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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42화 (42/205)

42화. 늪 (5)

다음 날 나는 시내 모처 카페에서 소미와 만났다. 그녀는 선글라스와 까만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하늘색 머리카락이 워낙 눈에 띄어 정체를 숨기긴 힘들어보였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옆자리를 가리키며 반갑게 팔을 흔들었다.

“오빠, 여기요!”

나는 그녀와 처음 카페에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그녀와 편한 오빠동생 사이로 만나게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주문할까요?”

“너는?”

“저는 딸기주스요.”

“그럼 나도 그걸로.”

소미는 딸기에 대한 확고한 취향을 가진 듯했다. 나는 뭐든 시원한 음료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역시 성공한 거죠?”

그녀가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얼떨결에 그렇게 됐네.”

“봐요, 오빠라면 오래 안 걸릴 거라고 했잖아요.”

그녀가 뿌듯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술법을 만들어내기 전과 만들어낸 후의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단지 전투력만이 올라간 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근본부터 바뀌었다.

가령 나는 길거리를 걸으며 몇몇 사람들의 악취를 맡을 수 있었다. 실존하는 악취가 아니라 죄악이 풍겨오는 냄새였다.

“그나저나 네가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나는 그녀에게 어제 벌어졌던 일들을 짧게 요약해주었다. 김신우가 어떻게 죽었는지, 어떻게 다르마알에게 귀의하게 되었는지, 한국에 다르마알을 추종하는 세력이 어둠 속에서 암약중이라는 이야기 등.

하나같이 심각한 것들이었으나, 소미는 긍정적인 분위기를 잃지 않았다. 그녀는 내 설명이 끝나자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역시 그렇게 나오네요.”

“알고 있었어?”

“아니요, 하지만 그 다르마알이 상대라면 당연한 것들이 아닐까 싶어요. 그쪽은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게 목적이잖아요.”

“그런 것 치고 김신우는 너무 쉽게 버려진 패 같더라.”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인데요, 저쪽은 오빠랑 저를 과소평가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저랑 오빠 둘 다 에사인이 되어가는 중이라고는 꿈에도 모르고 있겠죠. 고작해야 암살자 한 명이 상대라고 생각하니까 막나가는 거예요. 눈앞에서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면 오빠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알고요.”

“하긴.”

누구도 암살자에게 지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 건 전적으로 힘을 얻어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러는 건 어떨까요?”

소미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다르마알의 비밀조직 있잖아요. 더 커지기 전에 확 쓸어버리는 거예요. 방심하는 틈에 선제공격을 하는 거죠.”

“내가?”

“제가요. 오빠는 포탈 안에서 할 일이 많으니까요.”

나는 소미가 눈을 반짝이는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줄곧 싸움에서 배제되어온 탓에 좀이 쑤신 모양이었다.

어떨 때는 귀엽고, 이럴 때는 무섭고, 알다가도 모를 여자였다.

그러나 소미가 나서준다면 판도가 굉장히 유리해지는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그녀는 에사인을 향한 여정에서 나보다도 앞서나간 존재였다. 설령 우리나라에 다르마알의 아바타가 와있다고 한들 그녀의 적수가 될 순 없었다.

“그래도 너 혼자는 위험하지 않을까. 싸움이라는 게 워낙 변수가 많으니.”

“왜 제가 혼자라고 생각하세요?”

“응? 그야...”

“이거 보시겠어요?”

소미가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 한 장을 보여주었다. 팬인 듯한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녀를 둘러싼 단체사진이었다.

곧 나는 익숙한 얼굴을 하나 찾아낼 수 있었다. 예전에 소미의 스토킹을 하고 다니던 사생이었다. 살이 그때보다 많이 빠져있어서 몰라볼 뻔했다.

“제 사제단이에요.”

그녀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사제단?”

“네. 저에 대한 마음이 각별한 분들께 힘을 나눠드리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팬심에 기대기만 해서는 오빠한테 따라잡힐 테니까요. 이 일을 하느라 올해 투어도 연기될 뻔 했지 뭐에요.”

“아하.”

그녀는 팬심을 조금씩 종교적인 열정으로 바꿔나가는 중인 듯했다. 나는 구면인 사생을 못미더운 눈으로 살펴보았다. 몰래 숨어서 연예인 노출사진이나 찍던 놈이 얼마나 정신을 차렸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에사인과 신성한 계약을 맺는다는 건 영혼의 종속을 의미했다. 그는 원하던 원치 않던 그가 모시는 에사인의 색깔로 물들게 될 것이다.

“싸우는 건 그렇다 치고, 그놈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선제공격을 하려고? 듣자하니 그쪽은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움직인다더라. 국정원 사람들도 추적이 안 된다는 것 같던데.”

“아이, 오빠가 그런 말씀 하시면 어떡해요.”

“응?”

“누가 오빠를 찾아내서 외교부로 데려왔겠어요?”

“그게 너였니?”

“당연하죠. 저 말고 주술사가 아무도 없는데.”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이 손가락으로 내 팔뚝을 쿡 찔렀다.

“...알았다. 여긴 네게 맡겨보자.”

“믿어주세요, 총독님.”

그녀가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를 했다.

“대신 그것만 가르쳐주세요. 아약님 소설이 있다는 사이트 주소요. 제 술법으로는 마력을 가진 사람밖에 찾아내지 못하니까요.”

“잠깐만.”

나는 휴대폰으로 글피아 앱을 켠 뒤 아약의 이름으로 검색해 결과창을 소미에게 보여주었다.

“어라?”

소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오빠, 이 소설 아약님이 쓰시던 거 맞아요?”

“맞아, 환생 권하는 사회.”

“근데 왜 새 글이 올라와있어요?”

“그럴 리가...”

“보세요, 여기.”

그녀가 손가락으로 화면 한 군데를 가리켰다. 정말로 새로운 글이 올라와있었다. 본편이 아니라 공지사항이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공지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 환생 권하는 사회를 읽어주신 구독자 여러분들께

여러분의 아낌없는 응원 덕분에 환생 권하는 사회가 무사히 1부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2부는 다르마알로 각성하여 이세계를 정벌하는 주인공의 호쾌한 일대기가 펼쳐집니다.

날이 덥습니다. 몸조심하시고, 곧 2부에서 뵙겠습니다.

“......도발이네요.”

소미가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자기 따르는 사람을 헌신짝처럼 내다버린 주제에 잘도 다시 나타났네요. 이놈은 에사인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어요.”

대부분의 에사인들은 인격신이라, 흉신과 선신을 나누는 기준이 애매했다.

이럴 때 확실한 기준이 되는 것들 중 하나가 신도들을 어떻게 처우하냐는 것이었다.

다르마알처럼 자기 신도를 정탐이나 할 용도로 소모해버린다면 그보다 더 흉신이라는 증거가 없다.

“오빠는 이런 놈한테 신경도 쓰지 마세요. 여긴 제가 쓸어버릴 테니까요.”

“그래, 믿어보마.”

소미는 진심이었다. 나는 잠시 불길한 상상을 해보았다. 불타는 도시를 배경으로 적들의 머리통을 깡통 따듯 따버리는 아이돌 소녀의 모습을. 그런 사진이 찍힌다면 올해의 포토제닉은 따 놓은 당상이겠지.

북쪽으로 도로를 내는 작업은 크록의 숫자가 불어날수록 탄력이 붙었다. 크록의 머릿수가 이백 명을 넘기면서부터는 그야말로 대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속도로 길이 나기 시작했다. 해머를 들려놓은 크록은 한 마리 한 마리가 중장비와 맞먹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작업능률을 자랑했다.

길을 따라 전초기지도 잇따라 지어졌다. 북쪽을 향해 인력과 물자들이 줄줄이 옮겨지는 가운데, 현재 내가 위치한 곳은 가장 최북단에 자리한 전초기지였다.

“박과장!”

박문식 대령이 상황실 문을 격하게 열고 들어섰다. 그는 답지 않게 다소 들뜬 모습이었다.

“방금 정찰팀이 복귀했다네.”

나와 정기호, 그리고 대기중이던 장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리는 길을 개척하며 정찰병을 계속 북쪽으로 올려 보내는 중이었다. 전쟁중인 황국에겐 도로를 내거나 사절단을 보낼 여력이 없으니, 두 국가의 접점을 찾는 일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까?”

“직접 보게나.”

그가 큼직하게 뽑아낸 사진 여러 장을 탁자 위에 펼쳐보였다.

사진에 담긴 건 족히 인구 십만은 넘을 법한 커다란 도시였다. 돌로 올린 성벽이 도시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성벽엔 일정한 간격으로 망루가 솟아있고, 망루 꼭대기엔 비익족을 위한 발판이 촘촘하게 박혀있었다.

거인족이 드나드는 커다란 성문도 눈에 띄었다. 성문 현판에 걸린 글씨는 너무 멀어서 식별이 불가능했다.

“어떤가, 어디인지 알아보겠나?”

나와 정기호가 동시에 눈을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네가 알겠지, 넌 남쪽에서 살았으니까.”

“난 내 땅을 떠나본 적이 없다.”

“너 귀족이 맞긴 한 거냐?”

“귀족이니까 땅을 떠나본 적이 없지. 아쉬울 게 없었으니.”

재수 없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반박을 할 말이 궁했다. 박문식 대령이 두 번째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도시가 아니었다. 도시 앞 벌판에 큼직큼직한 말뚝들이 박혀있었다. 개수가 워낙 많아 흡사 고슴도치를 연상케 했다.

“이건 알아보겠다.”

정기호가 사진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징벌용 말뚝이다. 다른 지역도 우리와 같은 말뚝을 쓰는지는 몰랐는걸.”

세 번째 사진은 말뚝을 좀 더 가까이서 촬영한 것이었다.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정찰병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을 듯했다.

말뚝마다 말라비틀어진 시신이 매달려있었다. 표정이 워낙 고통스러워 단지 사진일 뿐인데도 시신이 받은 고통이 간접적으로 전달되어왔다. 발치에는 팻말이 붙어있었는데, 이 글자는 읽을 수가 있었다.

- 군주의 땅을 탐낸 죄

- 살인한 죄

- 거짓말을 한 죄

- 신성한 묘를 더럽힌 죄

- 상기한 죄를 여섯 번째 권능을 대신하여 심판한다.

“용케 말뚝으로 끝났군.”

정기호의 소감이었다. 카룩카이는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이 목울대에서 꾸륵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희 비늘 없는 자들은 왜 먹지도 않을 고기를 걸어놓기만 하는지 모르겠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려는 용도지. 보고 겁을 먹으라고.”

“하지만 죽으면 고기일 뿐이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긴 해.”

“박과장, 대체 이 많은 시체들이 뭘 의미하는 건가? 에신 사람들이 평화적이라는 소리를 들은 바는 없지만,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여긴 아마 전쟁중일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숫자입니다.”

울토르가 남겼던 말이 기억났다. 서부전선을 뒤로 물리고 내려왔다고.

마법과 술법이 난무하는 전장의 특징은 전선을 특정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군과 대군이 벌판에서 맞붙는 회전이 있는가하면, 후방에서는 은밀기동을 하는 잠행부대나 비행부대끼리의 활극이 펼쳐지곤 했다.

“황군은 포로를 잡지 않나?”

“꼭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이곳의 군주는 심리전에 능한 자인 듯합니다. 결국 전쟁도 사람이 하는 것이니, 사기를 꺾어놓는 것만큼 효과적인 무기가 없죠.”

“하지만.......”

대령은 동의할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익힌 전술교범에는 이런 식의 전법이 나와 있지 않았을 테니.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시체걸이라고.”

“그.......좀비 말인가?”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신 사람들은 시체가 다시 걷는 걸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발목을 잘라 매달아두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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