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망명자 (3)
“아, 물론입니다.”
나는 소미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시선을 관리했다. 그녀에겐 사생활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먹는 것, 입는 옷, 들르는 장소 등, 그녀를 규정하는 모든 게 사람들의 소비거리가 되고 마니까.
“그리고 이건 지역방어용 주술구에요.”
그녀는 이번엔 돌돌 물린 종이뭉치를 가져왔다. 그녀를 모델로 한, 소주의 상큼한 뒷맛을 강조하는 광고용 전단이었다.
“가져가셔서 건물 내벽마다 붙여두시면 돼요. 만약 크록의 주술사가 정신에 작용하는 술법을 쓴다면, 이걸로 방어하실 수 있을 거예요.”
“큰 도움이 되겠군요.”
“마지막으로 이건 박봉팔님만을 위한 선물이에요.”
그녀가 건넨 건 심플하게 생긴 USB였다.
“제 솔로곡을 리믹스한 버전이에요. 오실 때에 맞춰 작업을 했는데, 다행히 어제 녹음을 마칠 수 있었어요.”
“어제 녹음한 노래라고요?”
“네.”
그녀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경직된 동작으로 상자를 건네받았다. 부채나 포스터는 이해가 가도, 노래는 어떤 연유에서 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셨을 때 들으시면 돼요. 진성을 직접 듣는 건 아니라서 한 번밖에 효과를 못 보시겠지만요.”
“아하, 그렇군요.”
나는 날아오르려던 망상의 나래를 다급히 접었다. 이건 주술사의 찬트였다. 그녀는 목소리를 통해 내 전투능력을 강화할 작정이었다.
강철의 카둔은 휘하에 강철의 자매단이라 불리우는, 오직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전사단을 거느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 전사단의 장기중 하나가 바로 찬트였다. 황군이 진격할 땐 언제나 자매단의 피 끓는 노래가 함께했다.
“제가 준비한 건 다 드렸는데,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혹시 괜찮은 갑옷을 구할 데가 없겠습니까?”
나는 지난번에 소미가 입고 나타났던 철판갑옷을 떠올렸다. 그녀의 체구에 맞춰 주문제작된 데다가, 카둔의 가호까지 내려진 명품이었다.
암살자라는 직군의 특성상 내겐 그런 갑옷까진 필요가 없었다. 가슴을 가리는 정도면 충분했으나, 방어력만큼은 확실해야만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장인 한 분이 계세요. 그분께서 제가 필요한 걸 다 만들어주셨거든요. 원하시면 제가 그분께 연락을.......아니면 그분께 프로젝트에 합류해달라고 부탁을 드려볼까요?”
“저는 찬성입니다.”
“그러면 국장님만 허락해주시면 되겠네요.”
갑옷의 요구수량은 나날이 늘어날 것이다. 이쯤에서 전속 대장장이를 보유해두는 게 좋을 듯했다. 지금껏 환생자의 영입을 그녀가 도맡아왔기 때문에, 부탁이 거절당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저는 그럼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몸조심하셔야 해요. 제가 함께해드리지 못해서 정말 죄송하네요.”
“아닙니다, 아직은 할 만합니다.”
나는 괜한 허세를 부렸다. 소미가 함께해준다면 엄청난 전력이 될 것임은 틀림없었다. 아약의 상체를 박살내버리던 그 일격이 아직도 생생했다. 어떻게 이런 수줍은 소녀가 그런 잔인한 기술을 쓰는지는 의문이나, 그녀가 강철의 자매단 소속이었다면 그쪽이 본성에 더 가까울지도 몰랐다.
나는 소미에게 받은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외교부 건물로 돌아왔다. 건물 안으로 막 들어서려는 참에, 동창놈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유일한 친구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는 이상민이었다.
나는 그냥 받지 말까 생각도 해보았다. 보나마나 술이나 마시자고 할 텐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기에.
- 어, 무슨 일이냐.
- 죽었냐?
상민은 다짜고짜 내 부고여부부터 묻었다.
- 아쉽게도 살아있다.
- 죽은 게 아니면 전화는 좀 받고 살자.
- 급한 일 있냐?
- 있었지.
- 뭔데?
- 유진이가 최종 데뷔조에 들었다.
- .......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이놈은 아직도 유진이 타령이었다. 연예인 굿즈를 한 아름 싸든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 나 끊는다.
- 잠깐만, 할 말 더 있어.
- 가급적 짧게 말해봐.
- 소미 소식이다. 네가 관심있어하는 애.
- .......뭔데?
방금 그 소미를 직접 만나고 오는 길이지만, 놈이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 투시즌 올해 월드투어 일정이 아직 안 올라왔다. 그것 때문에 팬싸가 완전 뒤집어졌다. 불화설, 그룹해체설, 뭐 별별 말이 다 나오는 중이야. 현재로선 소미 때문이라는 게 가장 유력하다. 원래부터 구설수가 많았던 멤버라.
- 무슨 구설수?
- 알잖아, 남자문제.
- 알았다, 소식 고맙다.
- 고마우면 우리 유진이 데뷔무대 본방 시청 좀 부탁한...
나는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소미는 포탈 프로젝트 때문에 아이돌을 그만둬야할지 고민중인 듯했다. 투어가 미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만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서서 말린다면 오지랖이겠으나, 그녀가 잘못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크록과의 전쟁은 프로젝트의 일부일 뿐이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두 세계가 평화적인 교류관계를 맺는 것이니만큼, 그녀 같은 셀럽의 힘이 절실했다.
외교청사는 거대한 보급기지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가구와 합판, 생필품, 박스형 주택모듈 등이 1층 복도부터 지하 어디론가 꾸역꾸역 끝도 없이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 모든 물건의 도착점을 아는 자는 신원이 검증된 소수에 불과했다.
나는 에신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범영 과장부터 찾았다. 그는 쉼 없이 밀려드는 물자를 분류하느라 내가 다가오는 걸 몰라볼 정도로 바빴다.
“과장님.”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가 반색하며 날 맞이했다. 내게 할 말이 많았던 듯했다.
“방금 전 국무회의에서 조직개편안이 의결됐습니다. 현지상황에 발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경호과를 신설하겠다는 안입니다.”
“또 인사이동인가요?”
“그보다는 승진이라고 불러야 할 겁니다. 초대 과장으로 부팀장님이 유력하십니다.”
“잠시만요, 그렇게 막 올려줘도 되는 건가요?”
나는 당황해서 반문했다. 부팀장이란 칭호도 아직 익숙지 않은 마당이었다.
“이상할 것 없습니다. 소미님이나 아약님도 5급 특정직으로 시작하셨죠. 장관님께서는 박봉팔님이 프로젝트를 이끌어갈 핵심 인재라고 보시고, 경호와 관련된 전권을 맡기실 예정입니다.”
“정팀장은요?”
“정팀장님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 인사입니다.”
“.......”
분명 중태라고 들었는데, 뒤에서 협잡이나 하고 돌아다녔을 줄이야.
“알겠습니다. 월급 더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안 그래도 카룩카이의 망명이나 대장장이의 영입 등,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직급이 낮아 면이 서지 않았었다.
“혹시 전권 안에 인사권도 포함됩니까?”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만, 자세한 건 장관님께...”
“인사권 없으면 안 맡겠다고 전해드리세요.”
이범영 과장은 내가 갑자기 강하게 나오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나는 아쉬운 게 내 쪽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배짱을 부려볼 작정이었다.
“그리고 현지인을 영입 가능해야합니다. 이게 핵심이라고도 전해드리세요. 경호임무를 수행하려면 저처럼 우수한 현지출신 전투원이 필수적인데, 현지인을 픽업하는 게 불가능하다면 일을 하지 말라는 소리죠.”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해결됐다, 망명건은.
물론 장관님은 내가 걸어 다니는 악어를 영입할 줄은 꿈에도 모르시겠지.
에신으로 돌아오자마자 날 반겨준 건 억수같이 퍼붓는 비였다. 주술적인 강우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빗줄기가 굵었다.
마그나크록의 주술사는 우리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말려죽일 작정인 듯했다. 그러나 이젠 우리도 기반을 다진 상태이기 때문에, 비가 좀 내린다고 해서 골골댈 일은 없었다.
물론 중화기의 운용은 어려워질 것이다. 첫 교전 후 야심차게 도입한 장비들이 죄다 막사와 함께 떠내려 가버릴 판국이었다.
나는 일단 비를 피해 지휘통제실로 이동했다. 소미에게 받은 굿즈들이 물에 젖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며.
“부팀장님, 안녕하십니까.”
문을 열자 장교들이 일제히 기립하며 거수경례를 올렸다. 그들은 내가 카룩카르에게 맞고 날아간 후로 꼬박꼬박 군대식 예를 차리는 중이었다.
“잠시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나는 소미에게 받은 물품들을 품에서 꺼내 탁자 위에 늘어놓았다. 그들은 내 행동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포스터에 그려진 소미를 보자 아는 척을 했다.
“부팀장님께 이런 취미가 있으셨군요.”
“투시즌하면 쥬리가 최고 아닌가요? 같은 팀원이라고 너무 편향되신 거 아닙니까?”
젊은 장교들답게 곧장 반응이 왔다. 그들은 간만에 긴장을 풀고 왁자지껄하게 농담을 나누었다. 나는 그들이 마음껏 떠들도록 두다가, 적당하다 싶을 때 끼어들었다.
“소미님이 직접 보내주신 주술도구입니다. 부채는 팀원당 하나씩 돌리시고, 포스터는 건물 내벽마다 붙이시면 됩니다.”
“주술도구요?”
“일종의 수호부라고 보시면 됩니다. 혹시 모르니 잘 때도 떼놓지 마십시오.”
나는 그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며 일부러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지휘통제실 문이 벌컥 열어젖혀졌다. 차수진 박사가 물에 젖은 생쥐꼴로 문가에 서있었다.
“부팀장님!”
그녀는 배에서 쥐어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날 부르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크게 놀라 그녀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적습인가?
순간적으로 드는 생각이었다. 그녀의 낯빛이 죽은 듯이 창백했다.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데도, 눈빛만큼은 용광로처럼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전에도 한 번 봤었던 것 같았다.
“......아픈 게 아니시로군요.”
“저 너무 흥분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무슨 일이십니까.”
“크룩카이님이 새끼를 만들었어요.”
“예?”
나는 그녀의 말이 접수가 되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그 무엇으로도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는 단어의 조합이었다.
“믿겨지세요? 그런 고등한 생물이 원시적인, 원생동물이나 할 법한 무성생식을 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
“따라오세요.”
그녀가 내 손을 덥썩 쥐더니, 카룩카이가 있는 막사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따라갔다.
막사 안의 풍경은 변한 게 없었다. 카룩카이는 여전히 도랑 안에 웅크린 채 책을 읽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파충류 특유의 좁다란 동공을 희번덕거리며, 예의 바람 새는 소리로 환영해주었다.
“왔군, 비늘 없는 자들의 전사여.”
“카룩카이, 아까 차수진 박사에게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음, 그 암컷은 이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카룩카이가 턱 끝으로 슬쩍 자신의 옆을 가리켰다. 난 그제야 그의 옆에 나뒹구는 큼직한 살덩이를 발견해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꼬리였다. 그는 도마뱀처럼 자신의 의지로 꼬리를 떼어낸 듯했다.
“곧 큰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전사를 하나쯤 만들어둬야 할 것 같았다.”
전사를 만든다고?
꼬리로?
나는 불현듯이 그가 이틀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나는 마그나크록의 꼬릿살로 창조된 첫 번째 장군이다.
그가 꼬릿살에서 태어났다는 표현은 비유도, 은유도 아니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옮겼을 뿐이었다. 크록이란 종족은 마그나크록의 꼬리에서 비롯하여, 개체의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번성한 종족이었던 것이다.