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잠들지 않는 자 (5) >
작열하는 화염,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섬광,
달아오른 지면이 팥죽 끓듯이 펄떡거렸고, 착탄지점에서 피어난 후폭풍은 족히 기천 명의 적병을 집어삼켰다.
"......"
나는 누군가의 신체 일부였을 외골격 쪼가리를 내려다보며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십여 명에 달하던 장군들이 폭발에 직격당해 흔적도 없이 소멸하고 말았다. 방사형으로 패인 구덩이만이 그들이 남긴 전부였다.
황자는 그야말로 입신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어떻게 궁중에 박혀 살았는지.
모든 황족이 황제의 지고무상한 유전자를 이어 받았다면, 황제가 자손들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나는 비틀거리며 마차로 돌아갔다. 엄살을 피울 때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부상이 엄중했다. 어디 한 군데 크게 잘못된 건 분명했다. 걸을 때마다 발바닥에서 등골을 타고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라힐님, 괜찮으세요?”
아르세니오가 날개를 퍼덕이며 땅에 내려앉았다. 그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주머니를 뒤적여 유리병을 하나 꺼냈다.
“이걸 쓰세요. 다 나눠주고 남은 게 이거 하나뿐이에요.”
몸달래풀의 즙이었다. 나는 갑옷을 내던진 뒤 간단히 응급처치를 실시했다. 깊게 난 자상 위에 약을 들이부을 땐 입에서 쌍욕이 절로 나왔다.
“어때요? 훨씬 낫죠?”
아르세니오가 옷을 찢어 급조한 붕대의 매듭을 묶으며 물었다.
“훨씬.”
사실 통증은 그대로였다.
나는 턱 밑에서 까딱이는 그의 솜털 같은 흰 머리카락을 보며 이런 의문이 들었다.
대체 이 친절한 소년이 왜 ‘광기의 아르세니오’인지 모르겠다고.
그의 궁술은 냉정함의 극치였다.
검과 달리 화살은 일점에 모든 위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동선을 예측하는 판단력과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이 요구되었다.
아르세니오는 방금 같은 극한의 상황에서조차 흔들림 없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이럴 때도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광기라면 그걸 과연 광기라고 불러야하는가.
“황자는 좀 어때?”
“잠시만요.”
아르세니오는 그제야 황자를 떠올린 듯 황급히 날개를 퍼덕였다. 황자는 나와 달리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았으나, 몸 상태를 생각했을 때 그만한 마법을 날리고도 후유증이 없을 리는 없었다.
아르세니오가 황자를 찾으러 떠나자, 나는 큰망치 전사단의 생존자를 찾아 움직였다. 정확히는 아길리의 생존여부를 확인해두고 싶었다.
아길리는 전쟁 때문에 가족도, 친구도, 고향마저도 잃어버렸다. 돌아갈 곳이 없어진 그녀가 남긴 마지막 서원은 내 친위대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너무 나빴다. 중국군 장수들은 나조차도 버티는 게 고작이었을 정도로 강자들이었다. 가뜩이나 그녀의 신앙이 용기의 에사인인 탓에 , 몸을 사리면서 싸웠을 것 같지도 않았다.
“아길리!”
나는 적막한 전장 한가운데에서 그녀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시신이 사방에 잔뜩 널려있었다.
대부분의 시신들은 큰망치 전사단원이었다. 헐벗은 몸뚱이에 그득한 다가트의 문신. 그들은 용기의 에사인의 추종자답게 죽음을 직면하고서도 누구 하나 등을 돌리지 않았다. 전원이 물러서지 않고 싸우다가 죽은 탓에 시체의 벽이 가지런한 라인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길리!”
나는 머지않아 아길리를 찾아냈다. 사자갈기를 닮은 금빛 머리카락이 표적지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녀는 동료들과 다소 동떨어진 곳에 홀로 쓰러져 있었다. 땅바닥에 꽂힌 도끼엔 선혈이 흥건했고, 근처에는 머리를 완전히 박살내다시피 한 중국군 시체 하나가 나뒹굴었다. 그녀는 적 장수와 생사결을 벌이다 동귀어진을 한 것 같았다.
"젠장......"
바닥에 피가 잔뜩 고여 있었다. 그녀의 복부에서 흘러나온 피였다. 나는 황급히 그녀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호흡이 느껴졌다.
미약하기 그지없으나, 생명의 신호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는 상의를 즉시 조각조각 찢어버렸다. 그리고 찢어낸 천에 아르세니오에게 받은 약을 적셔 그녀의 복부를 둘둘 감쌌다.
“...라힐님.”
정신이 돌아온 그녀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입술에 핏기가 전혀 없었다. 뺨은 창백하다 못해 핏줄이 비쳐 보일 지경이었다.
“말하지 마세요. 체력을 아껴야합니다.”
그녀는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힘겹게 열렸다.
“.......를 만났습니다."
“이제 쉬시죠. 안전한 곳에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를 만났습니다. 저의…”
발음이 불분명해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입술에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아길리의 호흡이 급격히 불안정해졌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기력을 쥐어짜는 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말리고 싶었으나, 그렇게 해서라도 전해야하는 메시지라면 막지 않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그들에게서...”
아길리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다시 의식을 잃었다. 이마에 굵은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어머니를 만났다니.
아길리의 어머니는 중국군에 의해 죽었다. 그녀가 만난 건 군체의식이 흡수한 어머니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중국은 아길리의 육신마저 탐냈음에 틀림없다. 가족을 가장해서 회유하려 들었겠지.
그녀의 대답은 박살난 중국인 장수의 몸뚱이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은 가족의 생각을 다른 이에게서 듣는 게 얼마나 충격적인 경험이었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들쳐 업어 황자의 마차로 향했다. 나는 마차에 도착하자마자 황제가 앉은 뒷칸에 아길리를 내려놓았다. 황족용 마차라 어차피 남는 게 공간이었다.
“라힐.”
황자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그가 숨을 쉴 때마다 허파에서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는 마차좌석에 힘없이 머리를 기대어있었다.
“미안하군. 아무래도 너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김 새는 말 하지 마라. 안 그래도 잔뜩 땀 빼고 왔는데.”
황자가 손을 뻗어 자신의 가면을 움켜쥐었다. 그는 가면을 힘주어 벗은 뒤 마차 밖으로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은 단지 탄 것을 넘어서서, 붕괴되어가고 있었다. 칠공에서 새어나온 검은 피가 목탄 같은 피부를 적셔가는 중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는 차마 농담을 던지지 못했다.
“내 몸의 한계가 머지않았다. 마법을 더 쓴다면 버티지 못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마법 안 쓰고 치료하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마법을 쓰지 않으면 우리는 지고 만다.”
황자가 아르세니오를 돌아보았다. 아르세니오가 기운을 다한 황자를 대신해 내게 설명했다.
“아까 황자님이 날려버린 적들 중에 주술사가 있었어요. 그놈은 황자님이 마법을 시전하는 걸 방해하기 위해 정신계 술법을 걸어왔어요. 하지만 황자님 아시잖아요, 남이 하지 말라는 건 항상 앞장서서 하시는 분이라는 거. 황자님은 주술을 방어하지 않고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셨어요. 그놈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고 싶으셨다나요.”
“...미친 건가.”
“제 말이요. 이럴까봐 황자님을 따라온 거였는데.”
아르세니오가 팔짱을 끼며 푸념했다. 그의 눈동자엔 수심이 가득했다.
“아무튼, 황자님은 하나의 중국이란 에사인의 마음을 훔쳐보는 데 성공하셨어요.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죠. 더 오래 머무르면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을 테니까.”
에사인의 마음을 엿보고 돌아오다니.
주술을 시전한 게 에사인의 진신이 아니라, 의지의 말단을 나눠받은 개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미쳤다고 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나는 많은 것을 보았다.”
황자가 부르튼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네가 알아둬야 할 것만 말하지.......군체의식의 실체를.”
여기서부터 본론이었다. 그간 하나의 중국이 어떤 메커니즘을 가진 존재인지 많은 가설이 있었다. 그 윤곽이 드디어 잡히려는 모양이었다.
“놈의 의식은 하나이나, 몸은 여럿이다. 그래서 군체의식이라 불리는 것일 테지. 놈은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수백 수천만으로 나뉜 육신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이를테면 약하게 태어난 개체에게서 마력을 뽑아내 잠재력이 높은 개체에게 부여하는 식으로.”
강한 개체에게 마력을 몰아준다,
일명 독침설, 오르기의 이론이었다.
“약 천 명의 영혼을 하나로 합친다면 방금 네가 상대했던 그런 쓸 만한 전투형 개체를 하나 만들어낼 수 있다. 내가 놀랐던 건 놈의 규모였다. 크기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더군. 놈은 그 많은 숫자로 개체를 불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개체를..........불린다고?”
“생식행위를 한다는 말이다.”
우르가 담담히 부연했다.
“현재 하루에 태어나는 군체 말단의 숫자는 약 5천이다. 매일 전투형 개체를 다섯 마리씩 만들어낸다는 소리지. 명심해라, 우리가 상대하는 군대는 놈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놈의 숫자는 지금 이 순간도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불어나고 있다.”
의식이 통합된 수백만의 군체들이 생식행위에 열중하고 있다니.
끔찍한 이야기였다.
“잠시만요, 황자님.”
아르세니오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또 적이 오고 있어요.”
장군,
이젠 전투형 개체라고 불러야 할 것들이 떼로 몰려오는 중이었다.
아까 상대했던 숫자가 서른이라면, 이번에는 족히 쉰은 되어보였다.
자연계에선 천 명에 달하는 영혼의 잠재력을 가진 개체를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처럼 우월한 개체를 생산할 수 있었다.
아르세니오가 꿈의 에사인 로켄에 의해 영웅으로 각성했다면, 하나의 중국이 만들어낸 시스템은 가히 로켄의 상위호환이라 할 만했다.
“...망할.”
나는 대검을 다시 꺼내들었다. 대검을 쥐는 것만으로도 팔이 떨어져나갈 듯이 아팠다.
아르세니오는 한 번에 두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는 정면에서 눈을 돌리지 않은 채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처럼 싸울 수 있으시죠? 한 번 호흡 맞춰봤으니까.”
그게 되겠냐.
“맡겨줘.”
나는 속마음과 달리 씩씩하게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젠 거칠 게 없었다. 몸을 가려줄 갑옷마저 내던지고 온 마당이었다.
몰려온 전투형 개체의 절반은 곤충들이었다. 놈들은 커다란 키와 단단한 외골격을 활용해 황자의 보호에 나선 전사들을 수월하게 해체하고 있었다.
“내가 놈을 보았을 때, 놈도 나를 보았다.”
황자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놈은 나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덤으로 나까지 말이지.”
“저도요.”
아르세니오가 맞장구를 쳤다. 전사들은 잠깐조차도 시간을 벌어주지 못했다. 마치 강둑이 무너지듯 전선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전사들은 머지않아 너나할 것 없이 등을 보이며 뒤돌아 달렸다.
황자는 도망치는 전사들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미 그런 것에 일희일비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초연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직 한 가지 방법이 남아있다. 군체의식을 일거에 소멸시킬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그런 신묘한 방법이 있으면 좀 더 일찍 말해다오.”
“현계에서 놈은 내 아버지와 같은 불멸자나 다름없다. 놈을 해치우려면 놈의 정신세계로 찾아가야 한다. 그곳에서는 수백 천만의 육신이 없이, 오직 벌거벗은 하나의 의식만으로 우리를 상대해야 할 테니.”
솔깃한 전략이었다. 치명적인 허점이 공존하는.
“그럴듯하긴 하다만, 어떻게 에사인의 정신세계로 들어가냐? 아까 네가 했던 것처럼 저쪽이 술법을 쓰는 걸 기다리자는 소리라면...”
“그 방법은 너무 위험하다. 게다가 놈은 다시는 그런 허점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먼저 찾아간다.”
여기서 황자의 목소리가 들뜬 듯 고조되었다.
“아까 다녀갔을 때 위치를 기억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