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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33화 (133/205)

133화. < 욕망 (3) >

나는 대검을 쥐고 코너를 뛰쳐나갔다. 수많은 총구에서 일제히 불꽃이 분사되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총알들이 메뚜기 떼처럼 덮쳐왔다. 나는 빗발치는 총알 사이를 거슬러 적의 전열에 육박했다.

맨 앞선 놈의 복부를 대검으로 꿰기까지는 찰나지간이면 충분했다.

한 놈을 꿰뚫고, 다른 놈을 횡으로 베었다. 놈의 베인 상체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세 놈을 추가로 베었다.

궁금하다.

이 검을 누가 멈출 수 있을지.

경장갑을 걸친 검병들은 내 움직임을 눈으로 쫓았다. 내게 반응하는 것만으로도 놈들의 수준이 일류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응하는 것과 대응하는 것의 난이도는 천지차이다.

나는 적들의 한가운데에서 종횡으로 대검을 휘저었다. 세라믹 방탄판도, 강화된 신체도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평등했다. 일합에 너덧 명씩 장례를 치르자 잠깐 후에는 남아나는 적이 없게 되었다.

“괴, 괴물 같으니…!”

적 장교가 경악에 차 소리쳤다.

자기 부하가 작살나는 모습을 너무 감명 깊게 본 것인지.

나는 즐비한 시신들을 넘어서 놈에게로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렇게 칼춤을 추었는데도 대검에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과연 신검이라고 불릴 만했다.

털썩.

그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겠지. 듣도 보도 못한 놈에게 지금껏 쌓아올린 모든 걸 한순간에 잃게 된다는 걸.

업보라고 생각하라고.

그는 익스티아로 인간을 개조하는 추악한 범죄에 한 발 담근 자다. 괴물은 내가 아니라 그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아니면 우리 둘 다이던가.

“우르, 영어는 좀 할 줄 아냐?”

"아직 알아가는 단계다. 한국어를 익히는 걸 우선하고 있다.”

"그러면 이놈을 취조할 방법이 없겠네.”

멍청하게 언어가 통하는 사람을 데려올 생각을 못했다.

영어에 능통하면서 적들을 종잇장 찢듯 찢어발길 수 있는 인재가 드물기는 하다. 당장 떠오르는 얼굴은 소미뿐이었다.

장교는 내가 자기를 죽일 거라 여겼는지 막무가내로 발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급살 맞은 듯 눈을 까뒤집으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제압마법을 썼다. 시간이 촉박하니.”

우르가 장갑을 털며 말했다.

안 그래도 이놈을 어찌해야 하나 싶던 차였다. 갈 길은 멀고, 비무장인데다 항복의사까지 밝힌 놈을 죽이긴 꺼림칙하고.

“가자, 더 귀찮은 놈들이 붙기 전에.”

우리는 3층 안쪽으로 쭉 들어갔다. 이곳은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방공호가 아니라 거대한 연구실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았다.

일자형으로 뻗은 통로를 따라 수많은 방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투명한 통유리 너머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방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와 설비가 즐비했다.

"경비병, 경비병!”

연구원들이 꼬리에 불 붙은 망아지마냥 혼비백산해 달아났다. 겁에 질린 비명이 요란한 경보음과 한데 어우러져 세기말스러운 협연이 펼쳐졌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존재를 의심만 하던 장소도 발견했다. 익스티아 중독자들을 모아놓은 방이었다.

남녀를 불문한 십여 명의 청년들이 가두리 양식을 하듯 좁은 방에 몰아넣어져 있었다.

그들의 단지 서 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리만치 넋이 나간 상태였다.

시선은 천장 위로 고정되었고, 입술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듯이 끊임없이 달싹였다.

그런 자들을 모아둔 방이 대략 대여섯 개 가량 존재했다.

- 익스티아를 장복하게 되면 밤낮으로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다가, 결국 혼돈의 마력에 먹혀 인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임택의 정보에 따르자면 그들은 혼돈과 접신해있는 상태였다. 증세가 여기까지 왔다면 구제가 불가능하다고 봐야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겠군.”

우르가 연구실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왜? 네 아버지는 다르마알을 싫어할 텐데.”

"순종적이지 않나. 그 사람이 원하는 이상적인 국민상이지.”

질서와 혼돈이 원하는 국민상이 똑같다니, 아이러니하네.

나는 핸드폰 카메라로 증거사진을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우르는 내 옆에서 동영상을 촬영했다.

중요한 정보들은 컴퓨터나 서류철에 들어있겠으나, 이 많은 서류와 컴퓨터를 일일이 분석할 시간이 없었다.

분석할 능력이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계단을 통해 추가병력이 몰려오는 게 느껴졌다. 이번에는 꽤 눈여겨볼 만한 마력반응도 느껴졌다.

나는 급한 대로 USB를 두엇 챙겼다. 어째서 미국이 이런 짓을 벌이는지, 엘 드라고와는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 중요한 의문은 여전히 미스테리였으나, 지하에 고립되기 전에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야만 했다.

우리는 비상계단을 타고 서둘러 4층으로 내려갔다. 4층 아래로는 더 이상 내려가는 계단이 없었다.

"잠시만 기다려라.”

계단 좌측에 전력실과 자가발전기가 위치해있었다. 나는 검을 휘둘러 발전기를 섯다운시켰다.

징글맞게 울리던 경보음이 잦아듦과 함께, 조명이나 자동문 등 전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시설이 작동을 중지했다.

내친 김에 나는 비상계단과 엘리베이터도 박살내버렸다. 이걸로 추적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포탈은 4층의 막다른 곳에 위치해있었다. 기다란 복도가 끝에 다다라 네 방향으로 갈라지더니, 각기 네 개의 포탈로 이어졌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전개인데.”

설마하니 다중포탈이 열려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각각의 포탈 앞에는 행선지로 추정되는 안내문구가 붙어있었으나, 듣도 보도 못 한 영어식 지명이라 내겐 있으나마나한 친절이었다.

"가장 왼쪽에 있는 포탈로 들어가자.”

"어디로 이어져있기에?”

"모르겠다. 프레임 색깔은 마음에 드는군.”

나는 잠깐 동안 우르의 뻔뻔한 낯짝을 쳐다보았다.

대마법사라 뭔가 수가 있겠거니 싶었건만.

"그래, 고민하느니 저지르고 보자.”

나는 앞장서서 포탈 속으로 몸을 던졌다. 우르는 포탈에 진입하기 전 텅 빈 복도에 거대한 겁화를 일으켰다.

경치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웬 널찍하고 습한 동공이 눈앞에 펼쳐졌다. 벽에는 화톳불이 걸려 일렁였고, 바닥에는 레일이 깔려있었다. 레일 주변은 야적장이었다. 흰 포대가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였다. 인부들로 보이는 자들이 포대를 수레에 싣고 나르다가, 우리를 보더니 놀라서 큰 소리로 외쳐대기 시작했다.

"침입자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에신어를 쓰는데?”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는 에신어였다. 이곳은 에신이 틀림없었다.

대기에는 마력이 충만했고, 공기의 질이 지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훌륭했다.

인부들은 몇 발 떼지 못하고 우르의 제압마법에 당해 하나둘 픽픽 쓰러졌다. 우르는 취조를 위해 일부러 한 명의 의식은 남겨두었다.

우리는 바닥에 쓰러져 버르적거리는 인부에게 다가갔다.

“......목생족이로군.”

허름한 모직옷 사이로 드러난 피부가 소나무 나무껍질처럼 갈라져있었다. 황갈색 피부에 초록빛 머리카락을 가진, 인간의 아종인 목생족 여성이었다.

우르가 오른손에 활활 타오르는 화염구를 소환했다. 목생족 처자는 공포에 질린 눈빛으로 이글이글 불타는 불길을 쳐다보았다.

목생족은 여러모로 인간보다 우수한 신체능력과 생존력을 지녔으나, 화기에 극도로 취약했다.

“긴말 않겠다. 너를 죽이는 게 살리는 것보다 훨씬 간단하다는 것만 알아둬라.”

처자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우르는 간만에 삼상회의 거두다운 카리스마를 보이는 중이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이곳은 누가 다스리는 지역이냐?”

그녀의 눈매가 좁혀졌다. 그녀는 눈앞에 아른거리는 공포와, 입에 담기 어려운 존재가 가져다줄 두려움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중이었다.

"말로는 안 되겠군.”

우르가 불길을 가까이 가져가자 그녀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나, 나브니님이세요.”

“나브니라고?”

나와 우르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창녀들의 에사인 말인가?”

우르가 인상을 쓰며 되물었다.

황국에는 흉신에 가까운 스탠스를 지녔으면서도 체제하에 자연스레 녹아든 에사인이 몇 명 존재했다.

오데르와 나브니가 대표적인 예였다. 오데르가 암살조직을 만들어 자신만의 그림자 제국을 세웠다면, 나브니는 뒷골목 홍등가에 쾌락의 제국을 쌓아올렸다.

그 안에서 정확히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외부인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굉장히 부적절한 행위가 오가겠거니 추측만 해볼 따름이었다.

"납득이 가긴 하네.”

"어째서 말이냐.”

"익스티아는 결코 내성이 생길 수 없는 쾌락의 극치를 맛보게 해준다고 하지. 욕망을 관장하는 에사인의 발명품으로 그보다 어울리는 게 없겠는걸.”

“나브니가 익스티아를 만들었다면, 미국과 엘 드라고는 나브니의 하수인이란 말인가?”

"그렇게 단순화시킬 수는 없는 관계인 것 같다.”

헤인스 대사는 뉴 텍사스가 미국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독립국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 사실을 밝힐 때 자긍심마저 드러냈다.

만약 미국이 탐욕의 에사인에 의해 지배되는 게 사실이라면, 뉴 텍사스는 결코 독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브니는 무얼 노리고 있나? 어떤 계획을 획책중인 거냐?”

우르가 목생족 처자를 재차 다그쳤다. 그녀는 도리질을 치며 울먹였다.

"저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시키는 대로 짐만 날랐을 뿐이에요!”

우르가 나를 돌아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이 진실임을 보증해주었다.

"우선 여길 나가봐야 할 것 같다. 대륙의 어디와 연결되어있는지 확인부터 하게.”

우리는 바닥에 깔린 철길을 따라 이동했다. 이곳도 보안이 엄중하기로는 주한미군 벙커 못지않았다.

차폐벽이나 CCTV 같은 첨단기기는 없으나, 돌연변이 인간보다 훨씬 강력한 목생족 전사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보초를 서는 중이었다.

목생족 전사들은 타고난 마력과 단단한 껍질을 활용한 전투술에 도가 텄다. 게다가 그들 중 일부는 혼돈의 마력을 받아들여 뒤틀렸는데, 뒤틀린 개체의 전투력은 말라붙이 장군을 떠올리게끔 할 정도로 강력했다.

“타올라라.”

우르의 불길이 적들의 발밑에서 뛰쳐나와 화려하게 작열했다. 그가 발을 딛는 곳마다 적들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다시 말하지만 목생족이 약한 게 아니다.

상성이 너무 좋지 않을 뿐.

토굴은 끝을 모를 정도로 길었다. 왜 카르텔 놈들이 여길 던전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만 같았다.

드문드문 문명의 흔적들이 보였다. 에신의 기술수준을 한참 초월한, 지구에서 온 것임에 틀림없는 기기들이었다. 출구에 가까워져서는 형광등이나 전광판 등 전기로 작동하는 장치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포탈에 진입한지 삼십여분이 지나서야 햇빛이 내리쬐는 지상에 도달해냈다.

지상으로 통하는 출구는 마치 지하철역을 연상게 했다. 여기서부터는 콘크리트나 격자타일을 활용한 건축이 스스럼없이 활용되었다.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이미 나는 뭐가 튀어나오더라도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나는 페인트가 벗겨져 너덜거리는 문짝을 힘으로 비틀었다. 눈부신 햇살이 문틈을 지나 홍채를 송곳처럼 찔렀다.

끼이이이익.......

시력이 채 회복되기도 전이었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귓가에 스몄다.

나는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것이 기차가 서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기차가 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받아들이는 데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라힐, 이건 대체......”

"그래, 보고 있다.”

나는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눈앞을 노려보았다.

레일의 끝에 자리한 건 밀수조직의 음험한 은신처라던가, 녹음이 우거진 에신의 미개척지 따위가 아니었다.

우리를 맞이한 건 도시였다.

고층빌딩이 빼곡하게 들어선 메갈로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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