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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25화 (125/205)

125화 < 악어 사냥 (11) >

제3자인 내겐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민에게는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든 것 같았다. 나는 확장되는 그의 동공과 콧등을 타고 흐르는 땀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테, 테일리시...”

테일리시가 말없이 신발을 벗었다. 말없이 코트를 벗고, 말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래, 네가 이겼네.”

테일리시의 목소리는 나조차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정말로 이상민 때문에 상처를 받은 것 같았다.

이 방에서 유일하게 신난 게 정은하였다.

"와, 맛있겠다. 저 예전부터 이 가게 오고 싶었는데.”

정은하가 만면에 미소를 가득 지으며 이상민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상민은 그녀가 친근하게 굴수록 좌불안석이었다.

"주문할까요?”

메뉴판이 돌았다. 고기가 불판에 오르고 이야기가 한 타래씩 풀리자 분위기는 차츰 부드러워졌다.

상민도 점점 긴장을 풀고 대화에 참여했다. 다들 연예계 일에 빠삭한지라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편이었다.

"곧 예선 결승이 열리는데, 저희 중에 누가 1등 할 거 같으세요?”

정은하가 턱을 괴며 상큼한 표정으로 물었다. 드디어 나올 질문이 나왔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질문을 받은 이상민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썩어 들어갔다. 나는 한 인간이 내적으로 죽어갈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말해두지만 저는 테일리시뿐입니다. 데뷔할 때부터 팬이었으니까.”

내가 이상민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그렇다면 저는 정은하 씨 편을 들어야겠네요, 하하하.”

이상민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웃으면서 우는 연기를 해보라고 하면 지금 그의 모습이 모범답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엔 비겼네, 테일리시.”

정은하가 미소를 지으며 테일리시를 쳐다보았다.

"상관 안 해. 어차피 결과는 무대에 올라봐야 아는 거니까.”

테일리시가 새초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녀들을 관찰하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테일리시는 정은하에게 라이벌의식을 불태우고 있다는 거.

정은하는 테일리시를 동생처럼 귀여워하고 있다는 거.

드디어 식사가 끝났다. 이상민이 습관적으로 계산서를 쥐었으나, 정은하가 그것을 재빨리 가로챘다.

"제가 계산할게요.”

“아니, 그래도…”

"뇌물이에요. 모르셨어요? 다들 이렇게 한 표씩 벌고 있는데.”

정은하가 장난스레 말하며 계산대로 걸어갔다. 테일리시가 그녀를 따라 룸을 나서자, 이상민이 침통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봉팔아, 날 힘껏 때려다오.”

"왜?”

"이 악몽에서 빨리 깨야겠다.”

“...정신 차리자.”

"봉팔아, 이건 현실이 아니겠지, 그치? 은하 씨하고 테일리시 님이 네 소개로 저녁 먹으러 나온다는 상황부터 선 넘은 거 맞지? 그렇구나, 괜히 호들갑이었네, 눈 뜨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아침으로 돌아갈 텐데, 하하...”

나는 그의 구성진 타령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그가 자신의 볼따구를 잡아 늘리며 한탄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왜 내 주둥이는 나서야 할 때하고 아닐 때를 구분 못 하는 걸까?”

"너 애드라이너에서 너무 오래 일했어. 그거 직업병이라고.”

우리는 식당을 빠져나와 주차장 앞에서 다시 모였다. 정은하와 테일리시는 마스크로 하관을 빈틈없이 가리고 있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저기, 사인 좀 부탁드립니다.”

이상민은 기왕 이렇게 된 거 기념품이라도 남기려는 듯했다. 그가 정은하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다주는 사이, 나는 테일리시와 단둘이 대화할 시간을 가졌다.

"저 사람, 네 친구라고 했지.”

테일리시가 이상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놈이 한 말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니? 은하 팬이라고 해서?”

"아냐, 라힐.”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종류의 표정이었다.

"네가 한국에 남으라고 했을 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어. 여기 사람들은 너무 약해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다 죽어버릴 것만 같다고. 나는 소미 언니가 가르치는 것들에도 금방 싫증을 느꼈어. 춤으로는 사람을 죽일 수 없으니까. 사람을 죽일 수 없는 기술 따위를 배우는 건 시간낭비니까.”

한때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었다.

수십 년 전의 일이었으나.

"그게 틀렸다는 걸 깨우쳐준 게 은하야. 걜 처음 봤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세상에는 몸짓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술도 있구나, 누군가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때 삶은 정말 다양해질 수 있구나 하는.”

내 추측이 맞았다. 정은하는 테일리시를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동아줄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지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을 불태우는 것도, 스스럼없이 속내를 주고받을 친구를 만드는 것도, 그림자요새에서는 가져보지 못할 귀한 경험이었다.

"혹시 너, 살행을 열심히 다녔던 것도 그것 때문인가? 여기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게 될까봐?”

"맞아.”

테일리시가 살포시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보인 웃음이었다.

"나 이 세계에 점점 정이 드는 것 같아. 정확히는 이 나라에. 그래서 여길 망쳐놓으려는 쓰레기들한테 화가 나더라. 합숙훈련만 아니었으면 오늘도 나가서 몇 놈 죽였을 텐데.”

잔잔한 웃음 안에 팽팽한 살기가 담겨있었다.

살벌한 건 여전했다. 그건 무엇으로도 바꿔놓을 수 없는 그녀의 천성이었다.

"나는 아직 배울 게 많아. 은하보다 못하는 건 당연하고. 내가 슬펐던 건 네 친구가 나한테 관심이 없어 보여서 그랬을 뿐이야.”

"실은 말이다, 쟤가 원래는 너를...”

"저분 다음에도 다시 불러줄 수 있을까?"

테일리시가 이상민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뜬금없이 물었다.

“왜?”

"예선 끝나고 나서도 생각이 그대로일지 듣고 싶어서.”

"안될 것 없지.”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굳이 친구 놈에게 동의는 구하지 않았다. 대답은 물으나 마나였기 때문에.

나는 한국에 머무르며 김의호 대통령과 몇 차례의 회동을 더 가졌다. 주로 경제협력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대통령은 내게 대체로 솔직했다. 그는 함께 추진해야 할 큰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현실적인 어려움을 우회적으로 털어 놓고는 했다.

"저도 다음 정권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군요.”

라든가,

"그 건은 다음 정권과도 긴밀하게 협력하셔야 할 겁니다.”

라는 식이었다.

저녁뉴스는 현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나날이 떨어진다는 꼭지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보냈다.

김의호의 지지율이 하락하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공약 이행률이 낮다거나 야당이 비협조적이라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었으나, 근본적인 건 에신 때문이었다.

증가하는 범죄율, 미국과 중국의 폭주, 일본의 침체, 줄어든 무역량, 그로 인한 경기불황.

모든 게 에신과 연결되어 있었다.

에신과 무관하지 않은 일이 단 한 가지도 존재치 않았다. 장막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안다면 국제정세가 일목요연하게 읽혔다.

"이쪽은 백승연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입니다.”

김의호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여성을 내게 소개했다.

나도 김의호에게 소개시킬 사람이 있었다. 체격이 건장한 젊은 남성이었다. 이자도 흰머리가 수북하게 나있었으나, 이건 노화가 아니라 단순히 모발 색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여긴 우티르라고 합니다. 제 과거 동료이자, 전투와 첩보임무에 아주 능숙한 요원입니다.”

나는 우티르에게 눈빛으로 찌릿찌릿한 신호를 보냈다. 눈치껏 인사 좀 하라고.

“...감사합니다.”

우티르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어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우티르 님.”

대통령과 산업통상부장관이 우티르의 손을 번갈아가며 쥐었다. 우티르는 영문도 모른 채 손을 맞잡았다.

"야, 라힐. 나 잘하고 있는 거냐?”

"그래, 계속 그렇게만 서있어라.”

나는 그에게 엄지를 치켜들어주었다. 녀석은 엄지를 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겠으나.

우티르는 장차 대한민국의 어둠 속에서 암약하게 될 것이다.

그를 따라 약 500명의 암살단원이 파병되었다. 모두 기꺼이 한국에 가겠노라고 자원한 자들이었다.

그럼 산업통상부장관은 왜 나왔냐고?

"장관님, 튼튼한 친구들이니 마음껏 굴려주시죠. 우선 한국 생활에 적응부터 해야 할 테니까요.”

"잘 살펴 모시겠습니다.”

백승연 장관이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테일리시를 보며 나도 깨달은 게 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거.

평생 몸으로 때우는 삶을 살아온 놈들이라, 가나다부터 책 펴놓고 가르치느니 곧장 현장에 투입하여 직무교육을 시키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이분과는 면식이 있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국정원장 문민식입니다.”

김의호 대통령이 다음 각료를 소개해주었다. 국정원장 문민식은 나이가 칠순이 넘는,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경비한 베테랑 정치인이었다.

에신 프로젝트를 초기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며칠 전 저희 대테러보안국에 대한민국 국적의 민간인 한 명을 추적해달라는 요청을 하셨지요. 결과가 나왔기에 이렇게 자료를 준비해보았습니다.”

클럽 옥상에서 만났던 칼 든 잔챙이.

그놈은 이미 불귀의 객이 되었을 터였다.

그놈을 처리하러 온 그랜저 탄 남자가 내 타깃이었다.

조만간 얘기가 나올 줄은 알았으나, 밀실회담 중에 국정원장으로부터 직접 브리핑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뭘 알게 되셨습니까?”

"우선 화면을 보시죠.”

국정원장이 커다란 화면에 자료를 한가득 띄웠다. 한 남자의 신상명세와 사업등록증이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자료를 들여다보다가, 예상 밖의 정보에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주한미군이라고요?”

"예, 이자는 주한미군에 육고기를 납품하는 업자입니다. 오랜 세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견실하게 운영되어 온 사업체입니다. 요원을 보내 비밀리에 업장을 둘러보았습니다만 특이사항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특이사항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는데.

나는 그를 익스티아 총판일 거라고 의심하고 있다. 총판이 아니라면 최소한 새끼 마약상에게 물건을 나눠주는 중간다리 역할이라도 나왔어야만 했다.

“다음 화면입니다.”

국정원이 준비한 다음 자료는 사내의 동선이었다. 그는 주중에 서울 시내를 부지런히도 돌아다녔다.

동선만 놓고 볼 것 같으면 납품업자가 아니라 배송업자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부지런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모든 동선의 시작점에 미군기지가 빠짐없이 들어있다는 걸 빼놓는다면.

"설마..”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국정원장이 뭘 보여주고 싶은 건지, 왜 이 자리가 만들어졌는지 어렴풋이 감이 왔기 때문이었다.

"설마 미군기지를 통해 익스티아가 공급되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산자부장관이 옆에서 물었다. 국정원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자부 장관의 추론은 진실에 절반밖에 다가가지 못했다.

나는 김의호 대통령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그의 이마주름이 더 짙어보였다.

“......미군기지 안에 포탈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나는 그가 도달한 결론을 입 밖으로 꺼냈다.

대한민국 최대의 치외법권지역.

그곳이 이 나라의 취약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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