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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54화 (54/205)

54화. < 진실의 추 (6) - 유료 시작입니다. >

“...어라?”

나는 잠시 당황하고 말았다.

성벽까지 갈라놓을 생각은 없었다. 명백한 힘 조절 실패였다. 실전에서는 처음 써보는 기술인지라 힘 조절 노하우라는 것 자체가 존재치 않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워낙 깔끔하게 잘라낸 탓에 성벽이 주저앉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는 거.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라드를 쳐다보았다. 그는 눈물의 흔적을 슥슥 닦아 없애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으냐?”

“네, 괜찮습니다.”

“용기있는 결단이었다. 네 덕분에 일이 잘 마무리가 되겠구나.”

“아닙니다. 저야말로 은인께 큰 신세를 졌습니다.”

라드가 어른스럽게 말했다.

기엔이 지은 죄는 너무나도 컸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정도였다. 라드는 한 가문의 가주이자 영지를 이끌 책임자로서, 공적인 입장을 정리하기로 굳게 결심한 듯했다.

나는 라드의 머리카락을 헤집어놓은 뒤, 뚫어놓은 길을 따라 통로를 걸어 나갔다.

전황은 이제 일방적으로 유리해진 듯했다.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성벽 위로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킬데인의 군세는 스트리아 연합군에게 박살이 나는 중이었다.

물론 킬데인 본인에게는 이기던 지던 손해를 볼 게 없는 전쟁이었다. 시체는 어디에서나 만들어지기 마련이고, 부패를 축출할 수 없는 한 그의 힘은 영원할 테니.

펄럭.

갑자기 커다란 새가 성벽 위에 내려앉았다. 양손검을 찬 전사가 등자를 딛고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정기호였다.

하마터면 그를 몰라볼 뻔했다.

그는 황국 귀족의 예복을 입은 데다가 헤어스타일까지 바꾸었다. 옆머리는 박박 깎고, 뒷머리는 땋아서 아래로 늘어뜨린 채였다.

“간만이다.”

그가 내게 아는 척을 했다. 옷과 머리만 바꾸었을 뿐인데 사람 자체가 변한 것만 같았다.

“머리가 왜 그 모양이 됐냐? 귀화라도 하게?”

“귀족들을 설득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효과가 확실하긴 했네.”

“라힐.”

“왜?”

“영주들은 내가 스트리아령을 통치한다는 조건으로 군대를 보냈다. 그들은 애초부터 내 동생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생의 입장을 이용하는 것 말고는 그들을 설득하는 게 불가능했다.”

예상은 했었다. 듣도 보도 못한 마족놈이 튀어나와서 군대를 보내달라고 우기면 누가 들어주겠냐고.

“그러면 네가 대영주를 해야겠네.”

“문제는 내가 더 이상 그런 감투에 관심이 없다는 거다.”

정기호가 엷게 웃었다.

“동생이 날더러 망나니라고 불렀지. 맞는 말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감투를 쓰게 되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골칫덩이가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너무 거슬려서 참을 수 없게 될 때 오데르가 찾아 오는 거지.”

“잘 알고 있구나.”

“지금까지 너를 지켜보아온 바로도 그렇다. 너는 나와 달리 감투를 거절하는 법이 없었지만, 네게는 비전이 있지. 나는 결코 너 같은 인간이 될 순 없다.”

정기호가 예복의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주머니에서 나온 건 돌돌 말린 시가 한 개비였다. 그는 대검 끄트머리에 마력을 집중시켜 시가에 불을 붙였다. 그는 시가를 폼 나게 꼬나문 채 전장을 태연자약하게 내려다보았다.

“격투기선수가 그런 거 펴도 되냐?”

“축구선수도 피우는데 뭐.”

“그러면 할 말 없고.”

정기호가 전장 위로 뿌연 니코틴을 실어 보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대영주가 되어야만 한다.”

“동생은 어쩌고?”

“프로젝트는 어쩔 거냐고 물어야지.”

“물어보려고 했어.”

“의자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건 어디까지나 날 죽인 놈이 누구인지 찾아내서 정의를 바로세울 때까지다.”

정기호가 시가를 성벽 아래로 튕겨버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재가 바람에 휘날려 흩어졌다.

“타라.”

나는 그와 함께 탈것 위에 올라탔다. 6인승 안장이라 꽤 여유가 있었다.

그는 나를 태우고 일본군 포격진지로 날아갔다. 진지는 휑하기 그지없고, 대부분의 차량과 무기들이 배치되었을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버려져있었다.

“네 형제들이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을 거다.”

“고맙다.”

내가 땅에 착지하자, 그는 기수를 돌려 연합군의 선봉을 향해 날아갔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형제들은 정기호가 의뢰한대로 집요하게 장교만을 노렸던 모양이었다. 보이는 시체라고는 장교 견장을 단 자들뿐이었다.

일본군은 이번 전투로 심대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전투에서 진 건 부차적인 일이었다. 싸우다 보면 질 수도 있다, 문제는 살해당한 방식이었다. 정정당당한 싸움이 아니라 암살을 당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잘 때도 뒤통수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라힐님이십니까?”

누군가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이졸데의 측근인 라크릭이 내 형제에게 제압당한 채 목에 칼이 겨눠져있었다.

“라크릭, 네가 여긴 웬일이지.”

“대영주님의 명을 받고 마족의 주술구를 확보해두기 위해 왔습니다. 그나저나 이분 좀 말려주십쇼. 저는 딱 봐도 마족이 아니지 않습니까?”

“네가......... 라힐이라고?”

라크릭에게 검을 겨눴던 형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작고 조용한, 무척 여성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녀가 검을 거두며 내게로 사박사박 걸어왔다. 그녀는 내 앞에 서자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었다.

스르륵.......

바다처럼 파란 머릿결이 부챗살처럼 펼쳐졌다. 동그란 홍채는 사파이어가 반짝이는 듯이 푸르게 빛났다.

전체적으로는 작은 체구에 귀여운 인상이었으나, 왼쪽 뺨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흉터가 부조화스러운 인상을 자아냈다.

테일리시.

내가 죽고 나서 많이도 울었다던 여자.

아직도 이렇게나 앳되어 보이는 걸 보면 정말로 시간이 안 흐르기는 했나보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며 , 다시 한 번 내게 물었다.

“네가 라힐이야?”

“그래, 반갑.......크헉!”

그녀가 난데없이 오데르의 창을 시전했다. 대검을 꺼내들 틈조차 없었기에, 나는 손바닥으로 간신히 검신을 밀쳐냈다.

그녀는 더는 공격하지 않았다. 마력으로 진동하는 검을 서서히 거둬들이더니, 내게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라힐이 맞나보네.”

“그렇다니까.”

“왜 다시 왔어.”

그녀의 푸른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그녀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이 너무나도 절실했다.

그녀는 나를 짝사랑했다는 듯했다. 가정법인 이유는 한 번도 그녀가 내게 본심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이미지라고는 그림자처럼 내 뒤를 붙어 다니던 모습과, 악착같다고 여겨질 정도로 열심히 살행을 수행하던 게 전부였다.

“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이런 생각을 했어. 오데르고 뭐고 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그저 네가 살아있으면 좋았겠다고.”

그녀는 오데르를 부정했다.

그리고 내게 고백했다.

전장의 한가운데, 일본군 장교들의 시체가 널려있는 곳에서.

"......."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줘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녀가 내 소중한 형제임엔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를 향한 감정의 온도차가 너무나도 컸다. 수십 년간 떨어져있던 시간이 내게만 그 간극을 더 벌려놓은 듯했다.

내가 말이 없자, 그녀가 서글프게 웃었다.

“미안해. 나는 분위기를 못 읽거든. 항상 혼자 상상하고, 앞서나가고.”

“테일리시...”

“그러니까 한 번만 더 앞서나갈게.”

그녀가 오른손에 마력을 일으켰다. 그녀는 마력이 충만한 손으로 오른 가슴을 덥썩 움켜쥐었다.

나는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뭘 하려는지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테일리시, 멈춰!”

“그만 꺼져, 이 쓸모없는 놈아!”

그녀가 악이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그녀의 상체가 뒤로 확 젖혀지며, 오데르가 부여한 마력이 줄줄이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신성한 맹약이 해지되었다.

나는 망연자실하여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이 전부인 세상에서 술법을 포기한다는 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우르술라가 날 보고 얼마나 놀랐을지, 다른 사람이 이러는 걸 보니 역지사지로 체감이 되었다.

"하......."

그녀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하하하.”

그녀는 이를 드러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진작 이랬어야하는데.”

“테일리시, 왜 그랬어.”

내가 책망하듯 물었다. 그녀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반짝이는 빛 말고도 현대인이 가지지 못한 게 하나 더 깃들어있었다.

광기.

“네가 에사인을 향한 여정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어. 그렇다면 네겐 널 따르고 찬양할 사람이 필요할 거야. 난 그걸 누구보다도 더 잘 할 수 있어.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해줬거든, 사랑보다 강한 힘은 없다고.”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는 널 떠나지 않겠어. 우리는 이제부터 시작인 거야, 라힐.”

“.......네가 이럴 걸 우르술라도 알고 있니?”

“큰언니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어.”

아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의미가 이런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일은 저질러지고 말았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테일리시 정도 되는 전사가 합류하는 건 결코 손해를 볼 일이 아니었다.

물론 평생 연마한 마력을 방금 깡그리 날려버리긴 했지만, 잃은 힘은 내가 나눠주면 그만이었다.

암살자 시절 그녀가 보여준 천부적인 재능과 잔혹한 결단력을 생각한다면 본래 실력을 되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녀는 할 말을 다했는지 다시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마치 집을 찾아 들어가는 소라게 같았다.

“.......저는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구석에 서있던 라크릭이 뻘쭘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

“가봐. 대영주께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그러고.”

“알겠습니다.”

라크릭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다른 인물들이 무리지어 등장했다. 옛 동료 우티르가 이끄는 암살조였다.

그들은 찢어진 와이셔츠를 입은 삼십대 남성을 연행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를 한 눈에 알아보았다. 유약한 외모와 달리 남다른 강인함을 지녔던 남자. 료헤이가 틀림없었다.

그는 얼마나 다친 건지 온 몸에 성한 구석이라고는 없었다. 제때 적절한 처치를 하지 않으면 출혈로 죽을지도 몰랐다.

“여어, 라힐. 여기서 또 보네.”

우티르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 사람은 뭐냐?”

“아, 이거?”

그가 료헤이를 내려다보았다.

“마족이다. 생포하는 게 만만찮았지. 못해도 전사단 단장쯤 되는 놈일 것 같은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의뢰받은 건 장교 모가지가 전부잖냐. 그래서 의뢰주한테 데리고 가서 돈을 쳐줄지 알아볼 작정이다.”

료헤이가 팅팅 부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할 말이 있다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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