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30화.
모든 보스 룸의 보스는 문이 열리고 3초간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나 산악지대의 구릉을 그대로 옮겨온 것만 같은 보스 룸은 3초 동안 내달려 보스의 뒤통수를 갈기기에는 지나치게 넓었고, 그렇다고 놈을 원거리에서 공격하기에는 정시우가 지닌 기술이 지나치게 일천했다.
결국 그는 선제공격을 포기하고, 놈을 포착하고 어떻게 공격해야 유효할지를 궁리하며 서서히 몸을 놀렸다. 그사이 3초가 지났고, 비로소 놈이 고개를 들어 정시우를 직시했다.
[나를 이곳에 가둬놓은 것이…… 네놈이냐?]
“후우.”
그저 노려보고 있을 뿐임에도 숨이 턱턱 막혔다. 놈이 풍겨내는 기세는 기갑 오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갑 오크 백부장에 비해도 족히 30센티미터 이상은 거대한 키에 양옆으로 떡 벌어진 체구는 실로 위압적이었고, 전신을 빼곡히 뒤덮은 기갑은 기하학적인 푸른빛의 선을 그려내는 것이 다른 기갑 오크들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정시우는 답했다.
“나는 아니지만, 그래. 나라고 해두지 뭐.”
[크크큭…… 내 분노를 읽고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약함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감히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것인가.]
정시우와 놈의 무력의 차이는 확연했다. 맨 처음 이 던전에 들어와 기갑 오크와 마주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정시우는 아주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놈에게 이렇게 대꾸했다.
“아예 꼭지가 돌아버리면 더 상대하기 편하지 않을까, 싶었거든.”
[큭, 크하하하하하하!]
적을 이길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도발을 하다니? 정시우는 자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 환희에 떨고 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자신이 벽에 부딪히게 되면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 생각한 적이 있던가? 적어도 그 답은 얻은 것 같았다.
“그래.”
그는 망치를 단단히 쥐고 앞으로 나섰다. 본능적으로 전진하며 적의 기세를 이겨냈다.
“내가 물러날 리 없지.”
그는 평생 멈추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멈추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벽이 제아무리 높건 알 바 아니었다. 달리고 달려서, 벽이 무너질 때까지 그저 달릴 뿐이다.
그 외의 경우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붙자.”
[그래,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굴려 무엇 할까! 지금은 그저 네놈의 목을 따는 것만을 내 목표로 삼겠다!]
기갑 오크 천부장 역시 그와 비슷한 결론에 이른 모양이었다. 놈은 여타 기갑 오크들이 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워 엑스를 들어 올리며 정시우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다른 오크들은 기합을 주고서야 간신히 드러낼 수 있었던 ‘오크의 힘’이, 지금 놈에게선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발산되고 있었다. 기갑 또한 놈의 마나를 원천적으로 빨아들여 폭력적인 물리력으로 바꾸고 있다. 정면승부로 승산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이 기계에 의존하고 있다는 근본 명제까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틈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어. 기갑 오크란 탄생부터가 결함인 종족. 그들의 허점은 이미 무수히 보아왔다. 경험에 거짓은 없어.’
강한 힘을 위해 기계를 몸에 받아들인 것은 과연 용감한 시도이지만, 생체와 기계의 결합에 아무런 결함이 없을 리가 없다. 정시우는 이미 던전을 탐험하며 몇 번이고 그런 광경을 보아왔다. 제아무리 그중에 특별한 놈이라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내 부하들을 전멸시키고 왔느냐?]
“한 놈도 빠짐없이.”
[너를 미워할 이유가 한 가지 추가되었군.]
정시우는 놈의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감정을 일부러 읽지 않았다. 놈의 어깨 근육의 움직임, 휘둘러지는 도끼의 각도만을 계산했다.
“흡!”
정시우가 옆으로 몸을 날린 직후, 놈의 도끼가 허공을 가르고 대지를 부수었다. 기계 팔뚝에서 증기가 치솟으며 대지를 족히 2미터 이상은 파놓았다.
그러나 정시우는 훤히 드러난 놈의 틈을 공략할 수 없었다. 공격해 들어가면 다음 순간, 자신이 여태 다른 오크에게 그래왔듯 강렬한 바디 태클이 들어올 것임을 익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피하며 눈치를 보기만 해선 나를 넘어설 수 없어!]
“너도 언제까지 그렇게 무식하게 무기를 휘두르고 있을 수는 없을 테지, 안 그래?”
[하!]
놈의 기력이 일이십 분 도끼를 휘두른다 해서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정시우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크가 지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지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가 이기기 위해선 놈의 틈을 찾아, 놈이 반격할 엄두를 못 낼 만큼 강력한 일격을 먹여야 했다.
그 수단이 무엇인지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오빠. 언제든 도망칠 수 있으니까.”
“그래, 걱정하지 마.”
물러서는 일은 아마 없을 테니까. 정시우는 뒷말을 삼키며 도끼를 들었다. 전신의 감각을 고조시키며 망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패시브 스킬까지 앞으로 한 걸음. 마나를 굳이 소모할 필요는 없다. 이미 그의 육신은 마나로 강화되었으며 충분히 변이했다. 그의 인식을 벗어나 진화한 힘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어 적에게 상처를 입히면 되는 것.
[나를 도발해놓고 그렇게 겁쟁이처럼 뒤로 물러나기만 할 것이냐?]
“하.”
정시우는 적의 도발에 코웃음을 치며 몸을 놀렸다. 슬레지 해머는 계속해서 회전하고 있었다. 오크 천부장이 절묘한 타이밍에 도끼를 휘둘러오지 않았다면 이미 놈의 몸통에 직격했을 것이다.
천부장은 정시우가 약하다고 해서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오크들을 모두 전멸시키고 왔다는 사실을 놈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죽어라!]
정시우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분노를 담은 거대한 워 엑스가 공기까지 가르고 베어냈다. 그는 빠르게 몸을 놀려 공격을 피해내며 놈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저것이야말로 스스로 패시브 스킬을 익힌 자의 움직임이었다.
“더 보여 봐. 지금 그것뿐이라면 실망인데.”
[꼬리 내린 개새끼처럼 뒤로 물러나기만 하는 주제에 말이 많구나. 과연 네게 더 시간이 주어질 것 같으냐?]
증기가 뿜어져 나올 때마다 허공에 번개를 닮은 궤적이 그려졌다. 워 엑스가 짐승처럼 포효하며 정시우의 목덜미를 노렸다.
전신의 신경이 곤두섰다. 놈의 공격 앞에 정시우의 방어구는 그리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한 방 맞으면 중상, 재수 없는 곳에 맞으면 즉사. 정시우의 레벨이 지금보다 10은 더 높았더라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시우는 놈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떨어지지 못했다. 기갑 오크들과는 차원이 다른 몸놀림, 놈의 정신과 육체, 무기가 하나가 된 것만 같은 모습이 그를 매료시키고 있었다.
‘액티브 스킬을 완전히 포기한 대신, 패시브 스킬의 궁극을 추구하는 거야. 이놈은 저 괴물 같은 육체를 기반으로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룰 수 없는 무도의 길을 만들어냈어.’
마음 같아선 대련 스승으로 삼아 수천 번이고 싸우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광경의 대가는 바로 목숨의 위기.
정시우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위험한 순간에서 그가 지닌 마나를 최소한으로 써서 놈의 공격을 피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아직 공격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아직.
[피하는 것만은 잘 하는구나!]
“피하는 것도 잘 하는 거지. 평생 뭘 피해본 적이 없는데 글쎄 이것까지 잘 하더라니까. 내가 생각해도 난 너무 사기인 것 같아.”
[그렇다면 그 외의 것도 보여 보거라!]
순간적으로 신체를 가속하는 전투질주의 힘을, 순간순간마다 발휘하여 적의 공격을 피하는 용도로만 구사하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가능했다. 목숨이 걸리면 못할 일이 없었다. 순식간에 전투질주의 레벨이 2나 올랐다.
[마나가 그리 많지도 않은데, 쥐새끼처럼 도망만 치느라 그것을 소모하고 있구나.]
천부장이 웃었다. 정시우도 웃었다. 전투가 시작되고 어느덧 10분이 흘러 있었다.
서서히 놈의 움직임이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기갑 오크들로부터 힘을 어떻게 다루는지 배웠지. 하지만 놈들은 무기를 들었을 때 힘을 다루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어. 그러나 천부장은 다르다.’
정시우가 가장 주목한 부분은 천부장이 무기를 휘두를 때 놈의 근육의 움직임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무기를 휘두르는 순간의 호흡, 내딛는 발걸음, 정시우의 위치와 약점을 파악하는 눈빛, 그 모두와 조화되는 도끼의 궤적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놈의 육신 깊숙한 곳에서 놈의 전신과, 도끼의 궤적과 동조하며 빛을 발하는 별, 마나의 결정……!’
생사가 오가는 전투 속에서 정시우는 비로소 패시브 스킬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그저 그곳에 있는 것. 당연하게 존재해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잔잔히 쌓이고 쌓여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하는 힘, 마나와 육신의 결합의 상징!
[큭!?]
순간 천부장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어깨를 더듬으니 파괴된 기갑의 파편이 묻어났다.
[놈……!?]
“마나는 느껴지지 않았지?”
정시우는 히죽 웃으며 망치를 빙빙 휘둘렀다. 예리하게 빛나는 그의 눈과, 육체가 지닌 능력에 비해 조심스러웠던 몸놀림이 대폭 달라진 것을 느끼며 천부장이 이를 악물었다.
[설마 내게서 배운 것이냐!? 이 짧은 시간에!?]
“그래서 말했지? 잘 피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고.”
정시우가 돌진했다. 천부장이 본능적으로 휘두르는 도끼의 궤적은 아까보다는 훨씬 읽어내기가 쉬웠다. 자신의 패시브 스킬을 만들어내기 위해 적의 패시브 스킬을 먼저 이해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가끔씩 나도 내 능력에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재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휘두르는 망치에 이전까지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힘과 속도가 담겼다는 것을 파악한 천부장은 그를 비웃을 수가 없었다.
[이제 고작 첫 발을 내디딘 전사가, 우쭐해하다니!]
“과연!”
천부장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망치를 피한 다음 순간. 망치는 허공에서 큰 원을 한 번 그리더니 더욱 매서운 기세로 놈을 따라붙어 기어이 도끼를 든 놈의 손목에 작렬했다.
[큭……!?]
패시브 스킬의 핵심은 바로 육체가 지닌 힘을, 새싹에 불과한 가능성까지도 오롯이 현실로 끌어내는 것이다. 특정한 행위에 대한 깊은 이해도, 숙련도, 마지막으로 행위와 마나의 일치가 패시브 스킬을 탄생시키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가뜩이나 초인력을 품고 있다가 마나까지 얻어 본질적으로 변화한 육신을 정시우는 아직까지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었지만, 기갑 오크 천부장과 전투를 벌이며 비로소 자신의 육체와, 무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다.
도끼나 망치나 무게에 의존하는 무기였기에 더욱 스스로에게 적용하기 쉬웠던 면도 있었다.
“아직 더 보여줄 게 남았어?”
정시우는 전투질주의 마나로 다리뿐만이 아니라 팔에 흐르는 마나, 무기에 흐르는 마나까지 가속해 움직이기 시작하며 기갑 오크 천부장에게 확인했다. 아마 강타를 병행하게 되면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위력을 내겠지.
이것은 무기를 다루는 패시브 스킬과는 별개로, 그가 전투 중에 스스로 터득한 액티브 스킬의 운용 방법이었다.
물론 순간 망설일 만큼 신체부담이 우려되는 기술이지만, 정시우는 기존의 그에게 있던 리미터를 해제하는 데에 성공한 상태였다. 이 정도로는 다치지 않는다. 그의 강화된 육신은 제아무리 무리한 움직임이라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 모든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이 모두가 자신을 강화시켜주고 있다는 것이 못 견디도록 즐거웠다.
“없으면 이제 끝내자.”
[내가 쌓은 세월의 무게를 우습게 보지 마라!]
자신이 젊고 재능에 충만한 전사의 성장에 그저 밟고 지나가는 발판 신세로 전락했다는 것을 자각한 순간, 기어이 기갑 오크 천부장이 분노로 폭주했다. 정시우는 그것을 보며 고소를 머금었다.
전투의 승자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