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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95화 (95/205)

95화. < 잠들지 않는 자 (6) >

정신세계에 좌표를 찍어뒀다고?

나는 마법에 대한 조예가 없으나, 황자의 말이 상식을 벗어낫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남의 정신세계에 좌표를 찍는 게 그렇게 간단할 일일 것 같았으면 저쪽이 황자에게 술법을 걸지도 않았겠지.

“좋아, 어떻게 도와주면 되냐?”

나는 자잘한 걸 따져 묻지 않았다. 지금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황자의 아이디어에 걸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르세니오.”

“네, 황자님.”

“할 수 있겠지?”

“…네."

아르세니오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는 덤덤한 투로 그를 재촉했다.

“부탁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남에게 부탁한다는 말을 하는 경우가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아르세니오에게 무리한 요구를 밀어붙이는 중인 게 틀림없었다.

아르세니오가 나를 돌아보았다. 동그란 하늘색 눈동자에 잿빛 구름이 가득 담겨 맴돌았다.

“라힐님, 먼저 적의 정신세계로 들어갈 사람을 정해야 해요.”

"...그래야겠지.”

나는 황자가 꺼낸 화두가 무엇인지를 그제야 이해했다. 이제 우리들 중 누군가는 강대한 에사인의 정신세계로 원정을 떠나야한다.

그리고 남겨진 사람은 원정대가 임무를 마칠 때까지 밀려드는 전투형 개체를 상대로 남겨진 육신을 보호해야만했다. 어느 쪽이나 가망이 없어 봬는 임무였다.

“네가 황자를 데리고 가라. 검으로 벨 수 없는 적을 상대로 난 쓸모없을 것 같으니.”

원정대엔 마법에 달통한 황자와 로켄이 점지한 영웅인 아르세니오가 적격이었다.

어떻게 혼자 버티느냐는 의문은 일단 제쳐두자. 어떻게가 아니라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니까.

“아니요, 라힐님은 저랑 같이 가셔야해요.”

아르세니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자님은 가고 싶어도 같이 못 가세요. 저흴 정신세계로 보내주셔야 하니까요.”

“무슨 소리야. 이렇게 골골대는 놈을 혼자 남겨두라고?”

“그러니까 네가 가라는 거다. 승부처가 여기가 아니니까.”

황자가 힘겹게 말했다. 그는 이미 나 없을 때 아르세니오와 타협을 마친 모양이었다.

“가장 큰 영광을 양보하는 게 배알이 꼴리긴 하지만, 놈을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영광이고 뭐고 없을 테니.”

“우르.”

나는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뒷말을 어떻게 이어야할지 모르겠다.

내가 끌어내지만 않았더라도 궁중에서 호의호식하고 있었을 놈이었다. 불평 한번 해볼 법한데도 그는 내빼기는커녕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살다 살다 황족, 그것도 나를 죽인 자에게 감탄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분명 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역이라고 했을 텐데.”

“너무 못생겨서 쳐다본 거야.”

“...죽지 마라, 무례한 에사인.”

그가 상체를 숙이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웃으려다가 기침이 나온 것 같았다. 그는 이윽고 허리를 곧추세우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이제 가라!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다.”

전투형 개체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왔다. 뭉쳐서 덤비다가 마법 한방에 쓸려나갔던 데이터가 업로드됐는지, 그들은 극히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황자는 즉시 새로운 주문의 시전에 돌입했다. 적들은 더욱 움츠러들었으나, 이것은 공격마법이 아니라 정신계 침투주문이었다.

황자가 완전한 트랜스상태에서 마력을 운용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손을 뻗어 내 팔목을 잡았다.

아길리였다.

그녀는 벌써 정신을 차린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부릅뜬 눈동자에선 투지가 횃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아직 무리입니다. 안정을 더 취하셔야합니다.”

“말씀 나누시는 걸 들었습니다. 제 몸뚱이가 여기서는 쓸모가 없을지 몰라도, 육신의 제약이 사라지는 정신계라면 분명 역할이 있을 겁니다.”

고집이라면 그녀도 황자와 만만찮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촉급했다. 말로 설득할 수 없다면 강제로 떼어두는 방법도 생각해봐야했다.

“라힐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 손으로 가족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십시오.”

그녀가 내 눈빛을 읽었는지 간절한 투로 말했다.

“...좋습니다.”

가족의 원수를 갚겠다는데 말릴 명분이 없었다. 용기의 에사인의 신도이니만큼, 정신적인 대결에서 그녀가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뜻을 이루면 여생은 라힐님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아길리의 표정은 뒤를 생각하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놓칠 수 없다는 듯 두 팔로 내 몸을 꽉 껴안았다. 동시에 황자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큭...!"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빛은 눈꺼풀을 뚫고 시야를 완전히 점령하고 말았다. 나는 안구가 쪼그라드는 느낌을 견디지 못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이윽고 서서히 빛이 잦아들었다.

나는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보았다.

나는 웬 건물 안에서 눈을 떴다. 정확히는 어떤 방의 침대 위.

돌을 큼직큼직하게 깎아 만든 벽이 보였다. 창문이 나있지 않아 건물 안은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바닥을 서늘한 냉기가 감싸 흐르고 있었다. 침대에서는 말린 깃털과 가죽 냄새가 진동했다.

나는 이곳이 어딘지 알았다.

그림자요새.

오데르의 검으로서 한평생 몸담았던 장소였다.

하지만 어째서 그림자요새에 와 있는 거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관자놀이가 쿡쿡 쑤시는 탓에 한가지 생각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나는 머리를 매만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탁상 위엔 벗어둔 혁대와 장검이 올려져있었다. 습관처럼 혁대와 칼집을 차는데, 장검이 이상하리만치 가볍게 느껴졌다. 마치 이쑤시개를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상한데...”

나는 혁대를 세게 조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가 이상하냐?”

누군가가 문가에서 말을 걸었다. 칙칙한 회색 머리카락을 길게 드리운 사내가 서있었다. 그의 왼쪽 소매자락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외팔이였다.

“로이?”

“그래.”

사내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외팔이 암살자, 로이. 나와 우티르와 함께 불가능하리라 여겨졌던 마지막 살행을 떠났던 친구였다.

“하지만 넌 죽었을 텐데......”

관자놀이가 또다시 지끈거렸다. 마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무언가가 떠오를 듯 말 듯 수면 위를 넘나들었다.

“잠꼬대도 사람 가려가며 해라.”

로이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열린 문짝을 두들겼다.

“그만 기어 나와, 빨리 와야 국물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을 거다.”

나는 석연찮은 기분을 뒤로하고, 그를 따라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는 창문이 달려있었다. 좁고 길쭉한 창문 아래로 음산한 어둠의 땅이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며 창문 너머에 시선을 주었다. 어둠의 땅 곳곳에 유난히 짙은, 칠흑 같은 암흑이 드리운 장소가 있었다. 저곳이 바로 어둠의 자식들의 요람, 오데르의 흙구덩이였다.

“매일 보는데 지겹지도 않냐.”

로이가 옆에서 핀잔을 주었다.

나는 그와 함께 요새 중앙홀로 향했다. 이미 많은 형제들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이, 라힐.”

흰 머리카락을 가진 다부진 사내가 한손을 번쩍 들며 나를 불렀다.

목을 내줘도 아깝지 않을 형제, 우티르다. 그의 머리카락은 손으로 쥐는 것도 힘들어보일 정도로 짧았다.

“여기로 와라, 자리 맡아뒀으니.”

그는 자신의 좌우 빈자리를 빈 손으로 팡팡 두들겼다.

그는 나와 로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의미심장한 어조로 물었다.

“어제 어땠냐? 별일 없었냐?”

“뭐가?”

“모른 척 하기는. 어제 누님이 너 불렀잖아. 그때 아무런 일도 없었냐고.”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았다. 십여 미터에 이르는 기다란 테이블의 끝에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 여인의 어깨를 타고 가슴어림까지 흘러내렸다. 여인은 반짝이는 은수저로 피처럼 새빨간 디저트를 뒤적이는 중이었다. 기다랗게 뻗은 속눈썹에서 숨길 수 없는 무료함이 느껴졌다.

“...아무 일 없었어.”

나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황급히 시선을 거둬들였다.

별안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우르술라.

모든 어둠의 자식들이 연모해 마지않는, 오데르의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강력한 검.

그녀와 어제 무슨 얘길 나눴더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온통 기억나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녀가 내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며, 잊지 말아야 할 약속을 했다는 것 만큼은 또렷하게 기억났다.

“너무 티내지는 마라. 애들이 싫어하니까.”

우티르가 히죽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너니까 누님을 양보하는 거야, 인마.”

로이가 곁에서 우티르를 거들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안온감에 휩싸였다. 근래 나는 굉장히 피곤한 나날을 보냈던 것 같았다. 마치 홀로 기나긴 살행을 떠났다 돌아온 것처럼, 모든 것이 아련하고 반갑게만 느껴졌다.

“어때, 돌아오니까 좋지?”

로이가 내 마음을 읽은 듯이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잔을 기울였다. 목을 타고 넘어가는 음료의 맛이 기가 막혔다.

“배 든든히 채워둬라, 이번엔 꽤나 남쪽이니까. 대영주의 딸래미라는데, 그 동네에선 위세가 대단한 모양이다.”

“알았다.”

나는 세세한 내용은 묻지 않았다. 그런 건 언제나 로이의 몫이었다. 그는 한쪽 팔을 쓰지 못하는 대신 나나 우티르보다 머리를 더 잘 굴렸다. 우리는 각자가 서로의 모자란 점을 보완하는 장기를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나?

나는 촉이 좋았다. 애초에 두 사람에게 같이 다닐 것을 제안했던 것도 나였다. 그들과 함께라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기에.

나는 그릇을 훌떡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르술라는 수십 명의 형제들과 함께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들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직 나는 가장 짙은 그림자를 최단거리에서 보필할 정도로 자신을 증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나는 로이를 따라가려다가 문득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림자가 없었다.

이 넓은 홀에 그림자를 달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형제들이 그림자를 숨기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림자의 에사인을 섬기는 저주받은 자식들이니.

하지만 내게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강한 위화감을 안겨주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거기서 뭐하냐?”

로이가 먼 발치에 선 채 물었다.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심해지는 두통을 감당하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뭔가 잊고 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 무시하기 힘들었다.

“라힐, 머리 아프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아라. 벌써 잊었냐? 머리 쓰는 건 내 몫이라고.”

“...로이.”

나는 비틀거리며 걸어가 로이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아귀 가득히 그의 존재가 느껴졌다. 올올이 짠 옷감이, 따스한 체온이, 꿈틀거리는 맥박이.

나는 두개골을 박박 긁어내는 듯한 고통을 지나, 드디어 안개 너머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어떤 인연이 나를 옭아매고 있는지, 일순간 모든 것이 명료해졌다.

“미안하다.”

그의 핏발 선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미안하다, 로이. 혼자 버려둬서.”

“가지 마라, 부탁이다.”

그가 내게 매달렸다. 나는 그를 마주 바라보다가, 서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너희에게 약속했다. 이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되어 그림자를 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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