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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41화 (41/205)

41화. 늪 (4)

휘몰아치던 마력이 점점 형태를 갖추어갔다. 오직 나만을 위하여 세상의 일부가 변하고 있었다.

질서가 뒤틀리고, 혼돈이 묶이고, 이윽고는 세상에 없던 법칙이 만들어졌다.

“.......”

나는 창제된 술법의 원리에 따라 마력을 순환시켜보았다. 그림자술법과는 완전히 궤가 달랐다.

독자적이고, 독창적이기도 했다.

강력하였으며, 무궁한 가능성이 담겨있기도 했다.

나만의 술법이 만들어지자 비로소 에사인을 향한 여정을 떠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마치 첫사랑을 시작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올랐다. 단순히 마력이 늘어난 것만을 확인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다르마알이여, 왜 나를 농락한거지. 나는 계약을 하지 않았나........”

김신우가 구석에서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흉신의 약속이란 딱 그 정도 무게였다.

다르마알은 내가 진짜로 술법의 힘을 잃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쓸모없는 잔챙이 하나를 꼬드겨 미끼로 던져본 것이다.

내가 김신우에게 죽으면 노가 난 것이고, 김신우가 죽어도 손해 볼 건 없다. 내 카드를 한 장 까발린 것이니.

“김신우 박사.”

그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엔 더 이상의 악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 되는군요.”

그의 죄명은 살인미수다.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었으나, 소미나 정기호라면 그를 살려줬을 것 같긴 했다. 나약한 패배자를 죽여서는 아무런 영예도 얻을 수가 없으니.

내 관점은 조금 달랐다. 나 같은 암살자도 갱생이 가능하다면, 그에게도 다음 기회라는 게 존재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게 내 오래된 지론이었다.

나는 일단 그의 반응을 지켜보기로 했다.

“미안합니다,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습니다.”

김신우가 무릎을 꿇으며 쿵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바닥에 찧었다.

쿵, 쿵, 쿵...

그는 이마에 피가 맺힐 때까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제가 뭐라도 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착각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는 좆도 아닌 놈이었습니다!”

그는 절실해보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무슨 짓인들 못하겠냐만.

“어쩌다 다르마알과 연이 닿게 된 겁니까?”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핏발이 선 눈에 광기가 깃들어있었다.

“저는 어떻게든 술법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당신뿐만이 아니라 술법을 알 만한 사람이다 싶으면 누구라도 도움을 구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벌레 보는 듯한 냉대뿐이었죠. 저는 온 인터넷을 이 잡듯이 뒤지다가 우연히 아약, 다르마알님이 쓴 소설에 대해 듣게 됐습니다.”

“그래서요?”

“저는 소설의 내용대로 혼돈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처음에는 프로젝트에 대한 비밀을 빼돌리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이 방법은 반응이 좋지 않아 아주 작은 혼돈밖에 만들어낼 수 없었습니다.”

엘리시아와 소미를 촬영해서 인터넷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역시 그건 김신우의 소행이 맞았다.

“그렇지만 다르마알님은 제 작은 정성마저 알아주셨습니다. 곧 다르마알의 사제를 자처하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그 사람은 당신과 동류였습니다. 환생자였고, 아주 강한 술법을 다뤘죠. 그 사람을 통해 저는 정식으로 신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환생자에 주술사라고요?”

“예.”

“그 사람이 누굽니까?”

“모릅니다. 제게 허락된 건 오직 목소리뿐입니다. 하지만 그를 만났고, 그로서 제가 다르마알님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만큼은 똑똑히 기억합니다. 마력이 메마른 영혼을 적시던 쾌감을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이 힘이 너무 좋습니다.”

그가 눈알을 위로 까뒤집으며 말끝을 흐렸다.

다르마알이 부여한 마력은 상당히 중독적인 듯했다. 다르마알이 세를 확장해가는 방식이 마약조직과 유사한 것 같기도 했다. 일단 맛보기로 마력을 조금 나눠주어 길을 들인 후, 다음부터는 힘에 도취되어 스스로 구걸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당신은 쓸모가 없겠군요.”

내가 냉정하게 말하자 그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마, 말씀드릴 게 더 있습니다! 절 회유한 자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움직입니다. 그 집단엔 저처럼 소설을 읽고 감화된 사람뿐만이 아니라 당신 같은 환생자들도 많습니다. 주술을 배운 사제들.......그들은 조직을 만들어서 이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작당하고 있습니다!”

“들은 게 목소리밖에 없다더니 상세히도 알고 계시네요.”

“예, 아쉽게도 저는 듣기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뛰어난 두뇌로 추론한 내용입니다. 그 사람은 제게 더 큰 혼란을 일으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야만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요. 하지만 위로 올라간다는 건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겠습니까?”

그럴듯했다.

뛰어난 두뇌 어쩌구만 빼놓는다면.

“미안하지만 추론 따위나 들을 정도로 한가하지가 않습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으시면 이쯤 합시다.”

그가 사색이 되어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그 사람, 다르마알의 사제, 외국인이었어요! 억양이 어눌한 게 우리 말씨가 아니었습니다.”

“그랬던가요?”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역시 마른 걸레도 쥐어짜면 물이 나오는 법.

“그럼 어떤 나라인지도 아시겠습니까.”

“서양인인 것 같았습니다. 그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황국과 전쟁중인 나라 중에서 발음상 서양으로 분류될 수 있는 나라들은 미국과 영국, 멕시코, 러시아, 4개국이다.

그중 한 나라가 국내에서 점조직 형태의 테러집단을 운영하고 있다는 건데, 이건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그 정보는 쓸모가 있겠군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렇게 죽어선 안 됩니다. 아실지 모르지만 제가 없으면 프로젝트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저는 만능 재생세포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연구진입니다!”

“차수진 박사 의견은 다르던데요. 당신은 하는 게 없이 이름만 올리고 있다던데.”

“그년이 나불대는 말을 그대로 믿으시면 안 됩니다. 그 년은 연구가 아니라 정치를 하는 중입니다. 학자라는 년이 궁둥이를 흔들면서 아양을 떠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죠.”

김신우의 눈빛에 언뜻 살기가 비쳤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 장인은 국토교통부 차관 김진호입니다. 와이프는 검찰국 연구검사고, 처남은 법무법인 태양에 소속된 변호사입니다.”

“.......그래서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만큼 제가 쓸모가 많다는 의미로 들어주시면 됩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는 목도리도마뱀이 주름을 펼치듯 내게 자기 연줄을 과시하는 중이었다. 떠드는 소리만 듣고 있노라면 협박의 주체가 나에게서 그로 바뀐 듯했다.

그가 처치곤란인 이유와 인맥이 영 무관하진 않았다. 이래나 저래나 그는 프로젝트에 한 발 담그고 있는 인물이었다.

“좋습니다. 당신이 쓸모를 입증했으니, 기회를 한 번 드리는 게 도리겠죠.”

나는 그의 어깨를 붙들어 자리에서 일으켰다. 그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맺힌 눈으로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젠 다시는 주제 넘는 자리를 넘보지 않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약속을 해주셔야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하겠다고.”

“예, 그러겠습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붙든 채 마력을 끌어올렸다. 술법은 발동되는 징후가 거의 없다시피했다. 마치 지뢰 같았다. 은밀하게 상대의 마력장 안으로 침투하여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이제 공은 그에게로 넘어갔다.

진실의 추.

발동 메카니즘은 간단하다. 술법이 걸린 후 내게 거짓을 고하면 죽거나 다친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이란 내가 아니라 말하는 자를 기준으로 했다.

내가 그에게 내릴 벌은 두 팔을 잃는 형이었다. 피에는 피, 눈에는 눈, 신체훼손을 골자로 하는 에신의 법을 따라서.

진실을 말한다면 두 팔은 무사하겠지만, 내가 그에게 요구할 것은 다르마알을 포기하라는 선서였다. 주술의 힘을 잃은 살인미수범이 갈 곳이란 감옥밖에 없다.

둘 중 뭘 택하더라도 목숨은 부지할 테니 불만은 없겠지.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절대 거짓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예, 결단코 사실만을 말하겠습니다.”

“맹세하십니까?”

“제 명예와 가족을 걸고 엄숙히 맹세합니다.”

“좋습니다. 김신우 박사, 당신은 술법을 다룰 자격이 없음을 증명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다르마알의 힘을 포기하겠다고 약속하세요. 약속을 하고, 이대로 뒤돌아서서 프로젝트를 포함하여 에신과 관련된 모든 일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는 프로젝트를 떠나겠습니다.”

그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만 가도 되겠습니까?”

“아직 술법을 포기할지를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아, 그랬군요.”

그가 활짝 웃었다. 마치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저는 다르마알의 힘을 포기합니다.”

퍼억.

그가 말을 마치는 순간이었다. 그의 뱃가죽이 터지며 내용물이 바닥으로 왈칵 쏟아졌다. 나는 그에게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커어억.......”

그는 자신이 흘린 내장 위에서 꿈틀거리며, 피거품이 가득한 입술을 뻐끔거렸다.

“어, 어째서.........”

나도 영문을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다르마알이 심어둔 주술적인 폭탄이 발동한 듯했다. 발동어는 아마 김신우가 말한 말 그대로였겠지.

잠시 후, 시간차를 두고 내 술법이 발동했다. 그의 팔이 급속도로 말라 비틀어지더니, 초고속으로 쪼그라들어 결국엔 텅 빈 소매만이 남고 말았다.

나는 가만히 선 채 그의 눈에서 서서히 생명의 빛이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나는 그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주어진 권력을 놓기엔 자기애가 너무 강한 사람이었다. 술법이란 권력을 대한민국 사법부가 심판하거나 격리하지 못하는 한, 그는 결국 내 손에 죽을 운명이었을 것이다.

나는 피 묻은 코트를 벗으며 대포폰을 꺼냈다. 박병철은 이번에도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 좋은 소식이 있나?

- 뒤처리가 좀 필요하게 됐습니다.

방 상태가 난장판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들어올 때도 엉망이었는데 이젠 시체까지 더해지고 말았다.

- 주소를 부르게, 전문가들을 보낼 테니.

- 믿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 국정원이야. 우리와 한 배를 탔잖나.

- 그렇군요.

- 그 건은 어떻게, 마무리가 됐고?

- 개인적으로는 원치 않았던 결말입니다. 보신욕보다 더한 권력욕이 있기는 하더군요.

- 날 보고도 모르겠나, 이 사람아.

장관이 기분 좋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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