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59화.
숙면으로 모든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날려 버린 정시우가 산뜻한 기분으로 눈을 떴을 때, 그는 수아린이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너 안 잤냐?”
“잤어요. 제대로 못 잤지만.”
“그럼 더 자야지.”
“도저히 자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서요.”
수아린은 자신의 감정을 제쳐 두고 현재 상황만을 객관적으로 전달했다.
“오빠가 잠든 사이 전화가 와서, 실례지만 제가 받았어요.”
“그건 괜찮은데.”
“이서희라는 분한테서 온 전화였는데.”
“걔가 뭐래?”
정시우는 지극히 평범한 말투로 반문했다. 수아린은 그의 태도에 어째선지 아주 조금 안도하며 말을 이었다.
“플레이어가 되는 방법을 알게 되어서 오빠한테 알려 주고 싶다고 하던걸요.”
“지하 플레이어? 리타이어한 플레이어 받아 내기?”
“알려 달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전화를 제가 받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끊더라고요. 오빠랑 직접 만나서 오빠에게만 알려 주겠다고.”
정시우는 하품을 하더니 픽 웃었다.
“여전히 귀여운 녀석이네.”
“전 여친?”
“응. 한참 전에 헤어졌지만. 그 녀석이 플레이어가 된 후에.”
“…….”
수아린이 용오름 길드의 플레이어였다지만, 그녀가 한국의 모든 플레이어들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그 뜻밖의 소식에 분노했다.
“플레이어가 된 후에 오빠를 찼단 말인가요? 자기 조건이 좋아졌으니까 잘나가는 남자라도 만나겠다고?”
사실 그것은 상당히 흔히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늘성이 나타난 후로 지금까지 쭉, 플레이어란 굉장한 특권층으로 대접받았으며 지닌바 무력, 금력으로 일반인에게 경외를 받고 법으로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플레이어들은 일반인들과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잘 사귀고 있다가도 어느 한쪽이 플레이어가 되어 깨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수아린은 그것을 무척 경멸했다.
“그건 아냐.”
그러나 정시우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못 견디겠더라고. 내 열등감의 소치였지.”
“어, 그…… 죄송해요.”
“너도 보다시피 이젠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자신이 정말 특별하다는 확신이 있었다면, 플레이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면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선 안 되었다. 그녀를 축복하고 응원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일이다.
“오빠도 인간이긴 하네요…….”
“그럼 여태까진 괴물로 보였냐?”
플레이어도 아니면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수아린을 받아 내고, 웨어울프들로 득시글한 테스트 던전을 짓밟다시피 통과한 주제에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하는 거람. 수아린은 정시우의 반문에 흥,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그분 만나 보실 거예요?”
“인터넷을 뒤져 본다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겠지……?”
어쩌면 이서희가 그런 소식을 물고 온 것도 그녀가 플레이어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일반인들이 인터넷 따위로 접할 수 있는 정보였다면 정시우에게 알려 주겠다며 연락을 해 오는 일도 없었겠지.
그는 시험 삼아 인터넷 페이지를 뒤져 보았지만 결과는 역시나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그럼 만나서 얘길 들어 봐야지 뭐.”
“그, 그래요.”
수아린은 적잖이 긴장하고 말았다. 지금 상황을 정리해 보면 일단 과거 정시우가 이서희를 찼고, 이서희는 아무리 봐도 정시우에게 미련이 있어 보이고, 정시우는 이제 이서희를 찼던 이유가 말끔하게 사라진 상황이고…….
그 상황에서 둘이 재회한다면. 어쩌면.
‘이거 엄청 위험한 상황 아닐까!?’
주로 그녀의 첫사랑에! 아니, 아직 사랑은 아니지만!
“그러면 결국 밖으로 나가긴 해야 한다는 얘긴데, 아마 출구는 여전히 심해로 통해 있겠지……. 정말 헤엄이라도 쳐서 육지로 나가야 하나.”
그러나 정시우는 수아린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숨을 쉬며 쓸데없는 걱정을 할 따름이었다. 수아린의 긴장감이 바보처럼 느껴질 만큼 태연한 모습에 그녀마저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세하 아직 자냐?”
“깼습니다, 형님.”
“좋아, 이리 와. 아린이 너도.”
정시우는 결국 바닷속으로 나갈 각오를 굳혔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바닷속 던전을 전전할 수는 없다. 강화된 지금의 육신이라면 제아무리 심해라고 해도, 해저에 몬스터들이 있다고 해도 그 위협을 떨쳐 내고 지상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
그런데 하필이면 그가 비장한 각오를 다진 그 순간 그의 망막 위로 메시지가 새겨졌다.
[비드를 투자하여 휴식처를 강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휴식처가 알아서 4레벨로 강화되었음에도 여태 바뀐 휴식처의 능력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일어나 뭘 좀 해 보려는 순간 들려온 이서희의 소식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깐만…….
“가만, 여기서 더? 휴식처를 5레벨로 강화할 수도 있다고?”
[보유하고 있는 몬스터 비드의 30%를 소모하여 휴식처의 레벨을 5로 성장시키는 것이 가능합니다. 강화하시겠습니까?]
“음.”
어째서 휴식처가 알아서 4레벨로 성장한 것인지도 잘 파악이 안 가는데 5레벨로 강화시키는 데에 드는 비드의 양도 비정상적으로 적다니.
그 이유가 어째서일지 가만히 생각하던 정시우는 문득 자신이 던전에서 얻었던 밴시와 가스트의 비드를, 제단을 찾지 못한 결과 고스란히 휴식처에 저금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떠올려 내고 말았다.
“이런 썩을…….”
“늦은 건 어쩔 수 없죠 뭐.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쩌면 내가 나가기 전에 이런 알림이 떠오른 게 지금 상황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지.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
고민은 짧았다. 정시우는 곧장 휴식처를 강화했고, 가뜩이나 한 차례 넓어졌던 휴식처가 다시 한 번 넓어지며 급기야는 어지간한 아파트만 한 넓이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어, 어어어.”
“용세하, 거기서 나와. 벽 솟아난다.”
“벽? 으겍!”
여태 덩그러니 침대가 놓여 있던 곳 주위로 벽과 문이 솟아나 어엿한 침실로 독립했고, 그냥 샤워 부스 정도 크기였던 욕실도 마찬가지였다.
한쪽에는 그럴싸한 주방시설과 식탁까지 생겨났다. 이젠 그 누구도 이 공간을 집이라고 부르는 데 의문을 품지 않을 터였다. 수아린이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점점 스위트 마이 홈이 완성되어 가네요.”
“그 실체가 무시무시하긴 하지만요!”
[휴식처가 5레벨로 성장했습니다.]
[모든 가구의 능력이 조금씩 향상됩니다.]
[주방 Lv1이 추가됩니다.]
[주방 Lv1 ? 요리 가능. 몬스터의 마석 가공이 가능.]
[서랍, 냉장고, 문, 탐색기의 레벨 업이 가능합니다.]
[수련장 Lv1을 생성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수련장에서는 힘의 폭주 위험 없이 육체와 스킬을 단련할 수 있습니다.]
정시우는 정신없이 떠오르는 알림을 모두 꼼꼼히 읽은 후 조용히 물었다.
“모든 가구를 레벨 업 하고 수련장까지 만들 수 있을까?”
[보유하고 있는 비드의 97%를 소모하여 생성할 수 있습니다.]
“좋아, 아슬아슬하게 가능해.”
“이것도 모두 밴시와 가스트의 비드 덕분이네요!”
“조용히 해, 용세하.”
“넵…….”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정시우는 곧장 휴식처 가구들의 강화와 생성을 지시했다. 곳곳에서 빛이 치솟으며 가구들을 변화시키는가 하면 쓸데없이 넓기만 하고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역기며 러닝머신, 샌드백이 생겨나며 침실이 생겼을 때와 마찬가지로 벽이 솟아나기도 했다.
변화는 길지 않았다. 공간을 변혁시키고 남은 마나가 휴식처의 출구에 모여 번쩍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정리되었다. 자연스럽게 정시우의 눈 위로 변화가 완료된 휴식처의 정보가 떠올랐다.
[휴식처 Lv5]
[침대 Lv2 ? 숙면 가능. 휴식 시 체력과 마력 회복 효율 20% 증가. 아주 서서히 모든 스킬의 숙련도 증가.]
[서랍 Lv2 ? 물건 보관 가능. 천천히 물건의 상태를 되돌린다.]
[문 Lv3 ? 바깥으로 나가는 문. 비드를 소모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던전에 바로 입장가능. 휴식처 출입 열쇠를 통해서도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를 세 군데 지정하여 출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욕실 Lv1 ? 목욕 가능. 신체에 남은 미약한 독과 저주, 그 외 부정한 기운을 해소]
[냉장고 Lv2 ? 식품 보관 가능. 10시간마다 2병씩, 랜덤한 능력의 중급 포션을 생성]
[탐색기 Lv2 ? 휴식처에 저장한 비드를 소모하여 반경 50킬로미터 내의 던전을 탐색하는 것이 가능. 침입자들의 통로를 탐색하는 것이 가능.]
[주방 Lv1 ? 요리 가능. 몬스터의 마석 가공이 가능.]
[수련장 Lv1 ? 수련 가능. 이 안의 물건들은 절대 파괴되지 않음.]
“와오.”
정시우의 입가에 절로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처음 휴식처에 들어왔을 때의 간단한 메시지에 비하면 이쪽이 훨씬 그의 마음에 들었다. 자신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공간이다.
“좋아, 하나씩 다 살펴보자.”
“서랍에 붙은 기능이 특이한걸요. 물건의 상태를 되돌린다니…….”
“이거 혹시 수리기능을 말하는 건가.”
아티팩트라고 해서 천년만년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아티팩트에는 엄연히 내구도라는 것이 존재했다. 당장 거랑의 앞발만 해도 흑랑의 앞발이 파괴되며 탄생한 무구가 아니던가.
여태까지는 어디에 수리를 맡길 방법도 없어 그냥 들고 다녔지만, 앞으로는 아티팩트를 수리하고 싶을 때 휴식처의 서랍에 넣어 두면 되는 것이다.
혹여 수납공간이 부족할까 싶어 서랍을 열어 보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겉으로 보기와 다르게 서랍은 그 안이 지독하도록 넓었다. 공간확장마법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정시우는 뭔가 실험할 만한 것이 있나 인벤토리를 뒤져 봤지만 모든 아티팩트가 지나치리만치 튼튼했기에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그다음은 냉장고. 정시우는 원래 포션에 의지한 적이 없기에 냉장고에만은 손을 댄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다른 것들을 강화하는 김에 한꺼번에 강화하게 되었다.
2레벨로 업그레이드되면서 10시간에 두 병, 랜덤한 능력의 중급 포션을 생성하게 되었다니 이전보다 훨씬 좋아지긴 한 것 같은데…… 문제는 냉장고를 강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급 포션의 능력을 아직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태까지 생성된 하급 포션이나 다 회수하자.”
한 번도 손을 댄 적이 없으니 포션이 냉장고 가득 쌓여 있겠지, 기대하며 냉장실 문을 연 정시우는 그 안에 가지런히 나열해 있는 스무 병의 하급 포션을 발견했다. 냉장고가 1레벨일 때 10시간에 한 병이었으니, 그동안 고작 200시간, 8일 조금 넘게 흘렀다는 얘기였다.
요 며칠 지나치게 밀도가 높은 나날을 보냈던 정시우는 포션을 회수하며 비로소 그사이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았었음을 깨달았다.
“고작 8일 만에 이렇게 강해지다니 역시 나는 천재인가.”
“오빠 정말 재수 없네요.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제일 약 올라요.”
“형님, 이거 아무래도 회복 포션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용세하가 포션들을 살피더니 말했다. 붉은 액체가 든 체력 포션, 푸른 액체가 든 마력 포션을 살피며 정석적인 색상 배치에 감탄하던 정시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가 내민 포션병을 받아 들었다. 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급 중독 포션 ? 무미무취의 독. 독 내성이 없는 이는 포션을 조금이라도 마실 경우 마비 상태가 된다.]
“이것들이 지금 누굴 죽이려고…….”
“어, 형님……. 여기 이것들 좀.”
“응?”
계속 냉장고 안에만 있었을 텐데도 어쩐지 살얼음이 낀 것처럼 보이는 하늘색의 포션과, 그와 반대로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것처럼 붉은 기운이 소용돌이치는 포션.
그는 떨리는 용세하의 손으로부터 그것을 넘겨받아 확인했다.
[하급 빙결 포션 ? 빙결의 마법액이 들어 있다. 이것을 던져 깨트리면 포션의 효과범위 내의 사물이 얼어붙는다.]
[하급 폭발 포션 ? 폭발의 마력을 농축한 액체가 담긴 병. 병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효과범위 내에 폭발을 일으킨다.]
“…….”
정시우는 조용하고 신속하게 그것들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폭탄마의 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