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29화.
보통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을 보면, 무수한 적과 전투를 벌이는 주인공이 처음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로 보이는 난관들을 우여곡절 끝에 통과하고, 그 과정에서 강해지면서 끝내 과업을 완수하고는 한다.
[클리어 제한 시간 ? 16:39:11]
“그런데 이건 경험치가 던전을 클리어한 다음에야 정산되잖아? 아마 난 안 될 거야.”
“여기까지 잘 와놓고 이제 와서 약한 소리 하기는. 저놈들만 넘어서면 이제 보스 룸이 코앞이거든요?”
수아린은 어이가 없어 반박했다. 그녀가 보기에 정시우는 충분히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이 맞았다.
처음엔 기갑 오크 한 마리와 일대일로 싸워 순수한 힘만으로는 약간 밀릴 정도였는데, 불과 이틀이 조금 넘게 지난 지금은 엘리트 기갑 오크 백부장 셋이 덤벼도 여유롭게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구아아아아아아!]
[놈을 죽여, 우리 부대를 전멸시킨 악마 놈!]
[누가 인간 중에 저런 전사를 키워낸 것이지!]
네놈들이다, 네놈들! 수아린은 속으로만 그렇게 외쳤다. 레벨은 전혀 오르지 않고 있음에도 정시우가 다루는 망치의 위력이 이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는데, 수아린은 그 까닭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한 놈 끝!”
[시모오오오오오오온!]
“이 자식들은 이름을 다 시몬으로 짓나 본데.”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회전을 일으키던 슬레지 해머가 어느 순간 일정한 리듬을 타고 가속하더니,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번개처럼 허공을 찢어버리며 쇄도하여 엘리트 오크 한 마리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렸다.
마나가 깃들어 있지 않음에도 마나의 영향을 받은 것만 같은 움직임, 바로 정시우가 마나로 강화된 육신을 완벽히 파악하고 적응하여 전투에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처음 정시우와 싸웠던 오크가 마나와 전투기술을 한데 녹여야 한다는 말을 했었는데, 정시우는 강한 오크들과 내내 치고 박고 싸우며 기어이 자신만의 새로운 전투기술을 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그 오크도 정시우가 이틀 만에 전투기술에 적응할 줄은 몰랐겠지. 놈은 정시우의 괴물 같은 힘에 놀라 그 안의 재능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네놈을 죽여 시몬의 원수를 갚겠다!]
[감히 우리의 전우를 그렇게 무참히 죽이다니!]
“죽으면 죽는 거지, 무참과 영광이 따로 있냐.”
물론 그렇게 말하고 있는 주제에 본인은 죽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시우는 망치를 다루는 감각에 서서히 적응이 되는 것을 느끼며 다시 그것을 굳세게 쥐었다.
아주 조금, 조금만 더 싸우다 보면 마나로 변화된 육신에 걸맞은 전투기술…… 패시브 스킬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딱 한 걸음이 부족했다. 사실 이미 기갑 오크 백부장들의 패턴은 질리도록 파악한 탓에 놈들과의 전투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 번에 셋을 상대해도 마찬가지이니, 이제 남는 것은…….
“천부장뿐인가.”
[네놈이 천부장님을 뵐 수 있을 것 같으냐!]
“두 마리 끝.”
[크하아아아아아악!]
기갑 오크는 순수하게 전투를 즐기며 본인의 기량 또한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지만 흥분하기 지나치게 쉽다는 단점 또한 있었다.
천부장이라는 말 한 마디에 흥분하여 덤벼드니, 다른 플레이어들이라면 몰라도 적의 틈을 노릴 줄 아는 정시우가 크리티컬 히트를 적중시키지 못할 까닭이 없었다.
“너 혼자 남았네. 곧 친구들 곁으로 보내줄 테니 안심해.”
[이, 이 자식이…….]
놈은 대가리가 깨져 침묵한 두 동료의 시체를 번갈아 살피며 이를 악물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언덕의 형태를 띤 통로 너머의 보스 룸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놀랍게도 도끼를 정시우에게 내던지고 냅다 질주하기 시작했다! 설마 이제 와서 분노 조절을 잘하다니!
[나 대신 천부장께서 네놈을 처단하리라!]
“앗, 보스 룸 강제개방! 막아야 해요!”
“하나 마나 한 설명 고마워!”
정시우는 도끼를 쉽게 피해내곤 있는 힘껏 스핀을 걸어 망치를 던졌다. 본능적으로 스며들어간 마나가 망치를 더욱 빠르게 회전시켜, 누구보다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언덕을 넘던 오크 백부장의 뒤통수에 정확히 명중했다. 수박 깨지는 소리가 나며 놈의 헬멧이 바스러졌다.
[크학!]
“나이스 샷! 이어지는 정시우 선수의 바디 태클!”
헬멧이 완전히 쪼개지고 뇌진탕이 와 몸을 비틀거리면서도 어떻게든 도망치던 백부장의 등짝에 잽싸게 뒤를 쫓은 정시우의 전신 강타가 적중했다.
“흡!”
[칵!]
전투질주와 절묘한 마나 분배의 강타 스킬, 거기에 본래 신체를 단단하게 만들 뿐인 방어 스킬 스톤 스킨까지 조화를 이루어 전차의 돌격과도 같은 터무니없는 힘을 낳는다!
이틀 동안 던전에서 전투를 반복하며, 얼마 없는 액티브 스킬들을 어떻게든 활용하느라 애쓴 덕에 만들어낸 스킬 조합이었다. 물론 실전에서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후, 죽었나.”
“죽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산산조각이 났잖아요! 방금 그거 대체 뭐예요!?”
정시우도 알 수 없었다. 처음엔 전투질주와 전신강타를 자연스럽게 잇는 것만도 힘들었는데 거기에 스톤 스킨까지 더하려니 영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놈을 끝장내야겠다는 생각에 세 가지 스킬을 한데 섞었더니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한 장면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본능적으로 세 가지 스킬을 한데 섞어…… 에휴, 말을 말자.”
“음……? 어라?”
그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것이 비단 정시우뿐만은 아니었는지, 순간적으로 그의 몸이 뜨거워지며 몸에 근질거리는 무언가가 새겨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왔다. 직후 그의 눈앞으로 일련의 문자열이 떠올랐다.
[액티브 스킬 크루얼 차지(Cruel Charge)를 습득했습니다.]
[크루얼 차지 Lv1]
[합성 스킬. 일정 방향으로 폭주하는 마나를 목적에 맞게 변화시키며 신체 호흡 또한 일치시켜, 터무니없는 돌파력을 이끌어낸다. 모든 스테이터스에 영향을 받는다.]
“내가 만든 두 번째 액티브 스킬인가.”
“오빠는 언제나 제 예상보다 앞서가네요. 액티브 스킬, 그것도 합성 스킬을 만들어 내다니…….”
크루얼 차지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그야 정시우가 자신만의 스킬을 조합해 만들어낸 것이니 당연하기는 했지만…….
“앞 글자를 따서 C2라고 부르자.”
“어떤 의미론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지만 역시 그 애칭은 그만둬요.”
수아린은 방금 그의 일격이 만들어낸 참상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마나 얼마 안 남았죠?”
“응. 확실히 강력한 스킬이지만 스킬을 세 가지나 한꺼번에 다루느라 마나 소모가 엄청났거든. 완성된 스킬로 만들어졌으니 이제부턴 마나 소모가 좀 줄어들겠지만.”
“보스와 싸우기 전에 휴식하고 가요. 이곳부터 보스 룸까지는 정말로 몬스터 하나 없으니까.”
이젠 수아린도 보스는 무리라느니, 한 번 나가서 재정비하고 오자느니 하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기호지세라, 정시우가 한창 발전하고 있을 때 보스까지 깨부수는 쪽이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 함정만 부숴놓고.”
원래 던전에는 몬스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틈만 나면 플레이어의 목숨을 노리는 함정으로 득시글하다.
그러나 정시우는 테스트 던전에서 처음 함정과 조우한 이래, 던전을 진행하며 수상한 것이 보이면 일단 망치로 내리치는 방법을 채용하여 성공적으로 함정을 전부 부수어왔다.
여태까지 그의 감이 빗나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도 어떻게 그렇게 다 파악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곳저곳 내리치거나 바위를 던지거나 해서 함정을 깔끔하게 파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시우가 보스 룸 근처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함정을 깔끔하게 부순 그 순간, 허공에서 펑, 만화처럼 어설픈 뭉게구름이 피어났다. 그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손님. 던전 보스와 싸우기 전에 시원한 음료수 한 잔 어떠세요?”
정시우는 본능적으로 망치를 움켜쥐었으나 그 정체를 대충이나마 파악하고는 손에 아주 조금 힘을 풀었다. 그리고 최대한 얼간이처럼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물었다.
“요정?”
“빙고! 손님이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날아가는 요정상인 루타입니다!”
그 녀석은 작았다. 수아린만큼이나 작았다. 일단 성별은 여성이었고, 등 뒤로는 호랑나비의 그것을 닮은 화려한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반짝이는, 인공미가 감도는 은색의 머리칼과 검은자와 흰자가 같은 눈 안에서 무한히 반복되는 것만 같은 기이한 눈동자가 특징적인 그 녀석은 아무리 봐도 수아린이나 용세하처럼 한 번 리타이어한 플레이어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원래 그렇게 타고난 몬스터냐?”
“몬스터라고 부르셔도, 리타이어한 플레이어라 착각하셔도, 하늘성이나 개미굴의 관계자라는 합리적인 결론을 내놓으셔도 좋아요. 저는 그저 상인, 정당한 대가를 받고 손님께 훌륭한 물품을 제공하는 상인일 뿐이랍니다.”
정시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이상을 감지한 직후 잽싸게 깃털 날개를 펄럭여 정시우 곁으로 날아온 수아린이 기이한 생김새의 요정을 노려보며 정시우에게 가까이 붙었다.
“하늘성에는 이런 게 없었어요. 물론 개미굴에선 하늘성에서 일어나지 않는 일들만 일어나지만, 그래도…… 몬스터도, 플레이어도 아닌 엔, ‘지성을 지닌 제3자’의 등장은 너무나도 수상해요.”
정시우는 수아린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NPC(Non Player Character)라고 말하려던 것이겠지. RPG게임에 흔히 나타나는, 플레이어가 아닌 인공지능으로서 플레이어들의 게임 진행을 돕는 캐릭터. 이 녀석과 이미지가 너무 잘 맞아떨어져 그만 실소가 나왔다.
“저도 제가 수상한 거 알아요. 그러니 진정하세요. 이미 손님은 알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저는 손님을 위협할 마음도 적대할 생각도 없답니다!”
그러니 제일 위험하지, 라는 말을 정시우는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언제든 망치를 휘두를 준비를 하며 정시우가 녀석에게 확인했다.
“루타라고 했던가. 상인이라면 물건을 팔고 싶다는 거지?”
“정확히는 물물교환이죠! 제가 원하는 것은 비드, 손님이 원하는 것은 포션과 귀환석, 장비, 기타 등등 던전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 합당한 대가가 치러진다면 저는 무엇이든 드려요!”
달러가 아니라 비드를 달라고 하니 오히려 신뢰도가 높아졌다. 부모님을 다단계로 끌어들인 사기꾼에서 친구를 다단계로 끌어들인 사기꾼 정도로.
“둘 다 마찬가지 같은데요!?”
“사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애가 별로 없거든.”
“그렇게 슬픈 비유였다니!”
요정상인 루타는 정시우의 말에 깔깔 웃으며 배를 잡았다. 그러다 돌연 웃음을 뚝 그치며 그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를 못 믿으시니, 이번에 한해서 특별히 상품 하나를 선물로 드리죠.”
“선물?”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음료수 컵이 나타났다. 그것이 허공을 스르르 미끄러져 정시우의 손에 쥐여졌다.
“인터페이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죠. 확인해보시겠어요?”
곧장 확인했다. 간단명료한 알림이 나타났다.
[원기회복의 포션]
[강력한 마법 시약을 희석하여 탄산음료에 섞는 것으로 마시기도 편하고, 몸에 부담도 덜 주게 된 포션. 체력과 스태미나를 회복시켜준다.]
정시우는 그것을 빤히 살피다가는 녀석을 지그시 보며 물었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냐?”
“단지 지금 손님께 휴식이 필요해보여서요!”
맞는 말이었다. 그 누가 봐도 지금의 정시우는 지쳐 보일 것이다. 그는 영 석연치 않았지만 일단 포션을 들이켰다.
“오빠!?”
“괜찮아. 인터페이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잖아.”
“그야 그렇지만…….”
[체력과 스태미나가 회복됩니다.]
과연 알림 그대로였다. 정시우의 목구멍으로 음료수가 넘어간 바로 그 순간, 이틀을 넘는 시간 동안 던전을 질주하며 제대로 된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특히 조금 전의 일전으로 소모되어 있었던 것이 거짓말이라는 듯 몸에 생기가 돌아왔다.
정시우는 바보처럼 눈만 꿈벅였다. 그에게 루타가 물어왔다.
“마나 포션, 구매하시겠어요? 지금이라면 첫 구매 특별 할인 행사로 기갑 오크의 비드 5개만 받고 판매하지요. 아마 포션으로 회복하고 보스를 잡는 쪽이, 마나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보스를 잡는 것보다 클리어 보상이 훨씬 더 클 거랍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혜택이지요?”
지금 그의 마나는 거의 바닥. 마나가 전부 회복될 때까지는 시간을 제법 필요로 하고, 그것은 던전의 클리어 랭크를 낮출 것이다. 루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영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네.”
“이런, 저는 손님이 마음에 드는데 말이죠.”
루타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일견 뿌듯해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수아린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지만 정시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좋아, 마나 포션 내놔.”
“기갑 오크의 비드 5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손님!”
정시우는 마나 포션을 들이켜 마나까지 오롯이 회복했다. 요정상인 루타는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없느냐고 물어왔지만 정시우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요정상인 루타를 잘 부탁드려요!”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네요.”
바람처럼 나타나 바람처럼 사라진 루타의 빈자리를 노려보며 수아린이 못내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앞에 놓인 길만 내달리기에도 바쁜데 별 이상한 녀석들이 태클을 걸다니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개미굴과 연관된, 말이 통하는 상대가 하나 나타났다는 얘기지. 하늘성의 비밀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지 몰라.”
하지만 그녀와는 반대로 정시우는 제법 기분이 괜찮아보였다. 낙관주의인 것인지 밝고 긍정적인 면이 과연 정시우다웠다.
“쉽게 가르쳐주지는 않을 텐데요.”
“글쎄, 그건 어떨까.”
그녀의 말은 옳았다. 그녀는 정시우에게 적의가 아닌 호의를 보였다. 적어도 그는 그것이 꾸며진 감정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뭐, 그런 것들은 지금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오크 천부장이야.”
“씁, 어쩔 수 없죠.”
휴식을 할 필요도 없게 되었으니, 더는 망설일 것이 없다.
정시우는 보스 룸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