때, 정시우와 마리나 비셋에게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쇄도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세리아 윌슨이 강력한 스킬을 하나 구사했다. 새하얗게 물든 다섯 발의 마탄을 연달아 쏘아 내는 것!
그것이 언데드 무리 한복판에 떨어져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자, 무너진 협곡의 이곳저곳에서 증오와 적의로 물든 로어가 울려 퍼졌다.
[우리의 적!]
[빛의 힘! 죽인다!]
[우리와는 하나가 될 수 없다! 놈들을 죽여 충의를 증명하자!]
“좋았어, 너희의 적은 나야! 내가 네놈들을 전부 쓸어 주지!”
순식간에 전장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세리아 윌슨이 지극히 만족스럽게 외쳤다. 엠퍼러 길드원들도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제각기 무구를 빛내며 언데드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사제의 신성력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빛. 유독 언데드에게 효과적으로 먹히는 빛의 힘이 전황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저게 저들의……?”
“맙소사, 오빠. 저건…….”
“응?”
마리나와 정시우가 막연히 신의 힘을 경계하고 있었다면 수아린은 달랐다. 그녀의 떨떠름한 표정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건 루이오스의 힘이에요. 빛의 신 루이오스!”
“아, 루이오스. 그렇구나. 들어본 적은 있어.”
“넌 어떻게 알았냐?”
“전직을 권유하는 메시지가 나타났을 때, 그의 힘을 느꼈거든요.”
그녀의 태클력이 지대해 잊어 먹기 쉽지만 그녀 또한 마나를 다루는 영역에서 결코 다른 이에게 꿀리지 않는 엘리트! 다른 종류의 마나를 기억해 내는 그녀의 능력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라?”
잠깐만. 루이오스? 루이오스와 세트나크……. 정시우의 얼굴이 시커메졌다.
“얘네 서로 대립하던 신 아니냐?”
“그것도 내가 모르던 정보인데. 과연 내 파트너야.”
“파트너 아니거든요.”
“너희 조용히 해 봐.”
[갸아아아아악!]
정시우는 양손에 쥔 해머를 정신없이 휘둘러 언데드 몬스터들을 박살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과연 엠퍼러 길드가 그랜드캐니언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가장 빨리 냄새를 맡은 것은 순수한 우연인가? B&Y가 나서서 틀어막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감만으로 여기로 달려왔다고? 다른 주에서도 몬스터들의 난동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상황에?
‘그게 아니라면…… 혹시 신에게 명령이라도 받은 건가?’
만약 그렇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루이오스의 힘을 품은 그녀 일행이 세트나크가 지구에 남긴 흔적과 직접적으로 조우하게 되었을 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아니, 지구 한가운데에서 마주친 두 신의 힘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막아야 하는데.”
“미리 말해 두지만 쟤네한테 말은 안 통해. 지금 우리가 하는 모든 짓을 적대행위로 받아들일 거야.”
“좋아, 그럼 방치하자.”
정시우는 그쯤에서 사고를 멈추기로 했다. 신의 힘을 얻은 것도 저들의 선택, 이곳까지 온 것도 저들의 선택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는데, 벌써부터 그들을 구하겠답시고 골머리를 썩을 필요가 없었다.
“뒈지든 말든 지들이 알아서 하겠지.”
“쿨한걸.”
“저놈들보다 우리가 더 빨리 행동해서, 모두 해결해 버리면 그걸로 끝나는 일이니까. 다만…….”
그는 해머를 어깨에 걸치며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 정시우가 쏘아 날린 파괴적인 마탄 덕에 언데드 몬스터들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던 상태였고, 플레이어들이 본격적으로 날뛰자 협곡을 가득 메우고 있던 언데드들의 숫자는 빠르게 감소하고 있었다.
“죽어! 모두 죽어라!”
“잡졸은 괜찮지만 엘리트는 저들에게 빼앗기면 안 돼! 최우선적으로 수거하라고!”
[쿠오오오오오!]
[크히이익!]
특히나 빛의 신 루이오스의 힘은 세트나크의 졸개들에게는 상극! 엠퍼러 길드는 그 사실을 느끼며 더더욱 그 힘에 심취해 가고 있었다. 만약 이곳이 세트나크와의 전장만 아니었더라면 정시우도 아직은 여유가 있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이나…….
“그래도 사달이 나기 전에 미리 경고는 해 둘까. 원래 소설이나 만화를 보면 주인공들은 꼭 이런 식으로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급하더라고. 나는 그들에게 경고를 했지만 그들은 내 말을 듣지 않았지, 뭐 이렇게.”
“스스로 면죄부라고 말하는 시점에서 최악이네요.”
“어떡해, 멋지다…….”
“멋져!? 저게 멋지다구요!?”
루이오스의 힘에 이끌렸는지 엠퍼러 길드에게 쇄도하는 언데드도 있는가 하면 이 사태를 만들어 낸 장본인, 정시우에게 한결같은 악의를 품고 공격하는 언데드도 있었다. 정시우는 개중 가장 거대한 덩치를 지닌 엘리트 언데드, 갑각 곰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했다.
[쿠워어어어어엉!]
“흐아아아압!”
제 분수도 모르고 돌진해 오는 자그마한 인간을 보며 코웃음을 치는 거대 곰. 놈은 정시우의 돌진에 맞서 자신의 앞발을 휘둘렀다. 금방이라도 정시우의 머리통을 뽑아낼 수 있을 것처럼 흉악한 발톱이 음산하게 빛을 발한 다음 순간,
[카학!]
정시우의 어깨에 명중한 앞발이 그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튕겨 나 기이한 방향으로 비틀려 버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돌진의 기세를 오롯이 담아낸 해머 강타가 곰의 복부에 틀어박혀,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곰을 그대로 허공중에 띄웠다!
[쿠하아아아아악!]
“맙, 소사…….”
“저건 플레이어가 아니라 괴물이잖아……?”
레벨로 따지면 230정도였을까? 언데드가 되는 바람에 위력이 조금 떨어졌을 수는 있어도, 엘리트 몬스터인 만큼 협곡의 다른 언데드에 비해서는 월등히 강했을 곰이 그의 돌진을 이겨 내지 못해 허공중으로 튕겨 나는 장면은 인간과 언데드를 불문하고 시선을 집중케 하는 마력이 있었다.
“후…….”
그러나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허공으로 높이 떠오른 곰의 몸통 바로 밑에서 거대화한 거랑의 앞발을 들고 대기를 타는 정시우의 모습이었다.
마치 공이 날아오길 기다리는 야구 타자와 같은 모습에 모든 이는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닫고 말았다.
[케엑…… 저건 무리다.]
[세트나크 님…… 지금, 만나러 갑니다.]
처음부터 그들의 힘으론 항거할 수 없는 적과 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언데드들이 조용히 묵념한 직후, 정시우는 바닥을 디디고 있는 힘껏 거랑의 앞발을 휘둘러 떨어져 내리던 그 거대한 곰을 반대쪽으로 쳐 날렸다!
[쿠아아아아아아아!]
[케헥!]
[끼우오오오!]
그것은 흡사 메테오였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거대한 곰의 몸통이 협곡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지나가며 그 경로상에 있던 모든 언데드들을 깔아뭉개고 부수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히 곰도 죽어 버렸고, 운이 좋아 살아남은 모든 언데드는 도망칠 생각도, 덤벼들 생각도 못하고 그저 묵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좋아, 처음부터 그렇게 얌전히 있을 것이지.”
그 어떤 플레이어도 흉내 내지 못할 짓을 저질러 놓고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정시우가 친절하게 직접 해머를 휘둘러 그들의 목숨을 끊어 주고는 전리품을 일일이 회수했다.
기분 좋은 소식이 있다면 그가 쳐 날렸던 곰의 갑각이 무척이나 단단해 그 난리통에도 불구하고 흠집도 나지 않았다는 것. 이 정도면 듀라한의 새로운 갑옷을 만들기에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끔 만들었다.
“좋아, 그러면…… 너희.”
“왜, 왜!”
전리품을 깔끔하게 회수한 정시우가 여전히 굳어 있던 엠퍼러 길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길드원들 앞으로 나선 세리아 윌슨은 겁먹은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무던 애를 썼지만 벌벌 떨리는 다리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미리 경고해 두는데, 너희가 지닌 신의 힘은 이곳에 머무르는 힘과 상성이 그리 좋지 않아. 너희를 생각해서 말해 주는 거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
“역시 이곳에 신의 힘이 있는 거구나!”
“다 알고 왔잖아. 농담은 그쯤 해 둬.”
“읏…….”
정시우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는 세리아 윌슨에게서 가식과 거짓을 앗아 갔다. 그녀는 대번에 낯빛을 굳히고는 소리쳤다.
“그, 그래! 우린 신의 흔적을 차지하기 위해 이곳에 왔어. 너희에게 그 힘이 넘어가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거든!”
“차지……?”
신과 그리 깊은 소통을 하지는 않는 것인가. 그들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신에게 속아 넘어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최악이다. 정시우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루이오스는 세트나크와 대적하고 있어. 두 신의 힘을 모두 취할 수는 없을 거야.”
“뭐……? 어, 어떻게 루이오스의 이름을…….”
“다시 말하지만 너희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돌아가는 게 좋아.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때에.”
“……헛소리를.”
세리아 윌슨은 그쯤에서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우리가 어떻게 할지는 내가 정해. 신의 축복도 받지 못한 떨거지가 자랑스레 떠드는 꼴은 더 못 들어 주겠는걸.”
“그래, 알겠어.”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것 같았다. 필요한 정보도 모두 전해 줬고 위험성도 전달했으니 이젠 저들이 죽건 몬스터로 변하건 찝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정말 최악이에욧!”
“가자, 마리나.”
“구랭!”
마리나 역시 정시우와 그리 다르지 않은 성격이었다! 조금 전까지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개운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남녀를 보며 세리아 윌슨이 외려 당황할 정도였다.
“뭐, 뭐야. 그렇게 포기하는 거야?”
“잘 해 봐! 응원할게! 안 죽었으면 좋겠네!”
“뭐야! 그렇게 나오니까 더 찝찝하잖아!”
“파이팅!”
“뭐냐고 정말!”
세리아 윌슨에게 추가타를 먹인 정시우는 망설이지도 않고 바이크를 꺼내어 마리나와 함께 탔다. 이 협곡에는 더 이상 언데드가 없으니 근방을 훑으며 다른 놈들을 사냥하며 덤으로 세트나크의 흔적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바이 짜이찌엔!”
“이이익!”
그렇게 남녀는 떠나갔다. 세리아 윌슨은 무대 위의 광대가 된 것만 같은 느낌에 발진하는 바이크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어떻게 하죠, 마스터?”
“어떻게 하긴. 우리의 목표는 변하지 않아.”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남자의 말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다른 이의 말에 흔들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혼란스러운 지구, 지금 우뚝 서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강한 힘이 필요한 것이다!
“세트나크의 힘을, 손에 넣겠어.”
“옙!”
그렇게 엠퍼러 길드 역시 행동을 개시했다.
아직 세트나크의 파편은 드러나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