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11화.
지네병정소굴에 나타나는 지네들은 굉장히 은밀하고, 빠르며, 독을 뿜는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암살에 최적의 능력을 지닌 만큼 약점도 분명했는데, 그것은 바로 단단해 보이는 갑각을 지닌 주제에 방어력은 의외로 형편없었다는 것이다.
“흡!”
[키샤아아아아아!]
“흐으아!”
[쿠게겍!]
정시우는 동굴 곳곳에서 나타나는 지네들을 일일이 돌아보지도 않고 망치를 휘둘러 죽였다. 무거운 추가 달린 슬레지 해머는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없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한 마리, 한 마리씩 지네의 목숨을 끊어 냈다.
그럼에도 절반 이상은 오버킬이었다.
[퀘스트 조건 ? 지네병정소굴의 지네를 대상으로 오버킬 78/150]
[이, 이상하다?]
지네병정의 레벨이 족히 80을 넘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원혼은 정시우가 거침없이 나아가며 지네를 해치우는 것을 보며 얼이 빠지고 말았다.
이렇게 쉽게 해치울 리가 없는데, 오버킬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무하게 달성될 리가 없는데, 어째서 정시우에겐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호, 혹시 레벨이……?]
“10인데?”
[…….]
원혼은 너 같은 10레벨이 어디 있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정시우가 가볍게 휘두르는 슬레지 해머가 허공을 가를 때 내는 파공음을 듣고 있노라면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유령이고 자시고 한 대 맞았다간 골로 갈 것만 같은 기세이지 않은가!
한편 수아린은 파죽지세로 던전을 돌파하는 정시우를 바라보며 기쁨과 황당함과 허탈함이 섞인 깨달음을 얻었다.
“시우 오빠가 D++랭크의 무기를 얻은 것만으로 이미 충분히 강화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했어야 했는데…….”
그가 지네의 위치를 미리 알아내고 공격할 때만 해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가볍게 휘두른 망치로 지네를 단숨에 죽이고, 심지어는 오버킬까지 달성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시우는 놀란 수아린을 보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힘의 중심을 잘 잡고 작용점을 파악한다면, 굳이 죽을힘을 다해 휘두르지 않아도 쉽게 무기의 위력을 살릴 수 있어.”
그냥 맹수인가 했더니, 이 괴물은 처음 다루는 무기에서도 본능적으로 최대의 위력을 뽑아내는 천재였다!
던전에 입장할 때의 난이도 설정이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지네의 레벨과 능력의 특수성을 따져 생각한다면 [보통]이라는 난이도는 정시우의 초월적인 육체능력과 마나, 장비의 수준을 따져 보아도 얼추 맞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결국 겉으로 보이는 요소를 제외한 나머지, 예를 들어 말로 설명하기 힘든 정시우의 육감이나 타고난 배틀 센스, 무기와 육신을 다루는 그의 기량 탓에 던전이 이토록 수월히 클리어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실로 터무니없는 결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저나 내 마음에 안 드는 건…….”
[크갹!]
정시우는 망치를 휘둘러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린 지네를 깔끔하게 쳐 날렸다. 그것이 좌측 벽 틈에서 기어 나오던 지네에게 명중해 그 녀석까지 한꺼번에 짓이겼다.
[굉장합니다, 한 번에 두 마…….]
“아직!”
정시우는 찬양을 하며 정신 사납게 하는 원혼을 무시하고 돌아서서 냅다 슬레지 해머를 내던졌다.
콰앙!
방에 장식처럼 놓여 있던 바위 아래에서 동시에 튀어나온 두 마리의 지네가, 정시우를 급습하려다가 망치에 얻어맞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넷 중 세 마리는 오버킬로 처리됐다.
“이대론 마나를 시험해 볼 기회가 없다는 게 문제네.”
그야 평범한 일격으로도 오버킬, 운 좋으면 루팅까지 끝내 버리니 마나를 써 볼 틈이 있을 리가! 수아린도 덩달아 허탈해졌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던 걸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미지의 장소에 들어오는 건데 철저히 준비를 하고 오는 건 당연한 거야. 잘못한 건 네가 아냐. 이 던전이지.”
정시우의 가차 없는 책임전가에 수아린은 그저 픽 웃고 말았다. 원혼이 다급히 말했다.
[그, 그렇다면 조금 더 소란스럽게 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지네들한테 나 여기 있다고 광고하라고?”
[질 대신 양이라고, 많은 숫자의 지네를 상대로 한다면 마나를 시험해 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너무 위험해요.”
수아린이 일축했다. 그녀는 원혼을 맹렬히 쏘아보고 있었다.
“퀘스트, 포기해도 될 것 같아요 오빠. 아까부터 자꾸 오빠를 방해하려고 하질 않나, 던전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광역 도발을 행하라질 않나…… 저 원혼은 명백히 오빠를 해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 같아요. 원한이 지네가 아니라 오빠를 향한 것 같다구요.”
[아닙니다, 터무니없는 오해예요. 저는 정말로, 그저, 지네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수아린은 뻔뻔하게 반박하는 원혼을 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아마 그녀에게 공격 스펠을 쓸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대로 놈을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시우는 수아린의 말을 무시하곤 원혼을 향해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안심해라, 난 널 한순간도 의심한 적이 없으니까.”
“오빠!”
[믿어 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진실하게 퀘스트가 완수되길 원합니다!]
그렇다.
정시우는 단 한순간도 이놈이 아군일 것이라 의심했던 순간이 없었다. 놈은 그냥 수틀리면 잡아야 할 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생전에 플레이어였다고 해서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세상엔 몬스터만도 못한 인간도 넘쳐 나는 것을. 단지 놈에게서 얻어 낼 것이 있고 지금은 놈이 전혀 위협이 되지 않기에 일단 가만히 놔두고 있을 뿐이었다.
소란을 피워 몬스터를 부르라고? 지금 지네들 정도라면 우습지도 않다. 설혹 이 녀석들보다 더 강한 놈들이 나와도 마찬가지.
원혼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알 필요도 없었다. 놈의 뜻대로 돌아가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을 테니까.
“좋아, 해 보자고. 꽉 붙잡아.”
“으으으, 정말 고집불통이야.”
수아린은 입술을 삐죽였지만 정시우를 더는 말리지 못했다. 그녀 또한 내심으로는 이 던전에서 정시우를 해할 수 있는 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 흐아아아아아아아아!”
정시우가 내지른 고함소리가 던전을 뒤흔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미친 듯이 망치를 휘둘러 사방을 가격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충격에 던전 벽이 무너져 반대쪽 통로를 열고, 충격파를 이기지 못해 다시 그 너머의 벽까지 무너졌다. 정시우는 각 방에서 꿈틀거리는 지네들을 무시하고 내달려 그 반대쪽 벽을 들이받아 무너트렸다.
[무, 무, 무슨…….]
“던전 벽이 무너질 수도 있는 거였어!?”
원혼이 그대로 얼어붙었고 수아린마저 기겁을 했다.
“우우오오오오오아아!”
그럼에도 정시우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벽과 복도가 진동을 하며 무너져 내린다!
무진장 날뛰는 와중에도 마나는 오직 몬스터에게만 쓰겠다고 아끼고 있었으니, 지금 정시우는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 던전을 무너트리고 있는 셈이었다.
“지, 지네들 기어 온다!”
[숨어 있을 곳이 사라진 것뿐이잖아! 요!]
망치는 쉬지 않고 휘둘러져 사방의 벽을 무너트렸다. 그가 내지르는 고함은 벽이 무너지는 소리에도 지지 않고 던전 전체로 울려 퍼졌다. 고함을 지르거나 망치로 진동을 내는 정도로 생각했던 원혼은 놈의 상상을 벗어난 스케일에 기가 막혔다.
[어떻게 이런 힘을, 아니 그보다도 잘도 이런 겁 없는……!]
“오빠, 지네들 와요! 지네들!”
지네들 중 멀쩡한 놈들은 거의 없었다. 정시우가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벽이 무너지는데, 망치의 충격량을 전달받은 벽의 파편에 얻어맞았으니 다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직 이 정도로는 부족해!”
[캬아아아아아아!]
정시우는 독기가 바짝 올라 덤벼드는 지네들을 망치로 가볍게 쳐 냈다. 앞뒤좌우를 가리지 않고 날아드는 놈들을 두더지 잡기 게임이라도 하듯이, 자신에게 가까운 순서부터 차례대로 두들기는 정시우!
“하!”
[키이이이이이이!]
[키긱, 키기기기기기!]
사람의 머리통보다도 큰 슬레지 해머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그 궤도상에 있던 모든 지네의 몸통이 처참하게 터져 나갔다.
망치가 지나가고 생긴 공백에 덤벼드는 지네들은 물 흐르듯 이어지는 정시우의 회피 동작에 어김없이 허공을 깨물었다. 직후 다른 궤도로부터 휘둘러지는 망치에 놈들의 머리통이 차례대로 으깨졌다.
“이제야 좀 싸우는 것 같네!”
“물리면 안 돼요, 조심해요!”
“안심해, 물릴 생각 없…… 어!”
[크샤아아아아!]
그냥 휘두른다기에 정시주의 망치는 너무나 빠르고 정확했다. 흡사 숙련된 검사를 보는 것만 같았다.
절대로 빗나가지 않고, 과하지도 않았으며, 목표를 완수하고 바로 다음 동작으로 변모하는 망치의 움직임은 정교하게 짜 둔 프로그램만 같았다.
그럼에도 가공할 점이 무엇인가 하면, 아직까지도 그는 마나를 활용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사방의 벽이 무너지면 조금 더 넓은 공동을 찾아 그 너머의 벽을 부수며 통로들을 무너트렸고, 그렇게 또 모여드는 지네들을 가볍게 처리했다.
그렇게 지네들을 처리할 때마다 루팅이 되지 않은 지네들을 따로 한쪽에 던져 놓았는데 그것이 벌써 수십 마리가 넘어서고 있었다.
[인간이 아냐…….]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광경을 눈앞에 두고 원혼은 허탈해진 나머지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정시우가 단순무식한 언행을 하며 자신의 뜻대로 놀아날 때만 해도 히죽거릴 수 있었는데, 지금 이 광경은 그의 상상과 계획의 영역을 벗어나는 강함이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분명 마나는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마나만이 절대적인 힘의 기준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지요.”
수아린이 아련하게 중얼거리며 정시우를 바라보았다.
퀘스트의 성공 여부는 이미 문제가 아니다. 던전 클리어 시간도 알 바 아니다. 하늘성이든 개미굴이든 정시우의 행동을 속박할 수는 없다. 정시우가 타고난 천력이, 그가 길러 온 기술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후…….’
한편 정시우 본인은 던전의 벽을 상대로, 그 벽 너머로부터 나타나는 지네들을 상대로 정신없이 망치를 휘두르며 반쯤 무아지경에 빠져 있었다.
‘즐겁다. 플레이어들은 여태까지 모두 이렇게 즐거운 삶을 살아온 건가?’
정시우는 터무니없는 힘을 타고난 탓에 어릴 적부터 육체로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 본 적이 없었다. 최선을 다할 수 없다는 말이 더 정확하리라. 맘껏 날뛰었다간 누구 하나 죽어 나가고도 남았으니까.
따라서 정시우는 자라오며 자신의 힘을 억압하는 방법을, 인내하는 방법을 먼저 익혀야 했다. 그럼에도 감추지 못한 편린만으로 특별대우를 받았지만, 사람들은 정말로 그가 전력을 내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그를 가르친 무술관장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련을 할 때는 어느 정도 힘을 내보일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론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다른 이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다는, 그래, 과시라고 해도 좋은 치기가 그에겐 있었다.
그는 단지 표출하고 싶었다. 자신의 힘을 오롯이 드러내고 싶었다. 있는 힘껏 날뛰고 싶었다.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 이면에는 그런 속내가 차지하는 부분도 분명 적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지네병정소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시우는 전력을 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실 이것도 미진하지만, 그래도 마음껏 날뛸 수 있다는 것이, 누구도 말리지 않는다는 것이,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때 수아린이 기겁하여 소리 질렀다.
“오, 오빠! 다른 놈들보다 훨씬 큰 지네가! 세, 세 마리!”
[왔구나!]
정시우는 여전히 무아지경에 빠져 있어 수아린과 원혼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수아린이 대경하며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흔들었지만, 그는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고개를 들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
[쿠각, 쿠가가가가가가!]
그가 시원하게 뚫어 버린 던전 통로 너머, 던전에 들어올 때 수아린이 말했던 것처럼 몸길이만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지네 세 마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날아드는 것이 보였다.
원래 통로의 한계상, 한 번에 한 마리씩 상대할 수밖에 없는 놈인데 스스로 사방을 무너트려 놓아 세 마리를 한꺼번에 대적해야 하게 되었으니 인과응보인 셈이다.
[드디어!]
“당신……!”
원혼이 쾌재를 부르고, 그것을 본 수아린은 이를 악물고 분노를 불태우던 그때.
“후우.”
정시우는 감각만으로 놈들의 강함을 가늠하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망치를 뒤로 뺐다.
그리고 있는 힘껏 내질러 망치의 궤적 안에 들어온 세 마리 지네의 머리를 모두 동시에 부수었다.
[…….]
“…….”
원혼과 수아린이 조용해졌다. 더 이상 정시우에게 달려드는 지네는 없었다.
그는 적이 하나도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무아지경에서 깨어나, 비로소 방금 자신이 해치운 놈이 다른 놈들에 비해 강한 놈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음.”
그리고 말했다.
“마나는 보스전에서나 써 봐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