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독립 (4) >
연구팀과 에신 수도병원 사이의 긴급 공조가 이루어졌다. 차수진 박사는 만능 재생세포를 시험해보자는 제안에 눈에서 불꽃을 튀겼다.
“그래요.”
그녀가 조명래 원장의 손을 덥썩 쥐며 말했다.
"안 그래도 임상시험이 절실했거든요. 여긴 너무 튼튼한 분들뿐이라 환자를 구하는 게 힘들더라고요.”
그녀는 내 눈치를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 환자가 생겨서 잘됐다는 말은 아니에요. 제 맘 아시죠?”
“물론입니다. 언젠가 이럴 날이 올 줄 알고 박사님 논문을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의대 커리큘럼을 초장부터 다시 정립해야 할정도로 엄청난 연구를 하고 계시더군요. 지금까지 제가 보고 배운 게 초라해질 지경이었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만약 시술이 효과가 있다면 첫 번째 환자는 보기보다 치료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장기가 복합적으로 손상된 두 번째 환자 같은 경우 시술까지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이탈을 볼 수 있을까요?”
"여기 있습니다.”
차수진이 조명래 원장으로부터 차트를 넘겨받았다. 그녀는 차트의 한쪽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MP가 뭐죠?”
“Magic power의 약자입니다. 제 졸저 ‘마력의 작용과 효용에 관하여’에서 다룬 개념입니다만, 아시다시피 에신의 모든 생명체에는 마력이란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있습니다. 저는 이 힘과 생물이 가지는 총체적인 생명력 사이에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하고, 힘의 크기를 계량화하는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그럼 여기 1406이란 숫자가...”
"아르세니오란 환자분의 MP, 즉 마력 보유량입니다. 계량방법이 정확하지 않아 근삿값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말 흥미롭네요.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이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며 수술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이 각각 이끄는 의료진과 연구팀이 뒤를 따랐다.
나는 이쯤에서 슬며시 병원을 빠져나왔다. 여기서는 더 이상 내가 할 일이 없었다.
밤이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원이 병원 밖에 운집해있었다.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무탈하신 걸 봬오니 기쁘기 한량이 없군요.”
머리카락이 허옇게 센 노인이 눈가에 자글자글하게 주름을 잡으며 인사를 올렸다.
김형식 총리.
법학과 교수였다가 건준위 위원장을 거쳐 공화국 총리에 오른, 나만큼이나 가파른 승진을 한 인물이다.
나는 마주 미소를 지으며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주문하신 침구는 어떻게 됐습니까?”
"포탈을 통해 며칠 전 배송이 완료되었습니다. 얼마나 푹신하던지 머리를 대기만 하면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김형식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사이 처리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 같이 쌓였을 테지만, 밤이 깊었기에 우리는 덕담을 나누는 선에서 대화를 마쳤다.
이어서 정장을 입은 젊은 여성이 또박또박 다가왔다. 손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서류가 한가득 들려있었다.
"승전고를 울려도 될까요?”
그녀가 엷게 웃으며 물었다.
"에신어가 굉장히 느셨습니다.”
“너무 빠르게 말씀하시면 못 알아들어요.”
박이나 비서실장.
어학에 대단한 재능을 타고난 여자였다. 이제 그녀의 에신어 레벨은 대화를 나누기에 전혀 무리가 없을 수준이 되었다.
"예, 승전고를 울리셔도 됩니다.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전사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실은 강적을 주렁주렁 매달고 돌아왔지만, 나는 굳이 그런 말로 초를 치지 않았다.
“저기, 그리고…”
박이나가 서류를 품에 안은 채 말끝을 흐렸다. 길 잃은 눈동자가 내 발치를 정처 없이 헤매는 중이었다. 언제나 차분하기만 한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극히 드물었다.
"아참, 오르기 님도 무사하십니다.”
나는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한마디 덧붙여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더니, 민망했는지 서둘러 모습을 감추었다.
그냥 찔러본 거였는데 이렇게까지 티를 낼 줄이야.
순간 내가 나쁜 놈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위대하신 분이시여.”
이어서 나의 챔피언, 막시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내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로 상체가 불쑥 솟아있었기 때문에 모습을 드러낸다는 표현이 무색하긴 하다만.
묵직한 쇠 부츠가 바닥을 묵직하게 두들겼다. 전사들은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좌우로 넓게 터주었다.
그는 내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더니, 방패를 바닥에 쾅 소리가 나도록 깊게 박아 넣었다. 그러고는 온 세상 사람들을 다 깨워버릴 듯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입신의 경지에 오르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경하드립니다!”
크록들이 그를 따라 외치며 분분히 무릎을 꿇었다. 신체구조상 크록은 무릎을 굽히는 게 어려운지라, 내게 경의를 표하려면 저마다 무기나 방패에 몸을 의지해야만 했다.
막시무스는 내가 진정한 의미의 에사인이 되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울토르의 힘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내면에서 수만에 달하는 크록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나를 따르는 이들이 무엇을 바라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세세하진 않아도 글이나 그림으로 설명할 수는 있을 정도로는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러나 막시무스가 나를 마주 들여다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내 힘의 변동을 가장 민감하게 감지한 크록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그가 최강의 크록이다.
"...일어나라.”
막시무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크록 전사들이 신속히 뒤를 따랐다.
본디 크록은 성격이 급한 종족이었다. 본능대로라면 지금쯤 눈알을 붉게 물들인 채 목청껏 소리를 질러대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막시무스의 카리스마 아래에서 일사불란한 군기를 뽐내는 중이었다. 대체 어떻게 훈련을 시킨 것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마음은 고맙다만, 밤이 너무 깊었다.”
여기 모인 사람은 수도 인구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마음 편히 잠을 자가다 웬 난리인가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민폐라고, 병원 앞에서 소리 지르는 거.”
"위, 위대하신 분이시여...”
막시무스의 당황감이 느껴졌다.
에사인이 되어서 가장 편해진 점을 꼽으라면 바로 이 순간이었다. 이제 목 빠지게 놈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표정이나 기분을 읽어낼 수 있다는 거.
"송구합니다, 환자가 있다는 점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송구하고 자시고 다들 그만 자러 가. 또 소란 피우면 쫓아낸다.”
"알겠습니다.”
모여든 인파가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병원 앞마당이 완전히 텅 빌 때까지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윽고 사람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떠난 걸 확인하자, 나는 마력을 끌어올려 병원을 향해 술법을 시전했다.
정신감응술.
로이, 혹은 이네스.
그, 아니면 그녀.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한 놈으로부터 배운 술법이었다.
그녀가 시전했던 정신감응술은 단지 시각을 공유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내 술법은 스게일이 달랐다.
나는 병원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의 시각, 감정, 사고에 동조했다.
- 꿈의 지배자를 적으로 돌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숙고해보시길 바랍니다.
로켄의 경고는 날 노리고 한 말이 아니었다. 부하들더러 들으라는 소리였다.
하나의 중국은 정신세계가 제압당한 탓에 몇백만이나 되는 군체를 두고 허무하게 소멸하고 말았다.
우리가 취한 수법은 필시 로켄에게 영감을 줬을 것이다.
아무리 로켄이라도 에사인이 된 내 정신세계를 침습할 수는 없겠으나, 다른 사람의 정신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위험한 시기였다. 무방비한 환자를 죽이기 위해 필요한 건 사소한 실수 하나가 전부였다. 왜, 범죄드라마나 의학드라마에서 자주 나오는 시츄에이션 있잖아. 생명유지장치 전원을 내린다던가, 링거 안에 산소를 주사한다던가.
때문에 나는 오늘 밤 인간 CCTV가 되어 병원을 감시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우르가 깨어나면 요구해야겠지.
야근수당 못 주겠으면 열녀비라도 세워달라고.
나는 병원 앞마당에서 밤을 홀딱 지새웠다. 피곤하진 않았다. 잠을 자느냐 마느냐는 이제 필요가 아닌 선택의 영역이 되었기 때문에.
동이 트자, 차수진 박사가 병원 문을 열고 좀비처럼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여기서 뭐 하셔요?”
그녀가 퀭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설마 지금까지 수술을 한 겁니까?”
"열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
열두 시간짜리 수술은 흔하다는 뉘앙스였다.
"경과는 어떻습니까?”
"일단 숨을 붙여두긴 했어요. 앞으로가 더 중요하지만요. 만능 재생세포가 안착하는 걸 보려면 일주일은 더 지켜봐야 해요.”
“...고생하셨습니다.”
숨이 붙어 있단 말을 들으니 맥이 탁 풀렸다. 밤새 마음을 짓누르던 돌덩이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저는 기술자문만 해서 별로 힘들 게 없었어요, 원장님이 고생하셨죠.”
"세상에 없던 기술을 만들어내신 게 박사님이십니다.”
"에이, 팀원들이 합심해서 이룬 거죠. 저 혼자였으면 불가능했을걸요.”
"그 팀을 꾸린 게 박사님이십니다.”
"그렇게 제가 고마우세요?”
차수진이 손목을 덥썩 쥐며 물었다.
“...전언 철회하겠습니다.”
로켄이 뒤통수를 때릴 때보다 더 스산한 기운이 엄습해왔다.
"아이, 이러지 마세요, 참말로!”
내가 손을 위로 들자, 차수진이 손목에 매달려 조롱박처럼 대롱거렸다.
"딱 한 번만 더요! 저번에 뽑아주신 피로 주술형 개체를 만드는 실험은 실패했단 말이에요!”
"저번에 실패했으면 이번이라고 별 볼 일 없을 거 아닙니까?”
"아니, 저번보다 휩씬 늠름해지셨는데요. 분명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요.”
나는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땅에 내려놓았다.
내 생각에도 이번에는 다를 것 같긴 했다. 전에 피를 뽑았을 땐 에사인도 아니던 시절이라.
이것이 내가 아침 댓바람부터 헌혈대에 누워있게 된 경위였다. 헌혈이라기보다 한 과학자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채혈에 가깝겠으나.
차수진에게 피를 뽑힌 후 나는 곧장 궁전으로 향했다.
궁전은 완공이 코앞이었다. 윗벽에 다닥다닥 붙어 망치질을 하던 목수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중무장 보병들이 도열한 마당을 지나, 장장 백 미터 길이의 대전에 발을 들여놓았다.
모든 게 떠났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석상처럼 자리를 지키는 장군들, 두개골을 깎아 만든 왕좌.
그리고 왕좌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는 총리와 비서실장.
"안녕하세요, 대통령님. 간밤에 편히 쉬셨나요?”
박이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침착한 기색을 유지했다.
“예, 그럭저럭.”
나는 그녀의 환대를 받으며 왕좌에 앉았다. 왕좌에 앉아 내려다보는 경치도 여전했다. 변한 건 나 하나뿐이었다.
전에는 왕좌가 이르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지금은 나를 위한 맞춤 제작된 자리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일단 저부터 말씀을 드리지요.”
나는 각료들을 내려다보며 운을 떼었다.
"경청하겠습니다.”
김형식 총리가 인자하게 대답했다.
“현시간부로 황국과 맺은 조약을 전면 파기합니다.”
“예?”
총리가 놀라 되물었다. 박이나는 놀랄 타이밍을 놓쳐 눈만 큼직하게 떴다. 나는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 않으며 연달아 지시를 내렸다.
"총리께서는 토건경험이 있는 크록 오천 명을 선발해주십시오. 기엔 영지와 공화국 수도 사이에 방위도시를 하나 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