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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55화 (55/205)

55화. < 진실의 추 (7) >

“우티르, 그 남자 나한테 넘겨줄 수 있겠냐.”

“네가?”

“부탁하마.”

“안될 것 없지. 오늘 번 것만으로도 수확은 충분하니.”

우티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조원들은 조장의 결정에 충실히 따를 따름이었다.

암살자들이 모두 떠나가자, 료헤이가 부들거리는 손으로 힘겹게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나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어차피 남는 게 시간이었다. 이미 전황은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될 만큼 굳어졌다.

“흐흐......."

료헤이가 갑자기 실성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지?”

“내 처지가 한심해서 그렇다.”

그가 진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두 주먹으로 땅을 내려치며 피가 끓는 듯이 외쳤다.

“뭐가 대동아공영이냐, 뭐가 새로운 시대라는 거냐. 한 놈도 목숨을 걸고 싸우는 놈이 없었다. 단 한 놈도!”

그가 분해하는 이유는 알만했다. 시체가 널브러진 모양만 봐도 제대로 된 전투가 없었다는 게 드러났다.

애초부터 무리수가 잔뜩 낀 계획이었다. 중국 같은 공산권 국가도 아니고, 대명천지 21세기에 살아있는 인간을 옹립해서 에사인으로 만들겠다니. 그런 프로파간다가 먹힐 정도로 요새 젊은이들이 녹록치 않았다.

“더 분한 건 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너는 최소한 목숨 내놓고 싸울 결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네가 내게 한 말이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을 때도, 잘 때도, 싸울 때조차 내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잠시 그와의 만남을 돌이켜보았다. 몇 번 투닥거리다가 진실의 추를 걸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미안한데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말 좀 해주라.”

그가 눈을 부릅뜨며 날 노려보았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냐는 듯했다.

“너는 날더러 에사인이 둘 있다고 했다.”

“그랬었지.”

“그리고 그 에사인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맞아, 그랬었네.”

“그렇다면 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나는 천황폐하를 섬기지 않는다는 거냐?”

“아하.”

나는 그가 비련의 주인공에 빙의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진실의 추는 공격적으로 사용했을 경우, 상대의 양심을 기준으로 거짓말을 판단한다. 문제는 거짓말이라는 게 수학공식처럼 자로 잰 듯이 명확하게 나눠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료헤이는 48%의 진심으로 천황을 섬겼을 수도 있다. 나머지 52%가 거짓이라고 하여 48%가 없는 사실이 되는 건 아니었다.

설령 그가 일왕을 온 마음을 다해 믿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왕을 믿고 싶어 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거짓말쟁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렸으니 미치고 환장한다는 거지.

“그때 넌 너희 왕을 에사인으로 추대해서 아시아를 선도하겠다며 거창한 포부를 늘어놓았지. 하지만 너는 그게 가능할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확인사살을 실시했다. 어디까지나 그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억울하면 말만 해. 다시 테스트해보면 되니까.”

나는 왼손에 고속으로 마력을 집중했다. 술법을 전개한 게 아니라, 보여주기식으로 마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나는 마력으로 빛나는 손을 그에게 과시하며 엄포를 놓았다.

“대신 이번엔 진심이어야 할 거다. 아직 힘 조절하는 테크닉이 부족하거든.”

"......."

료헤이가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로 오랫동안 내 손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표정을 예의주시했다.

아주 미세했지만, 나는 그의 얼굴근육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가는 걸 알 수 있었다.

한 인간이 오랫동안 쌓아 올려온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을 포착한다는 건 정말이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테스트는 필요 없다.”

료헤이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는 마음으로 꺾이고 말았다. 전투에서 패배한 것보다 이쪽이 더 치명적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이상을 돕지 못할 것이다. 제아무리 달콤한 말로 꼬신다한들, 이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자."

나는 마력을 거둬들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치료해야지.”

“값싼 동정이라면 사양한다.”

“내 동정이 값싸다고 멋대로 단정하지 말어.”

"......."

“너희가 왜 졌는지 가르쳐줄까. 네 말을 빌리자면 신의 일에 인간이 개입하려했기에 벌어진 비극이지. 너희는 킬데인의 장난감 역할 밖에 하지 못한 거야. 늪을 신선한 시체들로 메우고, 마족이라는 별미도 맛보고, 아주 만찬을 열지 않았겠어.”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글쎄다. 여러 길이 있었겠지만, 너는 생각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않잖아. 그런 골치 아픈 문제는 네게 대동아공영이란 헛바람을 불어넣은 놈에게 남겨두라고.”

“나는...”

“안 갈 거냐?”

내가 재차 묻자, 그가 마지못해 내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나를 따라오는 료헤이에게 테일리시가 슬며시 다가갔다. 그녀는 번뜩이는 검을 그의 목에 들이대며, 나를 대할 때와는 딴 판의 목소리로 말했다.

“수상한 짓 하면 죽일 거야.”

그녀는 오데르의 검 중에서도 가장 언행일치가 되는 형제였다. 술법을 포기했다고 해서 그 잔혹함이 어디 가진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완전히 패퇴했다. 살아서 돌아간 자들이 태반이긴 했으나, 언론통제로도 수습하기 힘든 숫자의 사상자를 낸 이상은 당분간 이쪽을 넘보지 못할 것이다.

며칠 동안 나는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테일리시에게 축복을 내려주기도 해야 했고, 일본군이 두고 간 장비를 노획하는 걸 돕기도 했다.

전후처리에 정신이 없을 때, 베이스캠프로부터 난데없는 전령이 찾아왔다. 특전사 그 자체였던 청년, 황승연 중사였다.

“단결!"

그는 성문이 열리자마자 내게 우렁차게 경례를 붙였다.

나는 그가 타고 온 지프차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우리는 만나지 않기로 했었다. 캠프에서 먼저 나를 찾아 나섰다는 건 그럴만한 큰 일이 벌어졌음에 분명했다.

설마 마그나크록이 재침공해온 건가?

아니면 킬데인의 양동작전?

“대령님으로부터의 급보입니다. 곧장 베이스캠프로 돌아오시라고 하십니다. 건국준비위원회 위원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건국준비위원회?”

“예, 그렇습니다.”

황승연 중사가 한층 까무잡잡해진 얼굴을 끄덕였다.

“총독령을 설립하기 위해 도움을 주실 분들입니다. 가시면 더 자세히 아시게 될 겁니다.”

아무래도 일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어가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지체할 게 아니었다. 나는 카룩카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카룩카이, 내가 없는 동안 이곳을 잘 부탁하마.”

“물론이다.”

“저기, 이분은..”

황승연 중사가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테일리시가 자연스럽게 내 뒤를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검은 로브와 뚜껑같은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있어서 수상하기 짝이 없어보였다.

“내 호위역이야.”

“알겠습니다.”

테일리시를 데려가도 될지는 나도 의문이었다. 그녀는 현대문명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그러나 목숨 걸고 날 지키겠다는데 마냥 밀어낼 수도 없었다.

일단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차수진 박사에게 부탁해서 크록들이 받는 사회화 커리큘럼에라도 넣어봐야겠다.

도로는 내가 떠나왔을 때보다 훨씬 더 정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울창한 밀림 사이를 쾌적하게 지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는 더 이상 캠프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규모로 성장해있었다. 우리가 통제하는 땅이 더 넓어진다면, 아마도 이곳이 수도로서 기능하게 될 듯했다.

지프차에서 내린 나를 반겨준 건 박문식 대령이 아니라 처음 보는 양복신사들이었다. 그들은 이 캠프에서 테일리시만큼이나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경민대 법학과 교수 김형식입니다. 이번에 건준위 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나는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학자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는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건준위 부위원장 장효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장효진은 악수를 나누면서도 눈으로도 웃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를 가진 사십대 여성이었다. 나이는 위원장보다 한참 아래연배였으나, 이런 중책을 맡을 정도니 상당한 엘리트임에 분명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비슷비슷했다. 교수, 전직 국회의원, 판검사, 변호사 등 사회 지도층이면서도 법조계 전문가들이 많았다.

“큰 전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여독을 푸시는 동안 저희는 회의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전투도 전투인 데다가 테일리시에게 남은 힘을 쏟아버린 탓에 피로감이 상당했다.

나는 건준위 위원들과 작별한 후 곧장 숙소로 향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사람들도 만나고 나름의 계획도 짜보려고 했으나, 나는 베개에 머리를 대는 순간 의식을 잃어버렸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해가 이미 중천이었다.

나는 건준위 위원들을 휴게실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은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거나 신문을 읽고 있었다. 심지어 구석에서 장기를 두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아하니 날 죽치고 기다리는 게 그들의 유일한 일인 듯했다.

“위원장님.”

나는 김형식 교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가서 말씀을 들어보죠. 오래 기다리셨을 테니까요.”

“좀 더 쉬시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보시다시피 팔팔합니다.”

“젊은 분이라 그런지 기운이 넘치는군요, 허허허.”

김형식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들과 함께 새로이 지어진 관청으로 이동했다.

관청 회의실에는 큼직한 타원형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우리가 어디에 앉을지도 미리 정해져있었다. 각자의 보직이 명패에 새겨져 테이블 위에 세팅이 된 상태였다.

나는 내 자리가 어디인지 찾아 헤맸다. 과장 직급이 갈 법한 자리엔 도무지 내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김형식 교수가 다가와 테이블의 상석을 가리켰다.

- 에신 총독령 총독대행 박봉팔

높으신 분들의 책상에 흔히 놓이곤 하는, 봉황 자개명패에 내 이름과 직함이 떡하니 새겨져있었다.

김형식 교수가 눈웃음을 지으며 설명을 해주었다.

“총독대행께서 부재중이실 때 임용이 재가되었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부득이하게 소식을 전해드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나는 임명장이 내려왔을 때 나보다도 더 기뻐했을 한 사람을 떠올렸다.

박병철, 그 양반의 입이 지금쯤 얼마나 근질거리고 있을지.

나는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의자가 얼마나 푹신하고 깊던지 일본군과 치고박던 늪보다 더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배울 만큼 배운 양반들 앞에서 상석을 차지하고 있으려니 이마빡이 근질거리기도 했다. 이 느낌은 빠른 시일 내에 익숙해져야만 하겠지.

"크흠."

나는 마이크에 바람을 불어넣어보았다.

헛기침을 했을 뿐인데도 수십 명의 시선이 자동적으로 내게 날아들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굳이 암살자의 인상훈련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의문을 품은 자들, 내게 잘 보여야겠다고 전의를 불태우는 자들, 나라는 존재 자체가 못마땅한 자들.

부위원장 장효진은 마지막 케이스에 해당되었다.

“배포자료입니다.”

정장차림의 젊은 여성이 두꺼운 서류묶음을 한 부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비서로서 전속이 된 것 같은데, 역시나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나는 우선 서류의 제목부터 확인해보았다. 제목에 곧 내가 할 말이 들어가 있었다. 나는 마이크를 쥐고 모두를 대표해 발언했다.

“그럼 제1회 건국준비위원회 총회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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