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2화.
[퀘스트 조건 ? 지네병정소굴의 지네를 대상으로 오버킬 453+3/150]
[퀘스트를 300% 초과달성했습니다.]
신나게 날뛰고 있을 동안에는 몰랐는데, 퀘스트 내역을 확인해 보니 그곳에는 실로 터무니없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150마리의 세 배를 넘는 453마리라는 수, 더욱이 +3이라는 별개 취급까지. 이건 아마 나중에 나타났던 거대 지네를 이르는 것으로 보였다.
정시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수아린에게 물었다.
“퀘스트를 초과달성했다는데 이거 좋은 거야?”
“당연하죠. 퀘스트에 따라 다르지만 보상이 좋아지는 건 당연해요. 하늘성의 법칙에 따라 수호되는 절대규율이죠.”
하지만 퀘스트를 주었던 플레이어를 믿을 수 없는 지금은 어떨까? 수아린은 정시우의 품에서 가만히 원혼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이미 놈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그런 놈이 순순히 보상을 내놓을까?
퀘스트를 건 이상 보상을 주지 않을 수 없겠지만, 이미 놈은 죽어 원혼이 된 상황. 혼의 소멸까지 감수하고 개수작을 부려 온다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수아린이 정시우에게 주의를 주려던 그 순간, 원혼이 그들에게서 한 발짝 물러서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전면 항복처럼 보이는 자세였다.
“당신은 오빠가 죽길 바랐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보상을 순순히 내놓겠다고?”
[분명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나만 고통을 받는 것은, 나만 죽는 것은 싫었기 때문에. 아마 원한에 사로잡혀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못했던 것이겠죠.]
원혼은 괜히 원혼이 아니다. 순수한 혼이 더러운 마력과 상태이상 너머의 영역으로까지 발전한 강력한 감정에 지배당해 탄생하는 것. 엄연한 마물의 분류였다.
[그러나 모든 지네가 완벽하게 분쇄되고 전멸하는 것을 보며 원한이 수그러든 모양입니다. 비로소 저는 제 정신을 찾은 것이죠. 당신이 퀘스트를 완벽, 그 이상으로 수행해 주신 덕분입니다.]
완전히 딴사람이 된 듯한 원혼을 보며 수아린은 얼떨떨해지고 말았다. 실제로 붉은 빛을 발했던 놈의 눈동자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어 무척 차분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전과가 있는 놈을 믿을 수 있을까? 수아린이 갈등하던 그때 정시우가 코웃음 치며 말했다.
“처음부터 신경 안 썼어. 네가 덤볐으면 널 죽여 버리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저에게도 당신과 같은 동료가 있었다면…… 아니, 이미 다 지난 일이지요. 그러면 보상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정시우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퀘스트 초과달성 가능성이 남아 있잖아.”
[네……?]
원혼, 아니 이젠 원혼에서 벗어난 플레이어의 영혼은 정시우의 말에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반면 수아린은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말았다.
“시우 오빠, 설마…… 보스를 오버킬로 잡겠다고요!?”
“역시 똑똑하다니까.”
“…….”
[…….]
수아린과 영혼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사이좋게 침묵했다. 그러는 사이 정시우는 주위에 널려 있는 몬스터 비드와 달러를 주워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가 워낙 난동을 피우다 보니 시체로 널브러져 있었던 놈들까지 바위 파편에 맞거나 동료의 시체에 얻어맞거나 하며 자동으로 루팅이 되어 버린 경우가 많았다.
다시 생각해 봐도 체력 배분 따윈 개나 줘 버린 난동이었지만, 정시우는 이쪽이 더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힘은 아직까지도 남아돌았다. 오히려 전투를 하면 할수록 육신이 뜨거워지며, 여태껏 살아오며 단 한 번도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던 근육이, 주인의 혹사에 기뻐하며 점점 더 강하게 힘을 짜내는 느낌이었다.
“정말 변태 같은 근육이네요.”
“시끄러.”
[정말 보스를 오버킬로 잡는다면…… 설마 정말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하지만 정시우가 여태 벌인 짓을 보면 얼마든지 가능해 보여서 문제다. 유령은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다가는 문득 떠올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 던전은 저의 죽을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개미굴의 시스템이 재구성하여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렇다면 아마 보스로 나타날 지네는 다른 패턴의 공격을 해 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패턴?”
[독무. 저를 죽였던 그놈은 위험을 느끼는 순간 입에서 독무를 뿜어냈습니다. 마찬가지로 꼬리 끝부분에서도 마치 레이저를 쏘아 내듯 독을 뿌렸죠.]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시우가 움찔했다.
그는 여태 적의 독니에 당할 틈도 없이 압도적으로 놈들을 밀어붙여, 결국 단 한 번도 독에 당하지 않고 지네들을 죽였다. 그런데 독무라고? 만약 이 정보 없이 보스 룸에 들어갔으면 죽지는 않더라도 확실히 봉변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격을 하기 전 특유의 동작이 있습니다. 당신이라면 충분히 파악하고 대비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제가 기억하던 것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잘 말해 줬다. 고마워.”
[별말씀을. 저도 이젠 당신이 끝까지 놈들을 압살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거든요.]
역시 이곳, 개미굴은 재미있다고 정시우는 생각했다.
만약 유령이 수상하다고 판단한 시점에서 놈을 망치로 짓이겼다면 한꺼번에 많은 지네와 맞서는 일이야 없었겠지만, 그와 함께 보스 룸에 대한 정보를 얻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 놈이 이렇듯 제정신을 찾아 퀘스트의 보상을 주겠다고 나서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정말로 게임이라도 하는 것 같네.”
“위험한 발상이지만, 확실히 던전과 하늘성은 둘 다 게임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죠. 그곳에 입장한 사람들만이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 물론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 하지만요.”
하늘성과 던전을 게임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그만큼 자신의 목숨에 무감각해지고, 자연히 죽기도 쉽다. 수아린은 언제나 그것을 가장 경계해 왔다.
그랬던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일찍 죽게 된 것이 또 아이러니할 따름이지만.
“즐기는 마음가짐은 중요해. 하지만 즐기는 것과 우습게 보는 건 다르지. 게임이니까 죽어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가짐을 지닌 놈은 후딱 죽어 버리라지. 게임을 시작했으면 안 죽고 끝판까지 클리어를 목표로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
“전 점점 더 오빠를 모르겠어요.”
수아린의 투덜거림에 픽 웃는 것으로 대꾸한 정시우는 마지막으로 던전에 들어오고부터 흐른 시간을 확인했다. 제한시간인 다섯 시간 중 벌써 2시간 34분이 흘러 있었다.
“좋아, 가능하면 3시간이 지나기 전에 끝내고 싶군.”
“이만한 던전을 혼자서 3시간 클리어…… 아니, 됐어요. 이제 됐다구요.”
[보스 룸의 위치는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시고 자시고.”
정시우가 손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것저것 다 무너지고 부서지고 난리가 난 가운데, 통로 저 너머 유독 거대한 철문이 버티고 서 있는 방만이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저기밖에 안 남았어.”
“설마 던전을 전부 다 부숴 버리는 방식으로 보스 룸을 찾을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의도치 않았던 일석이조를 달성한 정시우가 빠르게 공간을 내달렸다. 두 손에 있는 힘껏 망치를 쥐고, 언제든 마나를 불어넣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그의 눈앞을 가로막는 바위 덩어리들은 그저 가벼운 발길질 한 번에 모두 박살이 났다. 지금의 정시우라면 탱크가 와도 막지 못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곧 보스 룸을 가로막는 철문이 나타났다.
“오빠, 진입하기 전에 일단 정비를…… 아이 진짜!”
“하!”
정시우는 수아린의 말을 무시하고 철문을 호쾌하게 걷어차 버렸다! 바로 그 순간 거대한 보스 룸의 전경이 정시우의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공동의 중심부에 도사리고 있는, 터무니없이 두껍고 거대한 몸통을 지닌 지네의 모습까지도.
그와 마찬가지로 적의 모습을 확인한 유령이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저, 저, 저놈! 10단계 던전에서 나를 거꾸러트린 그 보스 놈!]
“10단계였어요!?”
10단계 던전을 통과한 플레이어들은 클래스를 얻게 된다.
당연하지만 10단계 던전은 관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 등장하는 몬스터의 수준이나 함정을 비롯한 모든 것이 이전까지의 던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월등하다. 특히나 보스는 까딱하다간 15단계 던전에 등장하는 몬스터들보다도 강력한 경우도 있다.
그런 이유로 10단계 던전은 반드시 대규모의 파티로 도전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런데 그런 놈이 정시우 혼자 클리어해야 하는 던전의 보스로 나타나다니!
“흐아아아압!”
하지만 정시우는 그런 것 따윈 알 바 아니라는 듯, 기세를 모아 그대로 돌진하며 슬레지 해머에 마나를 부여했다. 보스 룸이 열리고 3초간, 보스가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해 선제공격을 가하려는 것!
“뒈져!”
눈 깜짝할 사이 놈에게 도달한 정시우는 양손으로 쥐고 있던 해머를 있는 힘껏 내려쳤다. 동시에 해머에 부여한 마나를, 망치의 운동 방향과 맞추어 폭주시킨다! 지금 던전 공략의 최전선에 서 있는 자들도 감탄할 만큼 완벽한 강타였다.
[꾸에에에에에에에에!]
거대 지네가 끔찍한 비명을 토해 내며 온몸을 뒤틀었다. 몸길이만 20미터를 넘기는 거대한 괴물의 난동에 공동이 흔들리고, 고막이 먹먹해지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정시우는 그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중심을 잃지 않고 돌진했던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섰다. 한 번이긴 하지만 이미 거대한 몬스터와는 싸워 본 경험이 있는 것이다.
[크샤아아아아아아아!]
조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짙은 독무가 뿌려졌지만 그의 입가에는 확연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는 망치를 빙빙 휘둘러 다시 굳세게 잡으며 중얼거렸다.
“좋아, 일단 ‘하나’ 부쉈네.”
[맙소사…….]
유령이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시선은 선빵 한 번 맞은 것치곤 과하게 몸을 뒤트는 지네의 꼬리, 정확히는 꼬리였던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설마 한 방으로 무력화하다니.]
“역시 꼬리에 독샘이 있었나 봐. 망치 끝부분에 독이 진하게 묻었는데.”
“절대 만지지 말아요.”
놈의 꼬리는 흔적도 없이 뭉개져 있었다.
악명 높은 10단계 던전의 보스로나 등장한다는 거대지네의 꼬리가 정시우의 강타 한 방에! 하지만 정작 강타를 갈긴 정시우는 담담하게 독무를 피해 움직이며 조금 전의 일격을 되새겨 보고 있었다.
‘전력으로 갈겨 확실하게 부쉈다. 느낌만으로 판단하면 머리도 충분히 부술 수 있을 것 같았어.’
머리가 가장 중요한 급소인 만큼 설마 꼬리보다는 단단하겠지만, 그래도 부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만약 머리를 먼저 공격했다면 그대로 전투가 끝났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던전 보스를 원킬할 기회를 놓친 것은 아쉽지만, 정시우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까딱하면 오버킬 못할 뻔했네.”
“…….”
[…….]
자, 그러면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정시우는 지네들의 수준으로 미루어 보스와의 전투도 여유로울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했던 요소의 개입으로 일이 조금 어려워졌다.
문제는 놈이 뿜어내는 독무. 공동이 아무리 넓어도 놈이 지금 이 기세로 계속 독무를 뿜어 댄다면 독무는 금세 방을 채워 정시우를 행동불능에 빠트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일한 답은 속전속결인데…….
아무리 꼬리를 작살 냈다지만 놈의 머리를 가까스로 부수는 정도로는 오버킬이 달성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나를 불어넣어 강타의 위력을 강화할 정도의 실력도 아직은 없다.
[쿠갸아아아아아아아!]
정시우가 골몰하던 그때, 고통에 몸부림치던 지네가 드디어 제정신을 찾았는지 정시우를 향해 돌진해 왔다. 쩍 벌린 입에서 분사되는 독 안개가 실로 위협적이었다.
놈은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뭉개진 꼬리 부위를 허공에서 빙빙 휘두르다가 그를 향해 메다꽂았다!
두 종류의 공격이 자신을 향해 쇄도해 오는 것을 보며 정시우는 드디어 깨달았다.
“좋아, 저렇게 하면 되겠다.”
정시우의 행동 하나하나에 놀라지 않으려고 마음먹었던 수아린이, 자신과의 다짐을 무시하고 다시 소릴 지르고 말았다.
“저걸 보고 뭔가 깨달았단 말이에요!?”
정시우는 즉각 몸을 날려 꼬리와 독무를 피했다. 근육질의 덩치라는 점을 감안하면 깜짝 놀랄 만큼 민첩한 반응!
지네의 몸통 또한 그를 따라 곧장 돌아섰지만, 워낙에 몸통이 거대하여 방향을 전환하는 데만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한편 바닥에 착지한 정시우는 흡, 기합을 주어 다시금 망치에 마나를 부여했다. 그리고 지네가 완전히 그를 향해 돌아서기 전, 놈의 머리를 조준하고 냅다 그것을 던졌다!
“오빠!”
“하!”
동시에 바닥을 박차고 점프했다.
뒤로 있는 힘껏 당긴 그의 왼 주먹에 체내에 남은 모든 마나가 집중되고 있었다. 비로소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수아린이 기가 막혀 외쳤다.
“투척 강타와 동시에 맨손 강타……!?”
가뜩이나 평범한 강타에 비해 난이도가 높은 두 동작을 동시에 소화하겠다고!? 그것도 정확히 타이밍을 맞추어서?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대단했지만, 정말로 그걸 실행에 옮겨 버리는 대담함에 감탄이 나왔다.
[크샤아아아아아아아…… 아!?]
지네가 몸을 크게 휘두르며 꼬리를 쓸어 바닥 전체를 공격했다. 하지만 정시우는 그때 이미 놈의 주둥아리 근처로까지 점프한 상황!
그뿐인가? 그가 내던진 해머가 마력에 물들어 시퍼렇게 빛을 뿜으며 천장에 가까운 높이까지 솟구쳤다가, 정확히 놈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기까지 했다.
[샤아, 샤아아아아아아!]
그제야 양방향에서 공격이 들어온다는 것을 확인한 놈이 당황하며 재차 독무를 뿜어내려 했지만, 그 직전 있는 힘껏 내지른 정시우의 왼 주먹이 지네의 턱에 틀어박혔고,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완벽히 같은 타이밍에 망치가 놈의 머리통을 있는 힘껏 짓눌렀다.
[강타 스킬이 Lv7이 되었습니다.]
[무지는 용감 스킬이 Lv2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정시우는 주먹 끝부분에 아주 가볍게 와 닿는 망치의 기척을 느꼈다.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아마 자기 손으로 망치까지 깨부수었을지도 몰랐다.
“……후우.”
지네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공격을 성공시킨 정시우가 먼저 바닥에 착지하고, 뒤이어 확실하게 아작 난 대가리에 망치를 훈장처럼 꽂은 거대지네가 바닥에 털퍼덕 쓰러졌다.
직후 정시우의 눈앞으로 문자열이 떠올랐다.
[퀘스트 조건 ? 지네병정소굴의 지네를 대상으로 오버킬 453+3+1/150]
[퀘스트를 500% 초과달성했습니다.]
[개미굴 에이리어 #184 지네병정소굴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정산이 시작됩니다.]
정시우가 기어이 보스의 오버킬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