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 독립 (5) >
"황국과 전쟁을 하게 되는 건가요?”
박이나가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나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이렇게 태연히 자리에 앉아있지도 못하겠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건 황제교 신앙을 이루는 일곱 기둥 중 셋째, 로켄이라는 자입니다. 꿈을 드나들며 인간의 정신을 농락하는 흉신이죠.”
"굉장히 위험하게 들리는군요.”
"상상하시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자입니다. 가능한 한 빠르게 선제적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김형식 총리를 돌아보았다.
“방위도시, 가능하겠습니까?”
총리가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포탈이 열린 후 대한민국을 통해 물자와 재화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예산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겠습니다만, 인적자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공화국에서 가장 귀한 자원이 인적자원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숙련된 인부 오천 명을 제하면 수도의 모든 사업이 올스톱되고 말 겁니다.”
"그러면 사천 명으로 하죠.”
"기실 사천 명도...”
"준전시상황입니다. 수도를 전선으로 삼을 게 아니라면 요새도시를 만드는 걸 어떤 일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총리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무역이 개시됐다면 식량수급 문제도 해결이 됐겠군요.”
"예.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식량주권을 위해 가축화 프로젝트의 안착이 필요합니다. 현재 들짐승 십여 종을 가축화하는 프로젝트가 성공을 앞두고 있습니다. 늦어도 한 달 내로 성과를 보일 수 있겠다고 합니다.”
"좋습니다. 결코 배양시설이 멈추는 일이 있어선 안됩니다.”
체급을 키워야겠다.
원정을 다녀오고서 절실하게 느낀 점이었다.
변방 중의 변방이라는 스트리아령조차 단독으로 30만이란 군대를 뽑아내는 게 가능했었다.
지금이야 우리가 질적으로 우수하다지만, 문명의 이기가 퍼져 황국인들도 신식무기로 무장하는 날이 온다면 질적 우위는 금방 뒤집어지고 말 것이다.
"법을 만드는 작업은 어찌됐습니까? 임시국회가 잘 돌아가나요?”
나는 원정을 떠나기 전, 김형식 총리에게 사법제도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었다.
그것을 위해 공화국 최초의 임시국회가 구성됐었지. 크록 280석에 인간 20석의, 인구비를 고려한 지극히 크록친화적인 국회였다.
"약 십 퍼센트가량 완성됐습니다. 헌법조문은 작성이 거의 끝났습니다만.”
"볼 수 있겠습니까?”
나는 김형식 총리에게 미리 인쇄해둔 헌법초안을 넘겨받았다.
그는 일전에 내게 정교분리의 원칙을 깨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었다. 신법을 인법 위에 두겠다는 대담한 발상이었다. 그 아이디어가 초안에 얼마나 적용됐을지 궁금했다.
“......파격적이로군요.”
나는 헌법을 처음부터 끝까지 검토한 뒤 소회를 밝혔다.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내 기대보다 훨씬 급진적인 물건이 만들어졌다. 아니, 퇴행적이라고 해야 하려나?
확실한 건 민주주의 국가에서 고등교육을 마친 사람이라면 이 헌법을 제정신이라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겠다는 점이었다.
- 우리 공화국 국민은 에사인이 세운 신성한 질서하에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며, 각인이 최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의 균등함과 결과의 공정함을 기하며, 주체적이며 자율적으로 우리들의 안전과 행복과, 보편적인 삶의 질의 향상을 확보 할 것임을 다짐한다.
문제가 되는 대목이었다.
빠진 단어가 여럿이었는데, 크게 두 가지만 꼽자면 ‘자유’와 ‘평등’이다.
김형식의 헌법초안은 평등권을 건드렸다. 에사인을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로 명문화해놓은 것이다.
평등권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자유, 참정, 재판, 재산권 등 다른 기본권도 도미노처럼 침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많은 고심을 했습니다. 신권을 어디까지 인정하느냐를 두고 지리한 토론을 밤낮으로 벌였습니다. 저희가 도달한 결론은 이렇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의 권리를 논하자는 건 시간낭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게 우리가 어떻게 순응해야 하는가를 논하는 게 사리에 맞을 겝니다.”
김형식은 이쯤에서 내 얼굴을 흘긋 살폈다. 이젠 그도 깨달았을 것이다. 크록이 성기는 종족신이 바로 나라는 것을.
"하지만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걸어두었습니다. 모든 에사인에게 그런 권리를 주겠다는 게 아니라, 오직 국시로 정한 에사인에 한정해서만 권리를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국시는 민의를 대표하는 기관인 국회에서 정하기 때문에, 결국 국민주권이란 대원칙은 지켜지는 셈입니다.”
"권리가 인정된 에사인이 있습니까?”
“크록의 시조신인 라힐입니다. 찬성 298표, 기권2표로 가결되었습니다.”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이었다.
기권 2표를 이 시대 최후의 양심이라고 부르고 싶군.
그나저나 내가 언제 크록의 시조신이 됐다지. 상처 입고 달아난 마그나크록이 억울해서 울겠다.
배양실에서 태어난 크록이 원시크록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인간에서 비익족과 수생족이 파생되었듯 나를 따르는 크록도 새로운 종으로 분류해도 될 것 같긴 하다.
"제가 알아둬야 할 다른 게 있겠습니까?”
“나머지는 사소한 것들입니다. 크록이 무성종족이기 때문에 남녀평등을 도모해야 한다는 구절을 조문에서 빼야 하는가, 헌법이 권리를 보장해야 할 지성종족의 범주를 어디까지 둬야 하는가 등입니다. 법제위원회에서는 크록의 꼬리를 성기로 인정해야 할지, 정신계 술법의 어디까지를 기본권 침해로 보아야 할지도 논의하고 있습니다.”
"...애매한 게 많아 보이네요.”
"예, 진이 다 빠질 지경입니다. 의견이 심하게 갈릴 때는 법전에 단 한 줄 추가하는 데에도 며칠이 걸리곤 합니다.”
투정과 달리 김형신의 눈빛은 젊은이 못지않게 팔팔했다. 그는 학자적 열망을 원 없이 불태우고 있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김형식에게 초안을 다시 넘겨주었다.
"고생하셨고요, 바쁘실 텐데 일거리를 더 얹어드려야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마법청이라는 부처를 하나 신설할까 합니다. 현재 영내에 마법사가 몇 명 있습니다만, 충분한 숫자는 아닙니다. 이래서는 도저히 타국과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없겠죠.”
"마법사를 양성하시려는 게로군요.”
"양성은 기본입니다. 교육을 수료한 후에도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서포트하고, 명단을 관리하고, 힘을 그릇된 일에 쓰지 않도록 감시도 해야 할 겁니다.”
황국은 마법사의 육성비용을 개인에게 부담시켰다. 부의 대물림 현상이 벌어지는 주요원인 중 하나였다.
나는 자질을 갖춘 학생이라면 학비 일체를 국비로 지원해줄 작정이었다. 학비 전액을 대준다고 하더라도, 육성이 끝난 후에는 본전 이상으로 부려먹을 예정이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장사가 아니었다.
"그러면 마법청장은 오르기 님이 되실까요?”
"예, 그보다 더한 적임이 없다고 봅니다.”
흔히 말하기를 천재는 좋은 스승이 되기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오르기는 부모를 여읜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십 년간 둔재 흉내를 내왔다. 그는 맨몸뚱이로 세상과 부딪혀야 하는 젊은이들의 설움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줄 것이다.
“허면 오르기 님은...”
"회군 중일 테니 삼 일 내로 도착하겠지요.”
"알겠습니다, 예산을 넉넉히 잡아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총리께서는 혹시 에신 수도병원에 가보셨습니까?”
"얼마 전 개원한 병원 말씀이시로군요.”
"예."
"아직은 신세질 일이 없었습니다만, 조만간 허리 때문에 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거기 원장님이 조명래라는 분입니다. 마력을 계량화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하시더군요. 좀 더 사정을 알아본 뒤 괜찮다 싶으면 그분을 마법청 자문위원으로 위촉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정말로 마력을 숫자로 환산할 수 있다면 인재를 가려 뽑는 데 큰 도움이 되겠지요.”
아르세니오의 MP가 1406이라고 했던가.
어떤 기준으로 산정한 수치인지는 모르나, 아르세니오는 로켄에게 점지된 용사다.
모르긴 몰라도 일반인보다 훨씬 높을 숫자임엔 분명했다.
"실장님께서도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네, 대통령님.”
박이나 실장이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인적자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자기 업무가 아닌데도 원정군의 보급을 도맡아 처리했다.
차량 이동이 극히 제한된 환경 속에서 그녀는 백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보급을 능란하게 완수해냈다.
덕분에 우리는 오직 먹고 싸우는 데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시 한번 업무 외의 일을 부탁해볼 작정이었다.
"이건 대통령령이 아닙니다. 에사인으로서 내리는...신령이라고 해두죠.”
전당에 도열한 크록 장군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듣고 있답니다.”
"에사인으로서 처음 내리는 신령이 이런 것이라 유감스럽습니다만, 부득이하게 종교의 자유를 제한해야만 하겠습니다. 현시간부로 공화국에서 혼돈의 다르마알, 부패의 킬데인, 꿈의 로켄, 심판의 그니르를 따르는 자들은 신앙을 지녔다는 것만으로도 추방 사유가 됩니다.”
“전부 우리와 싸웠거나, 앞으로 싸울 에사인뿐이네요.”
그녀가 팔목에 찬 묵주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녀는 내가 천주교를 거론할까봐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이 세계에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토라는 게 존재했다.
마그나크록의 정글에 일곱 권능이 침범하지 못했고, 하나의 중국의 영토에 다른 에사인들이 발을 붙이지 못했듯이.
언제까지나 밤을 지새워가며 남 머리맡을 지켜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로켄 등 적대 중인 에사인의 침투를 근본적으로 막으려면, 내 신앙을 본격적으로 퍼뜨려서 영적인 영토를 굳건히 세워야만했다.
"불응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니 막시무스를 데려가세요. 필요하다면 강제력을 동원해도 됩니다. 추방에 따른 보상이나 배상여부는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박이나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천성에 비해서는 거친 임무였다. 사람들에게 모난 말을 하는 걸 피할 수 없게 되겠지.
그렇기에 더욱이 그녀가 해줘야만 하는 일이었다. 감수성 모자란 사람이 맡았다간 분명 부당한 피해자가 나오고 말 것이다.
"그리고 아까 총리님께서 그러셨죠. 오직 국시로 정한 에사인에 한정해서만 권리를 인정하겠다고.”
"네."
"한 명 추가합시다.”
"누구를......”
"소미님입니다.”
"진소미 님 말씀이십니까?”
“투시즌 멤버이신...그분을요?”
김형식과 박이나의 반응이 미묘했다. 그들은 내가 무력으로 이 나라를 세우는 건 봤어도, 소미가 어떤 능력을 지녔으며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잘 모를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의 복안이 있었다.
믿었던 황자가 천벌을 받고, 로켄을 적으로 돌려버린 탓에 일곱 번째 권능이 되겠다는 꿈은 좌초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황제가 나눠주는 타이틀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나는 울토르의 힘을 발판삼아 한층 더 대담한 꿈을 꾸기로 했다.
황제교는 황제와 그를 따르는 일곱 에사인으로 구성된다.
그렇다면 라힐교는 그러지 말란 법이 있나?
나도 보란 듯이 일곱 에사인을 거느리고, 그들의 수장으로서 세상을 굽어살피면 되지 않을까? 인법 위에 신법이 있다면, 여러 에사인을 모아 신법 내에서의 민주정을 구현하겠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