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33화.
정시우의 삶은 맹수의 투쟁과도 같았다. 그를 자극하는 무언가가 없다면 그는 한없이 나태해질 수 있었지만, 그의 마음을 잡아끄는 것이 있다면 그는 결코 지치지 않고 움직였다.
“그래도 지금은 휴식이 필요해요.”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또 다른 던전을 찾아 나가려던 정시우를 단호하게 붙잡으며 수아린이 하는 말이었다. 정시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침대를 가리켜보였다.
“휴식했는데?”
“하룻밤 휴식으로 끝날 일이라면 말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 오빠는 명백히 과로를 하고 있다구요. 쉴 새 없이 던전을 돌아다니질 않나, 오빠 수준보다 아득히 높은 던전에서 무리하며 패시브 스킬을 익히려 하질 않나…… 더욱이 단기간에 레벨이 너무 빨리 높아진 게 제일 큰 문제예요.”
레벨이 오르면 체력도 마나도 회복되니까 휴식의 필요성도 줄어드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던 시기가 수아린에게도 있었다.
“레벨 멀미라는 게 존재해요.”
“레벨 멀미, 맞습니다. 저처럼 평범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과는 영 인연이 없는 단어지만, 용오름 창립 당시부터 1군에서 활동한 수아린 선배님이라면 겪어보신 적도 있겠네요.”
용세하가 거들었다. 정시우의 눈썹이 찌푸려지자 수아린이 간단하게 해설했다.
“레벨이 급격히 오르면 정신이 육체에 적응을 하지 못해 어지럽고, 쉽게 지치는 일이 생겨요. 그 상태로 연달아 전투를 이어가면 보다 심각한 일을 겪게 될 수도 있구요. 그러니 시간을 두고 신체 상태를 조율할 필요가 있어요. 요는 균형과 적응이죠.”
“흐음.”
정시우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킬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선 자기 자신의 육체를 철저히 파악하는 일에 가장 중점을 두었는데, 지금은 바로 그 육체가 단번에 15레벨이나 상승한 상태가 아니던가. 이대로 스킬을 발현하다 보면 분명 어긋나는 점이 있을 터였다.
“적당한 휴식은 성장을 위한 발판이라구요.”
“그래. 쉬면 되잖아, 쉬면.”
정시우는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물론 쉰다고 해도 그냥 누워 멍 때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가벼운 신체단련이라도 하면서 감각을 끌어올려볼 생각…….
“표정이 왜 그러냐?”
“오빠의 생애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사인은 고독사 확정이네요.”
“뭐 임마?”
수아린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쇼핑이라도 하죠, 쇼핑. 인형의 집도 사야 하잖아요?”
“확실히 사긴 사야지.”
“아니, 정말 사야 합니까? 부탁이니까 그냥 아기용 침대 정도에서 타협 보죠!”
“너도 이래저래 달관했구나?”
원래 어제 해결하려고 했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면 뭘 주문한다고 해도 지하 휴식처까지 배달이 올 수는 없었다. 그런 면에서 마찬가지로 쇼핑도 필요할지 모른다.
“냉장고도 생겼고 말이지.”
“되게 뿌듯해하네요, 오빠.”
사실 여태 그가 벌어들인 돈으로 저런 냉장고 정도는 수천 개라도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뿐인가? 이미 대저택을 현찰 박치기로 구매할 만한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보통 레벨 50의 플레이어라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테스트 던전부터 이미 레벨 100에 육박하는 몬스터들을 잡아대며 달러를 벌어들인 정시우라면 가능하다!
그러나 정시우는 그녀의 제안에도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냐. 바깥세상에 거처를 만들어두면 꼬리를 밟히기도 쉬워.”
“이 사람은 대체 누구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건지…….”
어쨌든 수아린의 주장은 타당했다. 정시우는 쇼핑을 하기로 했다. 수아린은 언제나처럼 정시우의 가슴팍으로 기어들어갔고 용세하는 그의 오른쪽 어깨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수아린이 용세하를 쫓아낸 탓이다.
“저도 형님 품이 따뜻해서 좋을 것 같은데.”
“기분 나쁘니까 오해할 만한 말 하지 마라.”
일행은 밖으로 나와 바이크를 탔다. 목적지는 근처 대형 마트, 교통법규를 준수하며(이전 떼어냈던 번호판은 다시 붙여놓았다.) 바이크를 달리던 정시우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어째 바이크 유동인구가 늘어나지 않았냐?”
“그것도 오빠 거랑 비슷한 모델들이네요.”
도로 위에 제법 많은 숫자의 바이크가 달리고 있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 바이크의 도색 상태였다. 빨강과 하양의 익숙한 투톤. 절로 배가 고파져오는 풍경에 정시우는 태평하게 중얼거렸다.
“이 근처에 중국집이 많이 늘었나 보네.”
“어딜 어떻게 봐도 오빠 따라하는 거잖아요!”
“젠장, 나도 알고 있어!”
정시우는 그쯤에서 현실도피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렇다. 아무리 봐도 저들은 정시우를 따라하고 있었다. 정시우는 그저 운이 없어 공중파 TV 한 번 탄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 그는 여전히 전 세계인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상태였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는 대참사로 번질 뻔한 사태를 최소한의 피해로 끝낸 장본인이기도 할뿐더러,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괴력으로 몬스터들을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끝장내 영상을 본 모든 이를 강하게 매료시켰던 것이다.
물론 플레이어 중에 그보다 더한 마력, 더한 힘을 지닌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처음부터 강했던 자와 몸에 맞지 않는 강함을 억지로 껴입은 자는 그 태도와 행동이 본질적으로 다른 법.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장난질처럼 고블린들을 농락하고, 해머 한 번 휘둘러 고블린 백부장을 참살한 정시우의 모습에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경외감을 품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정시우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X튜브에 올라간 근접 촬영 동영상은 이미 1억 히트를 달성했고, 지금 이 순간도 실시간으로 조회수가 오르고 있었다. 뉴스 영상과는 카운트가 따로 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파급력이었다.
“팬 카페도 생겼네요.”
“세계 최초의 헌터라는 칭호까지…… 역시 이래서 시장 선점이 중요한 거군요.”
“그건 또 뭔…… 야, 너 경영과지.”
“헉.”
하늘성의 플레이어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몬스터가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 누구보다 빨리 나타나 놈들을 제압한 것은 다름 아닌 정시우였다.
물론 하필이면 그날이 경매일이어서 플레이어들이 모두 하늘성에 올라가 있었던 탓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것 덕에 그만큼 정시우가 더 주목을 받고 있는 셈이었다.
“젠장, 아직 주목받을 때가 아닌데…….”
“아직이라고 선언하는 부분이 글러먹었네요.”
적어도 이렇게 그를 따라하는 사람이 남아 있는 한 그의 정체를 쉬이 들키지 않으리라. 정시우는 그 사실에 안도해 한숨을 내쉬며 바이크를 멈춰 세웠다. 마트에 도착한 것이다.
“사람 많네.”
요 근래 사람들의 쇼핑 패턴은 실로 단순했다. 여차하는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장기간 집에 짱박힐 수 있도록 통조림을 비롯한 보존식품 위주로 쇼핑하는 것.
먹을 것 외에는 도끼나 몽둥이처럼 유사시 몬스터를 때려잡을 수 있는 호신용 무기를 사는 경우가 많았다. 각 가정에 호신용 무기 구비율이 높아지면서 도둑이 줄었다나 뭐라나.
“일단 침대 사러 가자.”
“되도록 사내아이다운 걸로 부탁드립니다.”
용세하에게서 짙게 드러나는 체념의 정서를 정시우는 애써 무시하기로 했다. 그들은 바삐 움직여 침대를 고르고, 살 필요도 없겠지만 괜히 기분을 내기 위해 전자제품과 가전 코너를 돌았다.
“그러고 보니 휴식처에는 주방시설이 없었죠. 살까요?”
괜히 들뜬 수아린이 제안했으나 정시우는 요리를 못한다는 한 마디로 그녀의 제안을 일축했다. 수아린은 아주 조금 풀이 죽었다.
“우리 휴식처 전기도 안 돼.”
“그러면 냉장고는 어떻게 되는 거죠, 형님? 어라, 확실히 수도 시설도 있었죠?”
“아주 좋은 질문이야.”
정시우는 상쾌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건 나도 몰라.”
“…….”
정시우는 굳이 추가적으로 조리할 것 없이 바로 먹을 수 있는 식품 위주로 코너를 도는 것으로 깔끔하게 남자의 쇼핑을 마쳤다.
비록 계산할 때 아기용 침대를 사려고 하는 그에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이젠 그것도 익숙하게 받아넘길 수 있었다. 익숙해졌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 슬펐다.
“아, 저기 또 나온다.”
카트를 끌고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향하던 그때, 마트 벽에 걸린 대형 TV에 또 산하동에서 활약하는 정시우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이 사람들은 TV에 틀 것이 그렇게 없는 걸까, 하고 한가로이 생각하고 있자니, 직후 뉴스 데스크로 화면이 전환되며 아나운서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이 플레이어에 대한 정보를 갖고 계신 분들은 제보 부탁드립니다.]
“으잉?”
대대적으로 수배당할 만한 짓은 한 기억이 없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급진적 전개에 정시우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나 아나운서는 상황을 설명해주지 않았고, 곧이어 다른 영상이 TV에 나타났다.
아마도 대한민국의 산으로 추정되는, 수풀이 우거지고 풍광이 수려한 산의 언덕이며 계단이며 봉우리마다 가득가득…… 몬스터가 있었다.
“더, 던전인가……?”
“던전이라기엔 지나치게 넓어요. 무엇보다도 영상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건…….”
“저거 속초에 있는 설악산 아닙니까, 형님? 제가 어릴 때 여름마다 부모님한테 끌려가서 설악산의 봉우리란 봉우리는 다 가봤는데…….”
용세하가 정답을 맞히었다. 헬기를 타고 산의 풍광을 비추던 카메라가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있던 리포터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설악산에 무슨 괴사가 일어난 것인지 설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악산 비룡폭포 인근을 기점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몬스터들은 연락을 받고 늦지 않게 출동한 플레이어들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사태가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몬스터가 대량으로 출몰했습니다. 더욱이 그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어 지금은 숫자가 얼마에 이르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데요, 산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 정부에서도 섣불리 진압을 할 수가 없는…….]
그것은 전 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몬스터 영역 확장 사례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한국의 산하동에서야 정시우의 조기 진압으로 던전 자체가 소멸했지만, 다른 나라는 던전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거나 보스 몬스터를 놓친 탓에 던전이 세상으로 완전히 풀려나는 일이 많았다.
그 결과 몬스터들이 지구에 정착해 세력을 불리고, 인간의 영역을 완전히 빼앗아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날 찾고 있는 건가.”
하지만…… 정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던전이 남아 있는 상황이라면 몰라도, 이미 던전이 완전히 터져 보스 몬스터까지 풀려난 상황에 정시우가 그곳에 간다고 해서 사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정시우를 지우개나 만능 에디터쯤으로 여기고 있다면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오빠?”
“이미 나보다 강한 플레이어들이 그곳에 가 있겠지? 그러면 결국 몬스터들은 어떻게든 해결이 될 테고, 인명구조는 나 하나 더해진다고 급격하게 빨라질 것도 아니고.”
“오빠보다 강한 플레이어는 이제 그렇게 많지 않은데요.”
만약 수아린의 말을 다른 플레이어들이 들었다면 ‘우리가 보낸 10년의 세월은 대체 뭔데!’ 하고 따질 법했으나 사실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플레이어가 되기 전부터 이미 100레벨의 플레이어에 육박하는 힘을 지녔던 정시우가 지하 플레이어로서 50레벨을 달성하고 스스로 패시브 스킬까지 만든 시점에서 대부분의 이야기는 정리되는 것!
“어찌 됐든.”
정시우는 돌아섰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카트의 내용물을 모두 인벤토리에 밀어 넣으며 그는 자신의 생각까지 정리했다.
“일단은 휴식을 취하면서 내 신체 상태를 정상으로 만들어야겠지. ……그리고 그때까지도 설악산이 난리라면.”
그때는 가 봐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던전이 터졌을 땐 터진 대로 뭔가 해결을 할 방법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꼭 그게 아니라 해도 현실 세상에 나타난 엘리트 몬스터가 뱉어놓는 비드가 아닌 마나의 결정, 그것에도 흥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딱 그 정도의 관심이었다.
정시우는 쿨하게 휴식처로 귀환해, 스스로 선언한 대로 휴식과 신체 적응 훈련을 시작했다.
그사이 사태는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