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24화.
[??? 던전 : 위험도 낮음]
[??? 던전 : 위험도 없음]
[??? 던전 : 위험도 매우 낮음]
[??? 던전 : 위험도 없음]
시내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는 거리에 심심치 않게 던전을 가리키는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서울 시내에만 족히 스무 개는 있는 것 같았다. 전국 규모로 넓히면 수십 배는 될 것이고, 전 세계 규모로 넓히면 숫자를 세어 볼 엄두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 세상에는 플레이어 후보로 선택받는 이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었으며, 그 중 대다수의 플레이어 후보들이 능력이 없는 자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테스트 던전의 환경에 죽어 버리고 있었다.
기존의 플레이어들이 모두 기초교육을 받으라고 부르짖고 있음에도 꼭 말을 안 듣는 놈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용기와 자신감만 가득한 초짜들이 영웅심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새로이 바뀐 테스트 던전의 난이도가 너무 높았다.
“아아, 온 세상에 던전이 가득해!”
그 결과 정시우에게는 마음껏 골라 들어갈 수 있는 던전의 뷔페가 한 상 가득 차려지게 된 셈이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어디로 가야 할까?”
“제일 쉬운 곳으로 가죠!”
“전투 스킬 숙달도 해야 하니까 일단 딱 봐도 테스트 던전에서 실패한 것 같은 애들은 스킵해 두고…….”
“제일 쉬운 곳으로 가죠!”
“역시 난이도 보통 정도는 되는 곳으로 가야겠지?”
“제일 쉬운 곳으로 가자니까욧!”
정시우는 기갑 오크를 떠올리는 전투를 하게 해 줄 던전을 원했지만, 던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 던전에 어떤 몬스터가 나오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의 수준과 비슷한 난이도의 던전이라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급증하고 있는 던전의 대다수는 그의 수준에 한없이 못 미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젠장, 어쩔 수 없지…… 아린이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나.”
“오빠가 정말 미워요.”
수아린이 이를 득득 가는 가운데 결국 정시우는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
제아무리 난이도가 낮은 던전에서라도 스킬을 수련하는 것은 가능하고, 경험치를 쌓고 비드를 버는 것 또한 가능하다. 질로는 안 되니 일단 넘쳐 나는 양을 다 소화해 볼 작정이었다.
[개미굴 에이리어 #231 슬라임 하수처리장]
[클리어 제한 시간 ? 3:00:00]
어차피 쉬운 던전으로 들어갈 것, 정시우는 ‘위험도 없음’이라고 나타난 던전을 골라 입장했다. 테스트 던전에서 죽은 플레이어 후보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던전에 유령은 없었다.
대신 바닥을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기분 나쁜 진녹색의 점액 몬스터가 있었다.
“저 슬라임이 내가 아는 슬라임 맞냐?”
“맞아요. 저도 저레벨 때엔 많이 겪었죠.”
슬라임은 거의 모든 판타지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약한 몬스터로 유명하지만, 그 기원을 따져 거슬러 올라가면 물리공격력 면역에 강한 산성을 갖추고, 대량으로 나타나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재앙에 가까운 존재로 묘사되곤 했다.
“그런 거 없고 그냥 찌르거나 때리면 터지는 놈들이에요. 지금 오빠라면 밟는 것만으로 끝장을 낼 수 있을지도 모르죠.”
“오우케이.”
수련을 기대하진 않았지만 슬라임 던전의 난이도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다.
얼마나 굴곡이 없었는지, 그냥 정시우가 전투질주를 발동한 채(전투질주는 순간가속능력 또한 있었지만 마나 소모를 줄여 지속적으로 빨리게 달리는 지속발동 또한 가능했다.) 달리는 것만으로 그의 몸과 부딪힌 슬라임들이 마구 터져 나갔다.
달리기만 하면 던전이 진행되니 무슨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끼잉!]
[낑!]
[꾸오옹!]
사고 수준도 절망적인 슬라임들은 정시우가 스스로 익힌 액티브 스킬 워 크라이가 발동되기만 하면 그리 높지 않은 도발 수준에도 불구하고 우르르 몰려들어 스스로 터져 나갔다. 몇 번이나 그 과정을 반복했을까? 정시우는 어느덧 깨달음을 얻었다.
“적이 약하면 약한 대로 빛을 발하는 스킬이 있는 법이구나.”
설마 전투질주에 달리는 것만으로 적을 죽이는 기능이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워 크라이로 적을 끌어모으고 전투질주로 죽이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그런 기능 없어욧!”
단지 정시우의 육신이 지나치게 흉기일 뿐이라는 수아린의 말은 언제나와 같이 무시했다.
그는 앞으로 난이도가 약한 던전에서는 이 두 가지 스킬만 수련하기로 다짐하고, 자신의 마나가 허락하는 한두 가지 스킬을 꾸준히 사용하며 던전을 질주했다.
“어, 보스 룸 보인다.”
“헥헥…….”
그 결과 그는 불과 20분도 안 되어 던전 안의 모든 슬라임을 터트릴 수 있었다.
한편 수아린은 자신의 본분인 서포터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달러와 비드를 수급하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이건 서포터가 아니라 그냥 잡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좋아, 그대로 클리어 가자!”
“같이 가요오오!”
그런 수아린의 고뇌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시우는 전투질주를 멈추지 않고 돌진하여 보스 룸까지 열어 버렸다.
거대한 보스 룸 중앙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슬라임! 아무래도 그놈만은 몸통박치기만으로 죽일 수가 없을 것 같았던 정시우는 달리면서 망치를 꺼내어 쥐었다. 전투질주에 이은 강타, 두 스킬의 연계를 연습해 볼 작정이었다.
그때쯤 수아린도 보스 룸에 들어왔다.
“오, 오빠! 2초, 2초 지났어요! 빅 슬라임은 마나로 자신의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특수능력이…….”
그러나 이미 정시우를 멈추기엔 늦었다.
정시우는 그대로 돌진하며 망치를 들어, 보스 룸 입장 2초가 지나 완벽히 정시우를 인식하고 전신에서 기묘한 빛을 발하는 빅 슬라임의 몸통에 망치를 메다꽂았다!
[꾸아아아아아아아아!]
빅 슬라임의 몸통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볼 것도 없는 즉사였다.
“쩝, 실패했다. 역시 이미 한 가지 형태로 고정된 마나를 다른 스킬로 다시 전환하는 건 너무 힘들어…… 그래서.”
조금 전의 일격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던 정시우가 수아린을 돌아보며 물었다.
“얘 특수능력이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레벨 던전의 공략 지침을 말해 무엇할 것인가. 수아린은 자신부터 관점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이건 던전이 아니다, 그냥 지나가는 통로다!
[던전 클리어]
[소요 시간 0:17:05]
[슬라임 341, 빅 슬라임 1 처치]
[특수 업적 ‘스피드 러너’ 달성]
[민첩 5가 올랐습니다.]
특수 업적을 달성했다. 아무래도 던전을 지나치게 빠른 시간에 클리어하면 얻게 되는 업적인 모양이었는데, 레벨이 1 오를 때 2밖에 상승하지 않는 민첩이 무려 5나 상승했다.
특수 업적으로 스킬이나 다른 혜택만 얻는 줄 알았던 정시우에게는 굉장히 기쁜 소식이었다. 민첩이 5 오르자마자 전신의 근육이 꿈틀거리며 변화하는 것이 느껴져 그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지금 표정 되게 변태 같아요, 시우 오빠.”
“강해진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 음?”
클리어 랭크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그때, 그의 눈앞에 방금 나타난 것과 비슷한 문자열이 떠올랐다.
[특수 업적의 힌트를 얻었습니다.]
[비폭력운동가가 되실 뻔했는데 아쉽군요.]
설마 특수 업적을 동시에 두 개나 달성한 것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대신 정시우에게 힌트가 하나 주어졌는데, 원숭이가 아니라면 누구든 깨달을 수 있는 정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 정답은 굉장히 까다로운 길을 그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거 장난 아니겠는데…….”
“뭐가요, 오빠?”
“아, 아냐.”
모든 던전에 보스가 존재하는 이상, 하루 이틀 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업적은 아니다.
아니, 그보다 이거 말하는 폼이 왜 이렇게 정겨워? 그리고 내용이 심히 악랄하다는 점에서 강력한 시너지를 발하고 있었다. 메시지에도 낯짝이 있다면 한 번 보고 싶을 정도였다.
[클리어 랭크 ? EX]
[추가 보상, 빅 슬라임의 정수 파편 획득]
[빅 슬라임의 정수 파편]
[빅 슬라임의 힘을 품고 있는 정수의 일부. 이대로 복용해도 효과를 볼 수 있지만, 정수를 완전히 모아 섭취하면 빅 슬라임의 기록을 오롯이 이어받는 것이 가능해진다.]
[경험치 정산 완료.]
역시 위험도가 아예 없는 던전다운 심플한 결말.
레벨이 하나도 오르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기껏 클리어 랭크가 EX인데도 보상에 결함이 있다는 점이 실로 허탈했다. 그러나 수아린은 정시우의 손에 들린 정수 파편을 보며 환성을 질렀다.
“설마 정수가 나올 줄이야. EX랭크 정도 되면 이런 것도 나오는군요!”
“그래 봤자 파편이잖아.”
“몬스터의 기록과 마나를 온전히 담고 있는 정수는, 그것도 보스 몬스터의 정수는 제아무리 하급 던전이라고는 해도 쉽게 볼 수 없는 거라구요. 오히려 그걸 던전 한 번 클리어한 걸로 집어삼키려 하면 도둑놈이죠. 그리고 오빠, 지금 서울 시내에만 슬라임 던전이 몇 군데가 더 있을 것 같아요?”
정시우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너 천재해라.”
“에헴. 그러니 잘 모아 두시라는 말이에요. 파편만 덥석 집어삼키지 마시고요.”
“그래그래.”
정시우는 어째선지 어깨를 쭉 펴며 잘난 척을 하는 수아린과 함께 던전을 나섰다.
당연하지만 이 정도 던전에서 나오는 비드를 제단에 바쳐 봤자 얻을 수 있는 보상의 정도도 뻔할 뻔자, 그는 비드 모두를 휴식처에 저금했다. 제아무리 저레벨 던전이라지만 쌓다 보면 태산이 되어 주리라!
[??? 던전 : 위험도 매우 낮음]
“어, 던전 들어갔다 나오는 20분 사이 또 근처에 던전이 하나 생겼네요…….”
“혹시 이 일련의 사태는 이런 식으로 인구를 줄여 환경오염을 막으려는 지구의 빅 픽쳐가 아니었을까?”
“장르 바뀌잖아요, 무서워요…….”
테스트 던전에서 비롯된 개미굴 던전이 많다는 것은 굉장히 비극적인 일이지만 정시우에겐 그것을 애도할 마음이 없었다.
스스로 특별해지길 원해 도전했다면 그 위험성과 대가 또한 충분히 감수하고 있었을 테고,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면 더더욱 어리석은 놈이니 애도할 가치도 없다.
결론만 말하자면 빅 슬라임의 정수를 모을 수 있는 던전이 많아 행복했다.
정시우와 수아린은 깊게 고심한 끝에 우선 빅 슬라임의 정수를 모아 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위험도가 아예 없는 곳만 들어가면 슬라임 던전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 바이크를 타고 5분 정도 달려 도착한 PC방 뒷골목을 열심히 파 던전에 입장했다.
[개미굴 에이리어 #237 쥐의 낙원]
[클리어 제한시간 : 4:00:00]
“꼭 이렇게 달아올라 있을 때 다른 던전으로 초를 치네.”
“쥐, 쥐…….”
정시우는 입맛을 쩝, 다셨지만 수아린의 표정은 창백해져 있었다. 고개를 갸웃하는 정시우에게 수아린이 말했다.
“초보자에겐 가장 들어가기 싫은 던전이 바로 쥐 던전이에요. 저도 이것만은 반드시 피했었어요.”
“쥐가 뭐가 무서워서?”
“바로 그게 문제예요.”
수아린이 우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른 몬스터는 그래도 몬스터 같아요. 맹수나, 하다못해 개가 나타나도 충분히 위협적이란 인식이 가능하죠. 하지만 이 쥐 던전에 나오는 쥐는 겉으로만 봐선 말 그대로 작은 쥐처럼 보이거든요. 그러니 그 던전에 들어간 플레이어는, 아무리 경계를 하라는 말을 들어도 방심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이 던전은 물량으로 승부하는 던전이거든요. 마음이 조금만 느슨해져 있으면 곧 어마어마한 쥐떼에 포위당하게 돼요. 위기감을 가져도 이미 늦었죠. 수천, 수만 규모로 몰려드는 쥐가 무기를, 방어구를 갉아먹고 곧 플레이어의 전신까지…….”
던전에서 맞이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죽음의 한 가지 형태라고, 소름 끼쳐 하며 말하는 수아린. 그 말을 듣고 정시우는 무심하게 반문했다.
“그럼 보스는?”
“보스 룸은 더 끔찍해요. 평범한 쥐보다 훨씬 커다란 쥐들이 수백 마리, 한꺼번에…….”
“한 마리 한 마리의 레벨은 다른 던전의 보스에 비해 훨씬 낮겠네?”
“그렇긴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요!”
“아냐.”
수아린에게 반박하는 정시우의 얼굴에 실로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지금 나한테는 그게 제일 중요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