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32화 (132/205)

132화. < 욕망 (2) >

북한.

제아무리 충격적인 사건이라도 마법처럼 무마시켜버릴 수 있는 단어였다.

뭐, 무마까지는 아니겠다. 대북관계 설정에 실패했다며 가뜩이나 낮은 지지율이 또 두들겨 맞는 중이겠지.

"기사를 볼 수 있겠습니까?”

박이나 실장이 태블릿 PC로 뉴스를 보여주었다.

벌집처럼 숭숭 구멍이 뚫린 트럭과 널브러진 시신들.

자극적인 사진이 포털 전체를 도배하고 있었다. 앞으로 석 달 열흘간은 모든 뉴스가 북한 이야기로 도배될 게 틀림없다.

통일부장관이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진도 보였다. 돌처럼 경직된 표정을 보아하니 그는 이미 경질을 각오한 것 같았다.

각료들은 사건의 내막을 알고 있겠지. 그러나 사고는 터졌고 누군가는 화형대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그러고 보면 북한은 변화하는 시대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에사인을 만들기에 가장 유리한 나라를 꼽으라면 그들일 것 같아서.

일왕은 국민의 추대를 받지 못했으나, 김씨 부자라면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다른 뉴스도 보였다. UFC 헤비급 컨텐더인 정기호가 챔피언 도전권을 따내기 위한 마지막 관문만을 남겨두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격투기 팬들은 동양인 최초 중량급 챔피언의 탄생을 열망하는 중이라며.

"누구 부하인지 잘생겼구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뉴스를 하나하나 넘기다가, 연예면을 펼치자마자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화려한 조명과 쏟아지는 색종이들 사이에서 테일리시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은하가 꽃관을 쓴 채 테일리시의 뒤에서 활짝 웃는 모습도 보였다.

"무대는 흠잡을 데 없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정은하씨의 무대가 워낙 훌륭했다고 합니다.”

박이나 실장이 짤막하게 해설했다.

정은하는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천재다. 기사에 나온 대로 테일리시가 2등을 한 게 맞다면, 테일리시가 정말로 엄청나게 노력했다는 소리였다.

언론은 테일리시와 정은하를 라이벌로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가녀린 소녀가 눈물을 흘리는 광경이 기자들에겐 그저 신문이나 팔아먹을 소재거리로밖에 안 보이겠으나, 그녀의 본모습을 아는 내겐 섬뜩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다.

이거 뒷감당 어떻게 할 거냐고.

모르겠다,

엘 드라고에게 명복이나 빌어줘야지.

"잘 봤습니다.”

나는 박이나에게 신문을 돌려주었다.

"민원인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지요?”

"예."

"얘기는 바깥에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궁정을 빠져나와 앞마당으로 향했다. 궁정이 고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수도 전역이 발아래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볼 때마다 미소를 감출 수가 없는 정경이었다.

맨땅에서 한 삽 한 삽 뜨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자본과 인력이 모여 스노우볼을 만들어내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민원인들은 날 보자마자 땅바닥에 납죽 엎드렸다.

"일어나라.”

민원인은 모두 두 명으로, 거친 피부와 탄탄한 체격을 갖춘 전사였다. 그들의 실력은 값진 방어구만 보아도 가늠해볼 수 있었다. 이 험한 세상에서 값비싼 방어구를 당당히 걸치고 다닌다는 건 낮밤으로 한목숨 지킬 자신이 있다는 소리였다.

"이름이 무엇이냐.”

"쌍날의 메르입니다.”

“큰주먹 오웬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물었을 뿐인데 별호까지 달려왔다. 별호가 너무 유명해져 이름을 대체할 정도가 되면 소개가 이렇다.

그들은 아길리가 유명하다고 언급했던 모험가였다. 스트리아령을 주름잡는다는 싸움꾼, 낭인들.

거칠고, 잔인하고, 일자무식에다가 돈이 될 만한 곳이라면 불구덩이에도 뛰어드는 날파리 같은 자이다.

"용건을 말하라.”

아길리가 나무라듯 그들을 다그쳤다. 그들은 잔뜩 주눅이 들어있다가,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

“소, 소원이 있습니다!”

큰주먹 오웬이 더듬거리며 외쳤다.

"저희는 위대하신 분의 곁에서 싸우고 싶습니다. 당신께 제 두 주먹을 바치고 싶습니다!”

"제 양날검도.”

쌍날의 메르가 끼어들었다. 큰주먹 오웬이 곰같이 우둔해 보이는 자라면, 쌍날의 메르는 설치류같이 우둔해 보이는 자였다.

나는 마그나크록과의 대전에서 승리한 후 용병단을 해산시켰다. 아직 크록이 아닌 다른 종족에게 치안이나 국방을 맡기는 건 이르다고 보았다.

그들 중 다수는 요새도시로 돌아갔으나, 일부는 수도에 남아 일자리와 머물 곳을 구했다. 내가 알기로 수도 잔류파의 우두머리가 바로 이 두 사내였다.

"안 될 것 없지.”

그들이 입을 헤벌쭉 벌렸다.

"하지만 자격은 증명해야겠지. 앞으로 일 년간 법과 질서에 순응하며 잘 사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 너희를 쓰는 걸 고려해보도록 하마."

"감사합니다!”

"반드시 잘 살아 보겠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보기에는 그렇게 성실할 친구들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민원도 처리했겠다, 뼈와 가죽도 견적을 냈겠다, 이젠 미뤘던 일을 마무리 지으러 갈 차례였다.

나는 새로 지어진 외교부를 찾았다. 우르 황자가 수장으로 일하는 기관이었다.

"무슨 일이냐, 라힐.”

우르가 베이지색 롱코트를 펄럭이며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검은 가죽장갑은 이젠 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짐 싸, 한국 갈 일이 생겼다.”

"한국 정부와 일정을 잡아둔 게 없는데도 말이냐?”

"우리 일정으로 간다. 미군기지를 조사해야겠는데, 적의 소굴일지도 모르는 장소에 마법사도 없이 들어갈 순 없잖아.”

"싸울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

“내 예감으로는 백 퍼센트.”

"아르세니오에게 할 말을 남기고 떠나겠다.”

“......너네 사귀는 거 아니냐?”

우르는 내 물음에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그는 차량을 한 대 불러 아르세니오가 머무는 마법청으로 떠났다.

나는 그가 여정을 준비하는 사이, 아길리에게 잔류한 모험가들을 감독하는 일을 맡겼다. 그들과 같은 스트리아 출신인 그녀라면 섬세한 일 처리가 가능할 것 같아서.

대한민국은 예전보다 훨씬 시끌벅적했다. 호텔로 이동하는 내내 무장공비 뉴스가 쉬지도 않고 흘러나왔다.

심지어 주식도 폭락했다고 한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날까봐 외국인 투자자들이 돈을 싸들고 튀는 바람에.

"이 맛이 그립더군.”

우르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와 소파 위에 자리를 잡았다.

호텔방에는 평택 미군기지에 대한 상세자료가 그득했다. 미리 국정원에 요청해둔 자료였다. 우리는 TV를 켜둔 뒤 백색소음 속에서 서류를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르가 검토를 마친 서류를 책상 위에 던지며 말했다.

"한국은 미국에게 국방을 의지하고 있다는 건가? 다른 나라 군대를 자기 땅에 불러들여서?”

"그래, 아쉽게도.”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로군. 그들이 갑자기 변심한다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 세계는 그렇게 막무가내로 돌아가지 않아. 오랜 시간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교류를 맺어온 시간이 있으니까.”

“네가 그런 말을 하는 데엔 이유가 있겠지만, 정가에 이런 속언이 있다. 혼인동맹으로도 그림자를 막을 순 없다는.”

그 말은 나도 들어봤다. 사돈끼리도 오데르에게 암살의뢰를 하더라는 소리다.

나도 미국을 마냥 믿을 수 없다는 건 공감한다. 국제사회에서 영원한 무방이 어딨겠어.

가뜩이나 에신에 진출했겠다, 새로 얻은 힘에 도취되어 미쳐 날뛰고 있을지도 모르지.

"포탈은 벙커 안에 위치해 있겠군.”

우르가 기지의 조감도를 살펴보며 말했다.

"그렇겠지. 무려 핵미사일을 막을 용도로 지어둔 곳인데.”

“북쪽에서 들어가는 게 좋아 보인다. 진입하기 전에 동쪽에 불을 지르겠다.”

“기왕이면 사람이 없을만한 곳에다 질러다오. 괜한 인명피해가 나지 않게.”

"귀찮겠군.”

우르는 그러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호텔 음식을 먹으며 그날 하루를 여유롭게 보냈다. 다음날도 저녁이 될 때까지는 한가로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밀렸던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리면서.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우리는 검게 코팅된 작전차량을 한 대 내어 평택 근교로 이동했다.

평택기지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차를 버리고 걸어서 북쪽 진입지점으로 이동했다.

작전을 시작하기 전 나는 우르에게 눈코입 모양으로 구멍을 뚫어둔 비니를 쥐여 주었다.

"뭐냐?”

"가면 트라무마 같은 거 있으면 말해.”

그는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더니, 비니를 얌전히 뒤집어썼다.

"시작하겠다.”

우르가 말을 마치는 순간, 기지 동쪽에서 약 십 미터 높이의 불꽃이 치솟았다. 불길은 발연성 물질과 만나 순식간에 검은 연기를 하늘 끝까지 피워냈다.

"야, 다 죽일 셈이냐?”

나는 불의 규모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미군기지 바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마력과는 거리가 먼 자들이다. 설령 군모를 쓰고 총을 쥐었다 한들 그들은 내게 일반인이었다.

우르는 망부석마냥 정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으며 대답했다.

"아직 아무도 안 다쳤다.”

“...진짜?”

"따라와라.”

그가 앞장서자, 나는 머쓱해져서 조신하게 뒤를 따랐다.

퍼어엉.

망형 철조망이 우르의 손짓 한 번에 뿌리까지 드러내며 나가떨어졌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우리는 목표지점을 직선거리로 잇는 경로를 전속으로 주파했다.

약 일 킬로미터가량을 뛰어왔는데도 우리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미군기지는 이런 류의 침입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세상에 어떤 기지도 작정하고 덤비는 에사인을 상정하고 훈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즐비한 병영과 육차선 차도를 지나쳐 삽시간에 목표지점에 도달했다. 벙커는 단단한 화강암 암반 속에 자리했다. 내 팔뚝만큼이나 두꺼운 철문이 입구를 수문장처럼 지키고 있었다.

- 마력반응이 느껴진다.

우르로부터 사념이 날아왔다. 말하면 입만 아플 일이다. 진입로 위에 주술표식이 버젓이 새겨져 있었으니까. 카르텔 대원들의 대곡도 칼날에 새겨져 있던 바로 그 표식이었다.

드득득.......

나는 벙커 문짝을 완력으로 뜯어냈다. 끊긴 전선가닥이 경첩에서 튀어나오며 불꽃을 분수처럼 뿌려댔다.

벙커를 통과하고 나면서부터는 일사천리였다. 최첨단 안면인식장치와 이중 삼중의 보안문 등, 나는 앞을 가로막는 모든 걸 모조리 힘으로 짓뭉개며 나아갔다.

따르르르르르.

놋쇠를 두들기는 듯한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보안 격벽이 내려와 계단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았다.

"성가시군.”

우르가 검은 장갑을 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초고온의 화염이 뻗어나가 티타늄 합금을 눈 녹듯이 녹여버렸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가다가, 머지않아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고글형 방탄모를 눌러쓰고 두꺼운 세라믹 방탄판을 둘둘 감은, 익스티아가 낳은 돌연변이들.

놈들이 지하 3층으로 향하는 입구에 일렬로 도열해 방어진용을 갖추고 있었다.

“...구면이로구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돌격병은 어디까지나 적의 전열일 뿐이고, 후열은 처음 보는 병종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물 저격총으로 무장한 저격병, 장검과 경장갑을 갖춘 검병, 네발로 기어 다니는 추격병.

공통점은 신체변형이 기괴하리만치 심하다는 거. 상체가 엿가락처럼 길다든가 팔이 역방향으로 휘어져 있는 등, 도저히 인간이라 여길 수 없을 만큼 기형적인 체격을 가진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의 사이에는 지휘관 격으로 보이는, 개조된 흔적이 전혀 없는 장교나 연구원도 보였다.

타당, 타다다당.

인사 대신 총탄이 되돌아왔다. 벙커 벽에 쑥쑥 박히는 걸 보니 주술로 관통력을 높인 총알이 틀림없다.

"복도 끝에 포탈이 열려있다.”

"알아.”

나는 코너 뒤에 몸을 숨긴 채 허공에서 대검을 소환해냈다. 음울한 죽음의 기운이 화강암 바닥에 드라이아이스처럼 서서히 퍼져나갔다.

"다 죽일 셈이냐?”

우르가 물었다.

"아무도 안 다쳤어, 아직은.”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살의에 들뜬 표정이 그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