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60화.
정시우는 자신이 여태껏 냉장고를 잘못 판단하고 있었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냉장고는 무한한 가능성의 보고였다! 포션이 필요 없다는 이유로 여태까지 이것을 방치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물론 모든 포션의 성능을 확인해야 얼추 견적이 잡히겠지만, 하급 포션에서조차 상당한 양의 마나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중급 포션 정도가 되면 충분히 그가 들어가는 던전에서도 활약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한 대로 하급 포션만이라도 가까운 던전에서 실험해 보고 싶긴 한데.”
“나중에 해 두자구요.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잖아요.”
“그래, 그렇지.”
정시우의 시선이 여태 살피지 않은 휴식처의 다른 가구, 가구라고 부르기도 미묘한 그것들을 향했다. 남은 것은 세 가지, 수련장과 탐색기와 문이었지만 수련장은 말 그대로 단련을 위한 곳 같으니 지금은 패스하고…….
[탐색기 Lv2 ? 휴식처에 저장한 비드를 소모하여 반경 50킬로미터 내의 던전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 침입자들의 통로를 탐색하는 것이 가능.]
탐색기는 거의 진화에 가까운 수준으로 바뀌었다. 탐색 범위가 넓어진 것은 물론이고 ‘침입자의 통로’를 찾아내는 기능까지 생겼으니 말이다. 정시우는 이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대충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신을 추앙하는 몬스터 놈들, 놈들의 본래 세상으로 건너가는 통로.’
정시우는 이미 전직 퀘스트를 통해 다른 세상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것은 정시우를 시험하는 과정인 동시에 앞으로의 그가 나아가게 될 길을 보여 주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두려움이 없느냐고 묻는다면 물론 거짓이었다. 지구와는 다른 환경, 높은 마나의 밀도, 몬스터들의 수준, 정신을 잃기 전 들려온 낯선 여자의 적의에 가득한 목소리까지 다른 세상에는 그가 모르는 것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정시우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한 전직이었다. 그를 짜증나게 하는 것들을 모두 부수어 버리기 위해 그는 파괴자가 된 것이지 않은가. 어쩌면 탐색기의 레벨 업은 그가 전직하는 순간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그 통로가 어디에 나타난다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전직의 제단이 늘상 나타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어쨌든 앞으로의 행동 방침은 정해졌어. 그러니 이젠…….”
이곳에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의 눈이 휴식처의 유일한 3레벨 가구, 출입구를 향했다. 다시 한 번 메시지가 망막 위로 떠올랐다.
[문 Lv3 ? 바깥으로 나가는 문. 비드를 소모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던전에 바로 입장가능. 휴식처 출입 열쇠를 통해서도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를 세 군데 출구로 지정하여 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역시 알림이 괜히 그 절묘한 타이밍에 나를 멈춰 세운 게 아녔어.”
정시우는 만족스레 중얼거리며 문을 쓰다듬었다. 비록 제한이 이것저것 붙기는 했지만 요는 이제 이 문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지상으로 이어지는 개미굴 던전이 나오길 바라며 노가다를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
“해양 몬스터들과 지금 붙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쉽지만.”
“그건 수중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을 때로 미루기로 해요.”
“쳇.”
출구 지정은 이곳에서도 미리 해 둘 수가 있었다. 정시우는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곳, 집 근처를 골라 출구 지정을 마치고는 마지막으로 휴식처를 돌아보았다.
수련장도 미련이 남고, 주방도 한 번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것은 이서희로부터 사정을 들은 후에 해도 늦지 않겠지.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수아린과 용세하를 미니 사이즈로 돌려 품에 안으며 문을 나서려다…… 말고.
“아, 일단 샤워는 해야지.”
“아차.”
어차피 바닷속으로 나가게 될 것 같아 씻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일행이었다.
문을 통해 집 근처 공터로 나오자, 유난히 따갑게 쏟아지는 햇살이 그들을 반겼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후우우우.”
“정말 꼼짝없이 몇 달은 휴식처에 갇혀 있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형님.”
셋은 양팔을 벌리고 비슷한 포즈로 햇살을 즐겼다. 휴식처 열쇠를 소지하고 있어 행인들에게 들킬 염려가 없다는 것만이 다행이었다. 아니, 그러고 보면 아예…….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는데……?”
광합성을 마친 정시우가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주택가이기는 하지만, 이 근처에 아파트 단지도 몇 개인가 있고 그 앞에는 식당가도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결코 적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 거리는 풍경에서 사람을 지워 낸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설악산 사태 이후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렇게 변한 것 아닐까요.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몇 건 있었던 것 같구요.”
수아린이 양손으로 정시우의 스마트폰을 끙차 들어 올리며 말했다. 굳이 뉴스를 볼 것도 없이, 커뮤니티 사이트의 게시판만 들어가 봐도 지금 한국을,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마 지금 수련 과정에 들어간 플레이어들이 테스트 던전을 마치고 나와 지구인의 전력이 대대적으로 강화되기 전까지는 줄곧 이런 분위기가 아닐까 싶었다.
“일단 서희한테 연락 넣고.”
정시우는 이서희에게 적당히 문자를 보내 두었다. 답장은 곧장 왔다. 놀랍게도 이미 그의 집 근처 카페에 와 있다는 것이다. 출구를 집 근처로 설정해 두어 다행이었다.
정시우라면 반드시 반응하리라 생각했던 것이겠지. 수아린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시우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그 태도가!
“으, 으으으.”
“들킬까 봐그래? 너희 은신력도 엄청 늘었으니 괜찮지 않겠어?”
“그, 그래요. 안 들키겠죠…….”
여전히 핀트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정시우의 반응에 수아린은 미묘한 반응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는 피식 웃어 버리며 수아린과 용세하를 품에 들였다.
“좋아, 대체 플레이어가 어떻게 된다는 건지 들어나 보러 가자.”
다행히도 대로변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몬스터들이 지상에 나타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사회가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정시우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들 안색이 좋지 않네…… 아, 이건 원래 그랬던가.”
“이 나라에 꿈도 희망도 없는 것 같은 그런 말은 그만둬욧.”
카페 안에는 보다 사람이 많았다. 사실 근방에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건물 안이라고 해서 안전할 리가 없는데 말이다. 정시우는 그것을 우습게 생각하며 카페 내부를 훑었다.
이서희를 찾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에 충분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으니까. 남자들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쫓으면 그녀를 찾을 수 있다.
역시나,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단발머리의 여성이 보였다. 가지런하게 정리한 검은 머리에 하얀색의 차분한 블라우스가 인상적이었다.
“오랜만.”
“시우야!”
정시우가 그녀에게 다가서며 인사를 하자 이서희는 벌떡 일어나 그를 반겼다. 주위에서 다른 남자들이 작게 혀를 차는 목소리가 들려와 정시우는 역시나, 하고 웃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제법 그리운 감각이었다.
그런데 이서희는 정시우를 보며 살짝 당황했다. 마치 결투 준비를 했는데 적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기사 같은 모습이었다.
“호, 혼자네?”
“그게 왜?”
“아니…… 아무것도 아냐. 흐음, 그렇구나.”
이서희는 정시우의 반응에 순간 옅은 미소를 지었다. 뭔가 알겠다는 표정. 한 점 리드하고 있다는 듯한 저 여유로운 표정! 수아린과 이서희의 통화 내역을 모르는 정시우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지만, 수아린은 정시우의 가슴팍에 퍽퍽 주먹을 내지르며 분노했다.
“얼마만이지?”
“2년 3개월.”
“어…….”
“날짜까지 말해 줄까?”
“아니.”
정시우의 무신경한 물음에 이서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대꾸했다. 설마 구체적인 날짜가 돌아올 줄은 몰랐던 정시우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그녀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로 커피 컵을 밀었다. 카페모카였다.
“농담이야. 나도 날짜까진 기억 못해. 나 그렇게 집착 쩌는 여자 아냐.”
“……잘 마실게.”
정시우는 평소 카페에서 카페모카를 마시는 걸까. 수아린은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획득하는 것과 동시에 이서희에 대한 적대감을 맥스로 끌어 올렸다.
어쩜 이렇게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재수 없는 전 여친의 모습 그대로람! 집착이 안 쩔긴, 이미 푹 절어서 아주 장아찌 수준이었다!
그러나 설마 정시우의 품 안에 자그만 천사 한 명이 자신에게 대한 적의를 불태우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이서희는 자신 몫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쥔 채 정시우를 가만히 보며 물었다.
“키, 더 컸니?”
“조금. 넌 더 어려 보인다?”
“플레이어의 특권이지.”
“아, 그런 것도 있었나.”
플레이어는 잘 늙지 않는다. 레벨이 오르면 오히려 더 젊어지기도 한다.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 20대 초반의 건강하고 튼튼한 육신을 되찾는 것이다.
어쩐지 요즘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더라니, 같은 시시한 생각을 하며 커피를 쪽 빨아 마시고 있으려니 그를 지그시 바라보는 이서희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왜?”
“그냥.”
슬슬 용세하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 근질근질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서라면 테이블 위에 올라가 노래라도 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차라리 따라오지 않는 건데, 하고 맹렬한 후회를 하고 있자니 드디어 이서희가 본론을 꺼냈다.
“왜 안 물어봐?”
“내가 먼저 물어보면 네가 괜히 애태우고 안 가르쳐 줄 것 같아서.”
“옛날엔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막 달려들어서 귀여웠는데.”
“인간은 성장하는 법이지.”
이서희는 그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도저히 사그라지지 않는 감정은 일단 밀어 두고, 지금 해야 할 말을 했다.
“사실 나도 100% 확신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 정돈 예상하고 있었어.”
다음 순간, 이서희가 조용히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들 주위로 마나의 막이 동그랗게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서희는 분명 결계 계열의 힘을 다루는 플레이어였지. 정시우는 상당히 강력한 그 힘을 느끼며 놀랐지만 자신이 마나를 느낀다는 사실을 굳이 지금부터 드러낼 필요는 없었기에 표정관리를 했다.
방음 결계를 친 이서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제법 예전부터…… 몇몇 플레이어들 사이에 돌던 소문이 있어. 하늘성의 던전에 나타나는 몬스터들이 각기 다른 ‘신’을 믿고 있다는 소문.”
“흠.”
정시우의 눈빛이 반짝이자 이서희 역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시우 넌 복잡한 얘기 싫어하지. 결론부터 말할게. 최근…… 몬스터들이 하늘성뿐만 아니라 지상에서도 나타나게 되면서, 그 ‘신’들이 실재하고, 우리 인간들에게도 힘을 줄 수 있다는 증거가 발견되고 있어. 신의 흔적도, 그들의 목소리도…… 나도 봤어. 내가 속한 길드에서 확인했거든.”
“그래서 그 신이 플레이어가 아닌 사람도 플레이어로 만들어 줄 거라고?”
“응. 적어도 나는 그 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은 믿어. 신이 내게 그렇게 말하기도 했고.”
정시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확신했다. 개구라라고 말이다. 인간을 플레이어로 만드는 자는 지금 이서희가 말하고 있는 신들이라는 작자와 절대로 같은 편이 될 수 없었다. 적어도 정시우가 겪은 전직 퀘스트만 놓고 보면 그러했다.
“시우 넌 원래부터 특별했잖아? 만약 네가 플레이어가 된다면…… 정말 엄청 빨리 강해질 수 있을 거야. 네 자리를 찾을 수 있는 거야. 네가 그렇게도 바라던…….”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이서희는 손을 내밀어 정시우의 한 손을 붙잡으며 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에 무수한 감정이 어려 있었지만, 그녀는 그 모두를 일일이 말로 옮기지는 않았다.
“우리 길드만이 아는 장소에 있어. 아직 네가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면…… 나와 함께해 줄 수 있을까? 증거 하나 없지만, 나를 믿어 줄 수 있을까?”
“너희 길드가 발견했다면서, 나한테 말해 줘도 돼?”
“돼. 내가 길드 마스터거든.”
그녀가 플레이어가 된 지는 채 4년이 못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녀는 대단한 재능의 보유자인 셈이었다. 마력도 상당한 것으로 보아 바지사장은 결코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난리가 날 텐데…….”
“얘기하는 건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그 이유도 말해야 해?”
“아니.”
“응. ……그 얘기는 네가 정말 플레이어가 되고 나면 다시 하자.”
아무리 둔감해도 그 말뜻을 못 알아들을 수는 없다. 그들 이별의 이유를 떠올린다면 바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정시우가 플레이어가 되어 자신감을 찾는다면, 열등감을 해소하고 난다면 다시 그와 잘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정시우는 그 순간 생각했다. 인연의 끝을 잘못 맺은 탓에 여태 자신이 이서희를 괴롭혀 왔던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한심한 태도에 질려, 새로운 자신에 익숙해져 정시우 따윈 진즉 잊었으리라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안일한 판단 아니었을까.
“서희야. 나는…….”
“응.”
정시우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서희에게 대놓고 말해 주어야 할까? 옛날엔 내가 죽을죄를 지었지만, 이제 와 플레이어가 된다 해서 사라진 감정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고? 그럴 거면 지하 플레이어가 된 순간 바로 연락했을 것이라고?
‘내가 생각해도 제대로 개새끼 같은데, 이거.’
정시우는 결국 말하지 않았다. 어찌 됐든 이서희가 말하는 ‘신’과 그 ‘흔적’을 알아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그것을 해결하고, 이서희의 착각을 바로잡아 주고, 그다음에 제대로 종지부를 찍어도 늦지 않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뺨이라도 맞아 주자, 하고 생각하며 그는 말했다.
“고마워, 서희야. 믿어 볼게.”
“응……!”
이서희가 기쁨에 가득 차 대꾸했다. 순수한 기쁨으로 가득한 그녀의 미소에 가슴 한구석이 켕기는 것을 느끼며 정시우도 애매하게 웃었다.
수아린이 그의 가슴팍을 다시 퍽,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