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67화.
“이게 여기 왜 있을까.”
“그러게요…… 왜 이런 곳에.”
지하 창고의 중간에 놓여 있던 것, 그것은 던전을 클리어하면 나타나는 제단과 너무나 흡사하게 생긴 제단이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여기 던전 아니지?”
“농담도.”
“그렇단 말이지…….”
어쩌면 하늘성은 이세계의 몬스터들을 던전에 가두며 신의 제단까지도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그 구조를 이해하려는 생각은 버리고 있었던 정시우에게 그 정도 문제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도 뭐 바치면 뭔가 나오나?”
바로 ‘이 제단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였다.
“하지만 이 제단은 결국 뇌신의 관할이잖아요? 뇌신이 우리한테 뭘 줄 리가 없잖아요.”
“형님, 이쪽에 저는 알아볼 수 없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용세하가 정시우를 불렀다. 눈을 옮기니 과연 제단 옆쪽 모서리에 적혀 있는 문구가 보였다. 이전에 갔던 세상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였지만 정시우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용세하도 수아린도 더 이상 그것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결전의 때, 나의 손길이 직접 닿은 아이들에게만 허하노라. 한 번으로 역할을 다할 것이다.”
“끝? 그게 끝이에요?”
“그야 뇌신을 따르는 놈들한테는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았을까? 사용설명서도 아니고 구구절절이 늘어놓을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사실 정시우에게는 그 정도로도 충분한 설명이 되었다.
문구가 설명하는 바는 세 가지.
결전의 때라는 서두로부터 이 제단을 사용할 수 있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손길이 직접 닿은 아이’라는 부분에서는 뇌신의 힘이 많이 부여된 녀석이 이 제단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뇌신의 축복을 받은 이 정도라면 적절하겠지.
마지막으로, 한 번으로 역할을 다한다는 것은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이 제단이 일회용 소모품이라는 얘기였다.
“일단 제물은 필요 없는 것 같고, 효과는 물체의 생성보다는 생물의 강화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놈들이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이 창고를 지켰는지 이해가 가기도 하네요.”
물론 이 제단에 부여된 신의 힘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이곳에 입장할 때 똑똑히 ‘소신전’이라는 메시지를 보았으니까. 어쩌면 다른 신전에도 이런 제단이 각각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래도 내게는 터무니없이 거대해 보여…….”
“오빠?”
정시우는 수아린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멍하니 제단을 어루만지며 그것을 최대한 깊게 느꼈다.
제단이 피워 내는 압도적인 기세가, 그 안에 깃든 거력이 정시우에게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아마 그가 이보다 마나에 민감했더라면 기세를 이겨 내지 못해 졸도했을지도 모른다.
“……후.”
그런데 어째설까. 자신은 그 발끝에조차 이를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정시우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어렸다. 뿌듯하고 즐거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한 미소였다.
“한 존재가 이렇게까지도 강해질 수 있구나.”
“존재하기는 할까요?”
“존재해. 분명해. 느낄 수 있어.”
그는 감미하듯 자신의 말을 곱씹었다. 순간적으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으나 제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괜히 만족스러웠다.
어떤 이는 단지 이 제단을 보는 것만으로 기절할 것이다. 어떤 이는 절망할지도, 어떤 이는 경외를 품을지도 모른다. 범접할 수 없는 힘을 앞에 두고 미약한 존재가 취할 수 있는 반응이래 봤자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하지만 정시우는 달랐다.
“일단은 이놈보다 강해지는 걸 목표로 삼자.”
“어떻게요?”
“거기까진 생각 안 해.”
선명하게 느껴지는 뇌신의 힘을 앞에 두고 정시우는 강해지고 싶다는 막연한 목표에 구체적인 지향점을 세웠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약한 적들과 싸우느라 조금 미지근해졌던 가슴이 새로이 달구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라면 언제까지고 어디까지고 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좋았어.”
“오빠가 의욕을 고취시킨 시점에서 질문이 있어요. 그래서 결국 이 제단 어떻게 할 거예요?”
당연하게도 정시우는 뇌신의 축복 따윈 받지 않았으니 제단을 이용할 수 없고, 이대로 두면 몬스터들 좋은 일만 시키는 셈이 될 테지만 그렇다고 제단을 부수기도 아까울뿐더러 뭣보다도 정시우의 지금 능력으로 제단을 부술 수 있는가, 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
“써먹어야지.”
그러나 정시우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 말과 함께 그가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것이 있었으니 바로 뇌신의 라이플이었다.
“아, 아아.”
“여전히 멋지군요…….”
인터페이스에 따르면 뇌신의 라이플은 뇌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 내 만들었다고 한다. 제단이 요구하는 것이 뇌신의 손길이라면, 뇌신의 신체 그 자체로 빚어진 라이플이라면 어떻겠는가! 그쯤 되면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상관없이 제단의 힘을 받아 낼 수 있지 않겠는가!
“저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오빠. 그거 불안하지 않아요?”
“불안해. 원래는 꺼내지도 않으려 했는데 그냥 넘어가자니 제단이 담고 있는 힘이 너무 아까웠…… 와오.”
정시우가 말을 잇다 말고 탄성을 자아냈다. 아직 그는 뇌신의 라이플을 제단에 올려놓지도 않았는데, 뇌신의 라이플이 절로 푸른빛을 발산하며 공명을 시작한 것이다.
공명의 대상은 물론 신전 그 자체였다. 라이플이 주기적으로 발산하는 빛에 맞추어 호흡이라도 하듯이 진동을 일으키는 신전. 정시우는 물론이고 뇌신조차 예상치 못했을 우연으로 발생한 기적이었다.
“반응 한 번 격렬하네.”
비록 지금은 봉인되어 있는 상태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뇌신의 라이플은 이 소신전보다도 급수가 높은 물건이었던 것일까? 대기 중에 감돌던 신성력이 모조리 라이플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마치 물방울이 보다 큰 물방울에 흡수되듯이 말이다.
“어, 오빠…… 바깥에서 조금 격렬한 소음이 일기 시작했는걸요.”
신의 힘을 깊이 감지한 신전 내의 몬스터들도 난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신이 직접 강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원래는 신전 내부 깊숙한 곳에 머무르고 있던 엘리트 몬스터들도 다급히 자리를 벗어나 지하로 달려오고 있었다. 일이 아주 재미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몬스터들이 이곳까지 오면 답 없어져요, 오빠! 하려면 빨리!”
“음, 내가 기대한 것보다 조금 더 큰 효과가 발생할 것 같기는 한데…… 뭐 됐나.”
뇌신의 라이플은 가뜩이나 지금도 신전과 공명을 일으키며 힘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제단에 올라가면 무슨 상승작용을 일으킬지 아주 조금 예상이 갔는데, 생각해 보면 어차피 신전은 부숴야 하는 공간이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정시우만 안 다치면 괜찮았다.
“좋아, 혹시 모르니 스톤 스킨 걸어 두고…… 너희도 일단 대비해 둬.”
“끙,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데.”
“하지만 호기심이 없었으면 그 격언이 탄생하기도 전에 인류가 멸망했을 거야.”
정시우는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뇌신의 라이플을 기어이 제단에 올렸다. 과연 정시우의 추측은 들어맞았는지, 제단이 라이플을 감지한 순간 환한 푸른빛을 일으키며 라이플과 공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라이플이 신전과 일으키던 공명에 그것이 겹쳐졌다. 신전이 쿠우우웅, 하고 둔중한 진동음을 내며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전부 무너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신전 파괴율 : 29%]
“그렇지, 결국 파아아아국이다!”
“퍽이나 신나 보이네욧!”
가뜩이나 정시우가 들어와 난리를 피우느라 지하 벽이며 복도며 엉망진창으로 망가지고, 기둥도 대부분 무너져 있던 상태. 거기에 더한 진동이 일어나니 끝내 신전의 중심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이 버티지 못하고 아작이 나고 말았다!
[신전 파괴율 : 31%]
[신전 파괴율 : 33%]
[신전 파괴율 : 39%]
“좋았어, 크리티컬 히트!”
“역시 형님은 미션도 평범하게 클리어하지 않으시는군요!”
[신전 파괴율 : 42%]
정시우는 한 가지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직접 파괴하는 것도 재미나지만, 어디 한 군데 잘못 건드려 와장창 무너트리는 것도 무척 재미나다는 사실을!
생물에도 건물에도 약점은 있다. 그는 지금 그것을 공략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제단에 라이플을 올려놓는 것으로 말이다!
[뇌신 라이아의 제단이 작동합니다. 뇌신의 라이플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제단뿐만 아니라 신전의 힘을 전부 빨아들이기 시작합니다. 남은 시간 ? 20:00]
[이, 이이이이이이이이! 어째서 네놈이 그것을 갖고 있는 것이냐! 용서할 수 없다!]
[뇌신이 당황하여 강림을 시도합니다! 살아남은 몬스터 중 무작위로 강림이 이루어지며, 보다 강한 몬스터에 강림할수록 끔찍한 파괴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당신은 그전에 모든 몬스터를 죽이거나 지구로 귀환해야 합니다! 강림이 이루어지기까지 남은 시간 ? 18:00]
“어, 이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
신이 직접 강림하다니 짱 멋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뇌신의 강림, 이미 신의 힘의 편린을 맛본 정시우에게 그 문구는 사실상 공략실패라 말해도 다름이 없는 사망선고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떠오른 문구가 도주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아티팩트 각성까지 남은 시간이 20분이라니 강림이 이루어지고도 2분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걸 놔두고 도망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18분 안에 정말로 신전 내 모든 몬스터들을 죽이든가, 그렇지 않으면…….
[크와아아아아아아아!]
[감히 뇌신의 힘을 탐하다니이이이이이!]
[놈을 어떻게든 처단한다! 처단한다!]
정시우는 엘리트며 쫄병을 가리지 않고 지하 창고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규모를, 그들의 힘을 가늠해 보며 가만히, 아주 가만히 생각했고, 곧 결론을 내렸다.
“역시 그건 아직 무리겠다.”
“오빠 지금 신의 강림체와 싸워 이길 가능성을 가늠해 보고 있었죠. 내가 정말 못살아.”
“뭔 소리야, 그게 아니야. 그건 고민해 볼 것도 없잖아.”
“네?”
아니, 이 오빠가 언제부터 이렇게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확립하고 있었던 거지? 수아린은 그동안 자신이 정시우를 너무 막가파에 무대뽀로만 판단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에 아주 조금 그에게 미안해졌다. 그러나 그다음에 이어지는 정시우의 말이 그녀의 죄책감을 없애 주었다.
“싸우는 거야 당연히 싸우는 건데, 어떤 몬스터에 강림시킬까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던 거지. 강한 몬스터에 강림할수록 더 강해진다잖아. 그래서 이 던전에서 제일 강한 엘리트 몬스터에 강림하면 진짜 근사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건 아직 못 이길 것 같고.”
“…….”
그렇다. 정시우는 언제나 수아린의 상상을 뛰어넘는 남자였다. 싸우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그에게는 없었다! 기가 막혀 넋을 놓은 수아린을 놔두고, 정시우는 다시 손아귀에 쥔 해머에 힘을 주며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면 일단 엘리트 몬스터들만 골라서 죽여 볼까. 세하야, 시간이 없으니 너도 나서 줘야겠다. 엘리트 몬스터 말고 좀 강해 보이는 놈들만 골라 죽여 줘.”
“알겠습니다, 형님.”
용세하가 본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돌격용 랜스를 거머쥐었다. 용세하 역시 과거 26단계 던전을 공략하던 전사!
비록 리타이어하는 과정에서 힘을 잃긴 했지만, 정시우의 서포터로 거듭나 그가 성장할 때마다 함께 힘을 되찾은 그는 비록 생전의 레벨에는 한참 못 미쳐도 능력만은 그때에 비벼 볼 만한 수준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그것은 물론 용세하 본인이 지난 세월 던전을 공략하며 쌓은 정신적 기량과 몸에 익은 기술 탓도 있겠지만, 서포터로서 거듭난 그의 레벨이 일반적인 플레이어의 레벨과 달리 정시우의 기준으로 맞추어져 있는 탓이기도 했다.
정시우가 평범한 88레벨이 아니듯이, 용세하 또한 평범한 88레벨의 플레이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스테이터스며 마력이 방대했던 것!
‘이 정도면 곧 이전의 나를 뛰어넘는다. 그것보다 훨씬 못 미치는 레벨로도! 이제 나도 활약이 가능하다는 걸 형님께 보여 드릴 때가 온 거야.’
용세하가 굳은 결의와 함께 앞서 돌격했다. 찬란한 나비 날개를 활짝 펼치고, 이곳저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신전 파편을 요리조리 피해 허공을 질주했다!
“먼저 가겠습니다, 형님!”
“저 자식이 날개 없는 사람 서럽게…… 나도 간다!”
정시우 역시 기합을 넣으며 지하 창고를 달려 나갔다. 이 신전에 있는 엘리트 몬스터의 숫자만 족히 두 자리! 놈들을 다 죽이려면 놀고 있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아린아, 그것 좀 지켜 줘!”
“어, 저는…… 네, 그렇겠죠.”
얼결에 그 자리에 혼자 남은 수아린은, 제단 위에서 빛을 발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는 뇌신의 라이플을 내려다보며 성대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주위로 신성방어막을 치며 자리를 잡았다.
1분1초를 다투는 서바이벌 전투가 개시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