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24화 (124/205)

124화. < 악어 사냥 (10) >

나는 크록이 얼마나 무서운 종족인지 잘 알고 있다.

고기만 충분하다면 무한정 늘어나는 확장성, 머리가 잘리지 않으면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 재생력, 강인한 완력과 호전적인 기질.

마그나크록은 그런 크록의 정점에 군림하는 에사인이다. 나는 놈이 언제 돌아올지 항상 신경이 쓰였었다.

과거 크롱크의 정찰조와 마그나크록의 수색부대가 마주치는 일이 몇 차례 있었는데, 그때마다 항복을 도외시한 무자비한 전투가 벌어졌다. 놈의 추종자들은 우리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생각이 전혀 없어보였다.

마그나크록이 이대로 힘을 회복한다면, 놈이 찍어내는 불멸자 장군들이 계속 늘어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불리해질 것이라는 게 자명했다. 미래에 발생할 재앙을 막으려면 무리를 하더라도 선수를 쳐야만했다.

"마그나크록,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우르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유모는 그 이름을 내 울음을 멈추게 하는 마법의 주문처럼 사용했다. 그 탓으로 나는 아직도 가끔 크록이 나오는 악몽을 꾸곤 하지.”

"너도 악몽을 꾸네.”

"물론 나도 악몽을 꾼다. 나도 사람이니까. 다만 꿈 속의 크록은 실제 모습과는 차이가 크더군.”

"라힐,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사냥을 시작해선 안 된다, 그건 알고 있겠지?”

정기호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그는 이번 출정에 굉장한 욕심을 내고 있었다.

"대회 일정이 어떻게 되냐?”

“내가 준비할 건 달리 없다. 한 달 동안 경기 프로모션을 위해 미디어에 불려 다녀야 한다는 것 말고는.”

“한달이면 너무 긴데.”

마그나크록은 백 퍼센트 컨디션의 울토르조차 어쩌지 못했던 괴물 중의 괴물이다.

승률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놈이 하루라도 힘을 덜 회복했을 때 쳐야만 했다.

"한 달 후에 못 잡을 놈이라면 지금이라고 다를 것 없다. 싸움은 기세가 전부다. 싸우기도 전부터 접고 들어가면 이길 싸움도 지게 돼."

그는 암살로 밥벌이를 해왔던 나와는 사고의 출발점부터 달랐다. 내게 싸움이란 기세가 아니라 기습인데 말이지.

“그래, 까짓 한 달. 이번엔 네가 주역이니 네 일정에 맞춰주기로 하자.”

"내가 주역이라고?”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나도 슬슬 권능을 키워내야지. 나 혼자만으로는 이 넓은 땅을 커버할 수 없으니까.”

나는 과거 울토르가 그리하였듯, 마그나크록의 언월도를 막아낼 방패막이를 자처할 작정이었다.

정기호는 마그나크록이 내게 정신이 팔린 사이 빈틈을 찌르는 역할을 맡는다. 놈의 송곳니를 갈아서 만든 결전병기로.

라힐을 믿어라, 진소미를 믿어라. 정기호를 믿어라, 백날 천날 말로만 떠드는 건 소용없었다. 직접 한번 보여줘야 한다. 누가 태산같이 거대한 에사인과 맞서는가, 누가 역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세우는가.

그 자리에 함께했던 모든 자들이 위업의 증인이 될 것이고, 소문은 다리에 다리를 건너 신화를 창조해낼 것이다.

마그나크록이 쓰러진다면 영광의 관은 정기호의 몫이었다.

물론 정기호는 그 역할에 행복해하지 않았다.

"차륜전도 아니고 협공이라니, 굳이 그래야만 하나?”

"어차피 사람들은 디테일까지 신경 안 써. 디테일은 듣고 싶은 사람들이 채워 넣는 거지.”

"어리석다고 말해도 좋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내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다.”

"네 한계라면 내가 시험해줄 수 있으니 언제든지 말만 해.”

"네겐 기술을 쓸 수 없어.”

“왜?”

“널 다치게 할지도 모르니까.”

나는 정기호의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뭐냐, 진심으로?”

"당연하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는 내가 에사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가득 차있었다.

마음에서 지면 싸우기도 전에 지는 거라더니, 진짜 기합이 제대로 들어 있잖아.

"...좋아, 한 달 후에 보자. 하지만 그 전에 마그나크록이 먼저 우릴 친다면 기다리고 뭐고 없어.”

“지금 못 덤비는 놈이라면 한 달 후에도 별수 없지.”

그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 그건 농담이 맞을 것이다, 아마도.

다음 날, 나는 좀 더 상세한 보고를 받기 위해 에신으로 향했다. 아길리와 함께 외교부청사로 들어서자마자 휴대폰에서 불이 났다.

- 봉팔아, 오늘이니? 오늘이지?

- 그래, 오늘이 맞다.

- 고맙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친구 하나는 잘 뒀다!

이상민은 단순한 만남에 불과할 자리를 맞선이라도 보는 것처럼 오버하고 있었다. 졸지에 나는 중신을 서는 중매쟁이가 되었고.

- 너 그 나이 되도록 솔로였던 건 현실의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었냐.

- 네가 뭘 모르는구나. 현생과 함께 가는 덕질이 진정한 덕질이다. 결혼하고 애 낳으며 좋아하는 스타와 함께 나이 들어가다가, 콘서트장에 가서는 세월이고 뭐고 다 잊고 응원봉 흔들어 재끼는 거지.

- 그렇다고 치자. 아무튼 너무 호들갑 떨지는 마. 가볍게 술 한잔할 거니까.

- 사진 볼 수 있냐? 같이 오신다는 분.

나는 옆에 선 아길리를 무심코 돌아보았다. 그녀는 벽에 무심히 기댄 채 지나가는 공무원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 없어. 네 사진 안 보여준 거나 다행으로 여겨라. 그랬으면 만나기도 전에 도망가 버렸을 테니.

- 그래. 절대로 보여주지 마라, 꼭이다.

이상민이 신신당부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사실 내 휴대폰 앨범엔 공화국 주요인사들의 사진이 많이 저장되어 있었다. 함부로 뿌렸다가 유출되면 큰일 나니 보낼 수 없었을 뿐.

우리는 포탈을 통과해 공화국 수도로 돌아왔다. 나는 돌아오자마자 집무실에서 크롱크의 보고를 받았다.

“라힐 님, 이걸 보시죠, 큼.”

크롱크는 집무실 책상 위로 올라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수도 없이 늘어놓았다.

"여기, 이놈입니다.”

크롱크가 손가락 끝으로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덩치가 정말로 엄청났습니다. 막시무스의 쓸모없는 몸뚱이를 몇백 배나 늘려놓은 것 같았습니다, 큼.”

그가 찍어온 건 마그나크록이었다. 사진이 허락하는 프레임 안에 다 담아내기 힘들 정도로 거대한 생물이었다.

"동선이 어떻게 되더냐.”

"이곳에서부터 이곳까지, 약 이십 킬로미터 안팎입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북쪽으로는 좀처럼 올라오지 않습니다. 라힐 님이 두려워서 그런 게 틀림없습니다.”

크롱크가 캇캇 웃으며 마그나크록을 조롱했다.

그놈이 설마하니 날 두려워할 리는 없겠지. 그러나 나와 울토르의 합동공격에 꽤 충격을 받은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진작 공화국 수도로 쳐들어와 모조리 엎어버렸겠지.

“…그게 소문으로만 듣던 마그나크록이로군요.”

아길리가 곁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 보입니까?”

나는 마그나크록의 정면 모습이 잘 나온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두 손을 모으며 다가트에게 가호부터 구했다. 용기의 에사인을 섬기는 그녀조차 쳐다보기 버거울 만큼 무시무시한 형상이었다.

에사인끼리의 위계를 따지자면 마그나크록이 다가트보다 더 윗줄일 것이다. 본인이 가진 힘도 엄청나지만, 자기 몸에서 나온 무기로 찌르지 않는 이상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게 터무니없는 권능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정기호 님이 걱정됩니다.”

정기호가 마그나크록과 맞짱을 선언했다는 건 이제 비밀도 아니었다.

"바보라서 못 말립니다. 죽어봐야 저승을 안다는 말이 있죠.”

"승부를 내려면 가까이 다가가는 게 관건이겠군요. 크록이 너무 많아서 접근이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

"길을 열어야죠. 아길리 님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께서 힘을 써주시리라 믿습니다.”

야생 크록들은 허약하고 깡말랐으나, 마그나크록의 가호가 함께하는 한 두려움을 모르는 광전사로 탈바꿈했다.

정예 중의 정예라는 울토르의 직속부하들조차 몰아붙일 정도로.

때문에 전투의 핵심 키워드는 속전속결이었다. 부하들이 다 죽고 난 뒤라면 의미가 없을 작전이니.

“크롱크, 작전 개시시간은 앞으로 한 달 후다. 이상징후가 나타나거든 내가 어디에 있든지 찾아와서 보고해.”

"한 달이나 후입니까?”

"사정상 그리되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진 말고, 료헤이더러 난민 중에서 쓸 만한 자들을 추려내 군대를 조직하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큼.”

크록은 이미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만큼 충성스럽다.

그러나 인간이나 말라붙이 등 공화국에 새롭게 합류한 종족들은 아직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 위업의 증인이 되어야 할 자들은 크록이 아니라 그들이었다.

나는 오후 무렵 대한민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사이 이상민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걸려왔다.

어지간히 애간장이 타는 모양이었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에도 녀석이 여자와 얽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 흔하다는 짝사랑조차도.

녀석이 이렇게까지 진지한 걸 보니 나도 마음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아길리나 우르술라를 데려가 놀라는 반응이나 보려고 했는데, 두 사람은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할지언정, 최소한 그가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는,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데려다놓는 게 옳았다.

그래서 나는 테일리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 먼저 전화를 해줬네, 고마워.

테일리시는 신호음이 채 한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그녀가 반색하는 게 수화기 너머로 또렷이 느껴졌다.

- 테일리시, 혹시 오늘 저녁밥 같이 먹을 수 있겠니? 촬영일정 있으면 무리하지 말고.

- 갈게, 오늘은 촬영이 없거든.

- 진짜로? 24시간 리얼리티 쇼 아니었니?

- 편집해서 그렇게 보이게 할 뿐이야. 스탭분들도 주말엔 쉬어야 하잖아.

- ...듣고 보니 그렇네.

- 그럼 먼저 약속부터 취소해야겠다. 잠시만 기다려봐.

- 아니, 선약이 있으면 선약을 지켜야지. 누구하고 약속했는데?

- 은하.

- 정은하?

- 뭐야, 알고 있잖아.

알다마다. 현재 팬투표 1순위에 랭크된 연습생이니까.

누가 테일리시를 제칠 정도로 잘나가나 싶어서 영상을 확인해봤는데, 정은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천재였다. 그녀의 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벅찬 경이를 불러일으켰다. 작은 눈짓, 웃음소리, 심지어 머리카락 한 오라기마저도 그녀를 스타로 만들기 위해 기획된 것만 같았다.

- 혹시 정은하도 같이 나올 수 있나?

- 그럴게. 그게 좋겠다.

테일리시가 서슴없이 대답했다.

- 낯선 남자를 만나는 자리라고 해도?

- 괜찮아, 그동안 네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 그 애도 널 만나보고 싶을 거야.

이리하여 뜻하지 않았던 2 대 2 미팅이 성사되었다. 장소도 급선회하여 술집에서 고깃집으로 변경되었다. 장안의 화제인 스타들을 데리고 술을 먹였다가 무슨 추문에 휩싸일지 모르니까.

나는 만나기로 한 업소에 삼십 분 일찍 도착했다. 이상민이 한 시간 전부터 먼저 도착했다며 외롭다고 오두방정을 떨기에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어, 봉팔이.”

그는 내가 지금껏 본 가장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평소 그에 대한 내 이미지가 워낙 후줄근해서 그런가, 깔끔한 정장에 헤어스타일을 단정하게 정돈한 것만으로도 상당히 봐줄만했다.

"너무 힘주고 나온 거 아니냐.”

"평소 이러고 일하잖아. 그러는 너는 너무 편하게 나왔는데?”

"아는 동생 만나는 자리니까.”

"아는 동생이 누군지는 아직도 말 안 해줄 참이냐? 내가 알기로 여복 없는 건 너도 만만치 않았다만.”

"정은하.”

"정은하? 누구냐, 그건?”

정은하를 세상에서 정은하 부모님 다음으로 잘 알고 있을 법한 놈이 이걸 되물었다는 건, 내 입에서 나온 이름과 연예인 정은하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있어, 요즘 잘나가는 애.”

“그러냐. 정은하 씨. 이름은 되게 마음에 든다.”

이상민이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손톱으로 톡톡 두들겼다. 그가 긴장하고 있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녀석이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모습은 간만이었다. 내 대각선 윗자리에서 수능을 칠 때 이후로.

"봉팔아, 미리 말해두지만 계산은 내가 하니까 나서지 말어.”

"아직 만나보기도 전이라는 건 알고 있는 거지?"

"고마워서 그런다, 고마워서. 혹시 잘 안 되더라도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으마.”

바깥이 조금 부산해졌다. 잠시 뒤 방문이 열리며, 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

그녀가 바로 정은하였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눈매만으로도 곱다는 말이 나올 만큼 단아한 분위기를 가진 아가씨였다.

"안녕하세요. 라힐 씨 계시죠?”

그녀가 마스크를 벗으며 우리에게 물었다. 동시에 이상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더니, 갑자기 주먹으로 가슴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숨 쉬어라, 숨 안 쉬면 죽는다.”

"저, 저, 정은하!”

그가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 제가 정은하에요.”

은하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 웃었다. 그녀는 무례로 여겨질 수 있는 행동에도 전혀 괘념치 않았다. 이런 일이 그녀에겐 익숙한 듯 했다.

"이상민이라고 합니다. 데뷔하실 때부터 팬이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상민이 곧 정신을 차리고는 기합을 넣듯 절도 있게 인사했다. 은하는 놀란 듯이 눈을 뜨며, 연기를 하는 듯한 톤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정말로 제 팬이세요?”

"물론입니다. 일편단심이죠."

"너 저번에는 테일리시 팬이라며.”

"내가 언제? 정은하 님을 두고 그럴 리가 없잖아.”

이상민이 뻔뻔하게 세탁질을 시도했다.

"분명 지난번엔 테일리시더러 게이팝의 희망이라고...”

“...는 정은하 님뿐이라는 게 오랜 제 지론입니다.”

은하가 갑자기 손사래를 치더니, 허리를 꺾으며 박장대소했다. 이상민의 임기응변에 감동한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간신히 웃음기가 가라앉자, 문 너머를 향해 손짓했다.

"테일리시, 내가 이겼지?”

테일리시가 열린 문간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상민을 미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